무림회귀백서 323화
111장 탐관오리(2)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던 진백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일 새끼들이네.’
어느 정도 심각할 거라 생각은 했다만 그 정도가 과했다.
강제 노역에 춘궁기랍시고 9할 이자의 고리대금은 기본이었다.
사람들은 가족을 굶기지 않으려고 모래와 톳밥이 섞인 쌀을 받으면서 빚더미에 내려앉았다.
그런 빚더미를 이용해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땅을 넓히다 보니 용운의 가족은 이제 만석지기란 말도 우스워질 정도로 커진 것이다.
‘쳥렴한 걸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적당히 해 처먹어야지.’
황제도 안 할 짓을 고관대작이라는 작자와 그 가족들이 패악을 저지르는 중이었다.
황실이 마교와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시기를 틈타 더 막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이런 놈들을 그냥 두고 지나가면 내가 더 나쁜 놈일 테지.’
진백천은 용운에 대한 사항을 전부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새벽이니 해가 뜰 때쯤이면 그놈들이 머무는 평과(平果)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성도인 남녕(南寧)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놈들은 제가 따끔히 혼을 내겠습니다. 다들 걱정 마세요.”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설움을 토로했지만 막상 진백천이 그들을 찾아간다고 하니 망설여졌다.
혹시라도 그 혼자 갔다가 관군들에게 도리어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도 고마우이.”
“괜히 코 꿰이지 말고 젊은이 가던 길 가게. 우리야 어차피 살날도 얼마 안 남았어!”
마을 노인들의 말을 듣자 더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놈들 다 덤벼도 저한테 안 되니까 괜한 말 마세요. 그럼 조만간 좋은 소식 들릴 테니 쉬십시오.”
진백천은 춘득에 올라타며 말했다.
곧 쏜살처럼 관도로 달려나가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한참이나 그 뒤를 지켜봤다.
“저 젊은이 괜찮으려나? 우리가 괜한 걸 이야기한 게 아닐까 모르겠어.”
객잔 주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군. 나라도 같이 가서 한소리 해야겠어. 이럴 때 말이라도 더해야 하지 않겠나?”
“며칠 거리를 객잔도 닫고 가겠다고?”
“언제까지 눈감고 귀 닫고 살겠나? 자식들 생각하면 이대로는 안 돼!”
객잔 주인의 결심은 진심인지 보따리를 메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몇몇이 함께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죽든지 살든지 말 한번 시원하게 해보자고!”
그들은 곧 진백천이 향한 방향으로 똑같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마을 사람들과 달리 춘득을 탄 진백천의 이동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작은 마을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용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진즉에 평과에 다다랐을 터였다.
사람들은 진백천이 그들의 죄를 묻자 반신반의하다 곧 봇물이 터진 댐처럼 쏟아냈다.
“용운 그놈은 아비를 닮아 아주 나쁜 놈이지!”
“우리가 그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울분이 터져! 어제도 와서 동네 청년을 이유 없이 후드려 팼어!”
용운은 진백천에게 당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진백천에게 맞은 화를 이곳저곳에 풀어댄 듯 보였다.
“어제 새벽에 엉망인 된 얼굴로 향하더니 그게 자네가 한 일이었나?”
“네. 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죠.”
“맞아! 맞는 말이지!”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조차 잊고 있었던 것처럼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진백천은 그들에게도 충분히 한이 섞인 이야기를 듣고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반나절 뒤, 전의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다.
“박 노인!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긴! 용가 그놈들에게 한마디 하려 함세!”
“뭐?”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하던 자들은 막 떠나간 진백천과 그동안 설움이 떠오르며 서서히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나 어제 이유 없이 용운에게 맞았던 청년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더는 이렇게 맞고 살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빼앗긴 저희 땅도 찾아야죠! 모래 섞인 쌀에 땅을 가져가다니 그런 비겁한 놈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차츰 진백천의 뒤를 따르는 행렬은 점점 길어졌다.
그것은 정작 놈들은 어떻게 후드려 패줄까 고민하는 그조차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루를 더 가서 진백천은 평과에 도착했다.
용가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후. 고관대작이라고 하더니 어마어마하게도 쌓아놨군.”
평과는 그동안 지나쳐왔던 여타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광서성 특유의 기암괴석이 넘쳐나고 산수가 흐드러졌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 하면 바로 산을 배경으로 지어진 거대한 대궐이었다.
한눈에 봐도 족히 천 칸은 넘어 보일 집에 일하는 자들의 숫자만 봐도 이미 작은 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얼마나 수탈을 해댔으면. 쯧쯧.”
진백천은 혀를 차며 말을 끌고 그 집 앞으로 향했다.
관군은 이미 사병처럼 정문 앞을 지켜서는 중이었다.
“어디서 온 놈이냐?”
“노오옴?”
진백천이 말꼬리를 잡자 관군이 움찔하며 놀랐다.
“……누구십니까?”
“알 건 없고 용가의 손님이니까 문부터 열어.”
“……용가의 손님……?”
관군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오늘 찾아오신다고 하셨던…… 연기백 님이십니까?”
‘연기백?’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자 관군은 그 모습을 보고 오해했는지 고개를 넙죽 엎드렸다.
“연왕부의 높으신 분을 감히 못 알아뵀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연왕부라는 말에 그제서야 진백천은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인지 떠올랐다.
황제가 건넸던 연왕부 삼대 중 하나였다.
[연춘왕(淵瑃旺)]
[연자전(淵炙戰)]
[연기백(淵奇魄)]
현재 청해와 서장에서 꼬리를 말고 지내야 할 놈이 왜 이곳에 오는지는 몰라도 진백천에게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기회였다.
아무런 내색 없이 열리는 정문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봤던 것보다 안은 훨씬 더 화려했다.
수없이 돌아다니는 사병들은 물론이고 그 규모가 이미 일개 고관대작을 뛰어넘었다.
‘누가 보면 반역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어.’
하지만 연왕부와 생각이 이어지자 그것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연기백 님. 이쪽입니다.”
진백천이 향한 곳은 용운의 아버지인 용주명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서자 진백천은 익숙한 풍경에 고소를 머금었다.
하늘은 떠받드는 듯 우뚝 솟은 기둥과 천장에 새겨진 황금용은 누가 봐도 황궁의 태화전(太和殿)을 떠올렸다.
그 바로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용주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백천을 반겼다.
“연 공자! 환영하오! 듣던 대로 헌양하고 기품이 넘치시오!”
용주명은 키가 작고 퉁퉁했다.
용운과 비슷하면서 조금 더 욕심 있는 얼굴이었다.
‘견부견자(犬父犬子)인 셈이네.’
진백천은 자연스레 의자에 걸터앉으며 상단전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용주명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과연 듣던 대로 싸가지 없는 놈이구나. 연왕부의 협조를 위해 이런 놈에게도 굽실거려야 한다니. 왕부가 될 때까지만 이라도 참아주마. 쯧.
사병들을 봤을 때부터 대충 눈치챘지만 용주명은 황실을 배신하고 연왕부에 붙을 셈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단순한 고관대작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허허허. 여기까지 오시면서 힘든 일은 없으셨소이까?”
“딱히. 그나저나 용운은 왜 안 보이지?”
“……운이는 몸이 안 좋아서 쉬는 중이오. 그래도 잠깐 얼굴을 보이라 했으니 곧 모습을 보일 것이오.”
-어린놈이 재수 없이 반말이나 지껄이다니. 연왕조차 그러지 않았거늘!
용주명은 진백천의 반대편에 앉으면서 뜨거워진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오늘 만남에 대한 용건을 꺼냈다.
“연왕부가 황군을 붙잡아둘 때 저희가 곧바로 북경을 치겠소이다. 오면서 봤겠지만, 저희 사병을 다하면 5천은 족히 되니 잘하면 황제의 목을 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소.”
으스대며 말했지만 턱도 없는 소리였다.
제대로 된 무인이 섞이지 않은 사병 따위야 북경에 포진되어 있는 동창과 금의위들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전부 죽어 나갈 게 분명했다.
무관이 아닌 용주명은 전투를 단순히 숫자놀음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연왕부도 분명히 이 같은 사실을 알지만 눈먼 비수로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일 터였다.
‘쓰다 버리기 딱 좋은 패겠지.’
“뭐 그렇게 하도록 하지.”
진백천이 손을 까닥거리자 용주명이 품속에서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연왕부와 용가의 비밀스러운 협약을 적어둔 밀약서였다.
방금 말한 내용이 미리 글로 적혀 있었다.
용주명은 빈자리에 수장을 찍고 진백천에게 건넸다.
그리고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아버임. 누져서 죄서함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등장한 것은 엉망이 된 얼굴의 용운이었다.
최대한 신경 써서 말하는 듯했지만 부러진 이로 발음이 조금씩 새어 나갔다.
꼴에 창피한 줄은 아는지 눈을 깔고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그게 뭐냐! 혹시 싸움이라도…… 크흠…… 한 것이냐?”
용주명은 다급하게 용운을 다그쳤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지켜보던 진백천이 이죽이며 입을 열었다.
“싸운 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맞았나 보군. 맞지?”
“……연 곤자. 그게……기슴을 단해서…….”
“기습을 당했다고 하기에는 다친 곳이 너무 많은데? 기녀를 부르다 처맞은 건 아니고?”
기녀란 말에 용운은 흠칫 놀라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슬금슬금 시선을 올려 진백천의 얼굴을 확인한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서, 설마 내가 연 공자에게 맞은…… 건가?
아버지와 독대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연 공자가 분명했다.
용운은 참으로 개 같은 상황에 얼굴을 찌푸리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제, 제성함니다!”
“이놈! 연 공자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구나!”
용주명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용운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진백천이 나서서 뭐라고 하기 전에 자신이 호되게 혼내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멍청한 놈! 오늘 귀한 손님이 온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런 사고를 쳐?!”
“어허. 철이 없을 때니 그럴 수도 있지.”
외모만 봐도 용운의 나이가 그보다 열 살은 더 많았지만 진백천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놈! 연 공자의 배려심에 감사해라! 다음에도 또 이 같은 일이 있으면 혼쭐을……!”
“아니지.”
“……연 공자? 뭐가 아니란 말이오?”
“철이 없으니 그럴 수 있다 이해하는 건 그렇다 치고.”
진백천이 용운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잘못한 값에 대한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
“……벌이라면……?”
“감히 내 말을 가져가려 했었으니 응당 비슷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렇다면 용가에서 제일 뛰어난 명마를 드리겠소.”
“명마는 됐고 돈으로 대신하고 싶은데?”
용운과 용주명은 진백천의 담담한 목소리에 두 눈을 꿈뻑거렸다.
“왜? 돈이 없나? 그러면 이것도 전부 파기하도록 하지.”
“그런 뜻이 아니오!”
진백천이 찢을 듯 밀약서를 집어 들자 용주명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쯧. 황군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 그런지 아주 돈독이 올랐군!
어린놈에게 돈까지 뜯겨야 하는 처지에 순간 울컥했지만 용주명은 주문처럼 왕부가 될 기회임을 되뇌이며 사람을 불러왔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면 우리 용가도 왕부가 될 수 있는 기회다!
한번 주는 거 말이 안 나오게 주려는지 상자에는 금원보가 차곡히 쌓인 상태였다.
“허허. 어지간히 수탈을 했나 보군.”
“수탈이 아니라. 정당하게 사업을 한 결과오. 연 공자는 말을 조심하시오.”
“말이 심했다면…….”
진백천은 금원보 상자를 들어 올리며 어깨에 졌다.
족히 30관(100kg)이나 나갈 상자를 아무렇지 않게 들자 용주명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어쩔 건데?”
“……뭐라?”
“내 말 못 알아들어? 말이 심하면 어쩔 건데?”
이죽이는 진백천의 웃음을 보고 둘이 이상함을 느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연왕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뭐?”
둘의 시선이 진백천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그가 둘을 향해 달려든 후였다.
“허억!”
용주명과 용운의 시야로 조금 전 자신이 건넨 금원보 상자가 빠르게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