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18화
109장 지하궁(1)
진백천은 야율을 비롯해 예림에게 돼지 가면이 말한 것을 그대로 전했다.
“저 줄을 잡아당기면 쥐새끼가 올라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놈이 지하궁으로 기어들어 가기 전에 단번에 잡아야 돼. 아버지를 어디에 가둬뒀는지 알아야 하니까!”
예림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광귀의 말로는 다른 십이지괴들과 다르게 백서왕의 강함은 진짜라고 했다.
그 기관진식을 다루는 솜씨를 비롯해 다른 뱀, 개, 돼지의 무공도 전부 익혔으니 지금은 더더욱 강해졌을 터였다.
“더구나 놈은 무척이나 음흉할 뿐만 아니라 조심성이 넘치지. 분명 도망칠 길 없이 머리를 내밀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잠시 눈이 풀리게 미끼를 내놓죠.”
“미끼?”
진백천의 시선이 예림을 향했다.
놈이 소공녀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녀를 붙잡았다고 하면 궁금해서라도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때 놈을 제압하거나 처리하면 되었다.
야율과 무인들이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오히려 예림이 눈을 빛내며 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놈이 다가오면 후려패도 되지?”
“마음대로 해.”
“좋았어!”
예림을 허공에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역시나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계획을 다 짜고 진백천은 놈이 어디서 올라올지 주변을 살폈다.
상단전에 내력을 불어넣자 곳곳에 백서왕이 만들어놓은 비밀통로가 보였다.
‘한두 개가 아닌데?’
야수왕이 앉던 권좌의 바닥부터 벽면과 바닥 여러 곳이 아래로 향했다.
올라온다면 그곳 중 하나일 테니 사람들과 나눠서 입구를 지켰다.
“준비됐지?”
진백천은 천장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줄은 지하 깊숙이까지 이어졌는지 바닥에서 미약하게 진동이 울렸다.
이곳과 연결된 지하궁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였다.
“온다.”
과연 기관진식의 대가인 백서왕답게 줄을 잡아당기자 통로가 움직이며 위치가 바뀌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백서왕은 통로에서 바로 빠져나오지 않고 바깥 상황을 지켜봤다.
“크크큭. 소공녀를 미끼로 나를 잡아내겠다고?”
“……백서왕! 어서 나와라! 네놈을 제외하고 다른 십이지괴는 전부 붙잡혔다!”
“그깟 머저리 같은 놈들 따위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목소리론 도저히 위치가 가늠되지 않았다.
빠르게 기어 다닐뿐더러 백서왕의 목소리가 통로 안에서 울렸기 때문이었다.
‘쥐새끼처럼 기어 다니는 것도 빠르네.’
“궁주를 구하고 싶거나 나를 잡고 싶다면 지하궁으로 오거라! 모레까지 오지 않는다면 궁주의 목숨은 끝이다!”
“아버지를 건들지 마!”
“크크큭. 귀여운 소공녀. 걱정 마라. 너는 내가 언제든 꼭 위로해 줄 테니.”
모두가 백서왕의 농락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유일하게 진백천만이 바닥과 천장을 빠르게 훑었다.
상단전에 집중하자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당당한 말투와 달리 왜소한 몸집으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도광귀에게 듣기로 백서왕의 십이용천공은 지둔술(地遁術)이었다.
땅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빠르게 도망쳤다.
‘흐음. 지금의 움직임은 단순히 지둔술뿐만이 아니야. 개 가면의 십이용천공도 익힌 모양이군. 움직임이 비슷해.’
그렇다면 다른 돼지, 뱀의 십이용천공도 똑같이 익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단번에 잡지 못하면 땅속으로 곧바로 기어갈 확률이 높았다.
진백천의 눈동자가 놈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백서왕은 계속해서 이죽이며 소공녀를 희롱했다.
“만약 소공녀가 나를 따라 지하궁으로 향한다면 궁주는 무사히 올려 보내주도록 하지.”
“냄새나는 네놈과 지하로 내가 왜 가!”
“세상에 별천지가 있다면 바로 내 지하궁이다! 한번 와보면……!”
기회를 엿보던 진백천은 놈이 잠깐 소공녀가 서 있는 바닥에 멈춰 섰을 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두꺼운 바닥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단단한 화강암이 단숨에 박살이 나며 손아귀에 백서왕의 머리가 붙잡혔다.
“쥐새끼야. 이제 그만 나와라!”
진백천은 그대로 있는 힘껏 머리를 뽑아냈다.
부서진 바닥 틈으로 백서왕의 머리가 빠져나왔다.
과연 쥐를 닮은 얄쌍한 얼굴에 백발의 노인이었다.
놈은 갑자기 뻗어온 손아귀와 뽑혀 나온 상황에 기겁했다.
“네, 네놈은 뭐냐!”
“뭐긴 뭐야. 쥐 잡는 사냥꾼이지.”
상체마저 뽑혀 나올 뻔하던 백서왕은 몸을 버둥거리며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두두둑-
얼마 있지도 않은 백발이 한 뭉텅이로 뽑혀 나갔지만 이대로 지상으로 집어 던져지는 것보다 나았다.
“이거 놔라!”
강기가 실린 양손으로 진백천의 손목을 노렸지만 반탄지기에 의해 오히 튕겨 나갔다.
“허억!”
백서왕은 그제서야 진백천의 실력을 가늠하며 더욱 다급해졌다.
머리가 뽑히든 말든 그대로 지하로 기어들어 갔다.
놈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했던 진백천은 아쉽게 놈을 놓치고 말았다.
“하아. 쥐새끼 아니랄까 봐 빠르긴 빠르네.”
진백천은 손아귀에 남은 백서왕의 머리털을 털어냈다.
“네놈! 가만두지 않겠다! 감히 지하궁의 왕인 나를 공격해?!”
백서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멀찍이 떨어진 천장이었다.
머리만 쏙 내민 채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백천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모습은 아닌 것이 정수리만 휑하니 머리카락이 뽑혀 있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면 내려와서 한판 붙던가?”
백서왕은 이를 악다물면서도 결코 머리 이상은 내밀지 않았다.
방금 가볍게 나눈 한 수로 진백천의 무위가 얼마 정도인지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네놈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 당장 오늘까지 소공녀를 지하로 내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궁주는 오늘 죽는다!”
진백천은 헛소리 말라는 듯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파편을 발로 찼다.
돌멩이는 그대로 날아가 백서왕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금세 붉게 물든 피부가 놈을 더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외쳐봤자 잘 안 들린다니까?”
“……크으윽! 당장 오늘까지다! 명심해라!”
백서왕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자신의 손해라 생각했는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야수궁 궁주가 앉던 권좌가 뒤로 밀려나며 통로가 열렸다.
그 아래쪽으로 잘 닦인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소공녀님! 지금 당장 바로 내려가서 궁주님을 구출하겠습니다!”
재는 것 없는 야수궁의 무인들답게 야율은 곧바로 내려가겠다고 소리쳤다.
만약 진백천과 도광귀가 나서서 막지 않았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뛰어들었을 터였다.
“네가 보기에 백서왕은 어땠냐? 처리 가능하겠냐?”
“놈의 지둔술이 보통이 아니던데요? 작정하고 숨으면 힘들 수도 있어요.”
아무리 진백천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면 재빠른 백서왕은 땅을 가르고 도망칠 확률이 더 높았다.
“놈의 지하궁인가 뭔가에 가보셨어요?”
“가봤지. 소공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궁전처럼 만들어놨다. 복잡한 통로는 미로 같아서 잘못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들었지. 지금은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더 심해졌을 거다.”
“흐음. 그렇다면 괜히 많이 끌고 들어가 봤자 다치는 자들만 더 나오겠네요.”
진백천은 생각을 정리하고 소공녀와 야율에게 다가갔다.
“지하궁에 들어가는 건 소수만이야.”
도광귀와 진백천 단둘이었다.
나머지는 야수궁 주변에 남아 있는 잔당과 백서왕이 만들어놓은 기관진식을 파괴하기로 했다.
소공녀가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지만 독초를 먹은 야수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왕왕이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예림아. 가능한 많은 야수를 살리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후우.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정말 둘만으로 괜찮겠어? 길도 모르잖아.”
“나도 반려야수가 있어서. 쥐굴에는 쥐가 제일 적합하지 않겠어?”
진백천의 말에 통통이가 고개를 쏙 내밀고 쳐다봤다.
그가 통통이를 믿는 것은 단순히 쥐라서만이 아니었다.
“왕왕!”
-흥! 주인 저놈이 지하궁의 지리를 다 안다는데?
“왕왕왕!”
-여러 번 왔다 갔다 해봤대!
왕왕이는 지리뿐만 아니라 궁주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았다.
동물과 의사소통이 되는 통통이는 왕왕이에게 그러한 정보를 모조리 들었다.
-아는데 무서운 놈이 지키고 있어서 함부로 못 다가간대.
“무서운 놈? 백서왕 말고 또 다른 놈이 지하궁에 있나?”
“왕왕왕!”
-사람은 아니고 거대한 뱀이라는데?
뱀이라는 말에 통통이도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면 쥐새끼가 뭔 짓을 꾸미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죠.”
“좋다.”
도광귀는 거침없이 통로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진백천이 바싹 따랐다.
통로는 역시나 미로처럼 여러 갈래길로 나눠졌지만 통통이가 있는 한 딱히 걱정할 건 없었다.
청서생인 통통이의 후각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음. 아까 그 인간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통통이가 안내하는 곳은 가장 넓은 공동이었다.
궁주가 갇혀 있는 곳은 그곳을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가장 걱정했던 기관진식은 의외로 통통이로 인해 해결되었다.
-주인! 여기 앞에 뭔가 있어!
평범한 쥐가 아니었기에 기감이 민감했다.
덕분에 기관진식과 같은 인위적인 것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과연 백면신투(百面神偸)마저 욕심내며 새끼를 받아갈 만했다.
“잠깐만 멈춰봐요.”
진백천은 기관진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어떻게 파훼하는지는 잘 알았다.
첫째로는 일일이 설치된 함정을 역순으로 풀어가는 방법이고 둘째로는…….
‘그냥 부숴 버리면 되지.’
파강식(破彊式).
거칠게 물결치는 강기의 파도가 통로를 가득 메우며 흘러갔다.
기관진식은 발동될 틈도 없이 전부 박살 나며 사라졌다.
“이동하죠.”
“허허. 좋구만. 좋아.”
도광귀는 답답할 것 없는 진백천의 방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오기 한참이 지나고 통통이가 그를 멈춰 세웠다.
“여기야?”
통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커다란 공동의 구역이 드러났다.
곳곳에 화로가 놓여 있고 야수궁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주인. 저 아래. 함정 투성이다. 그냥 내려가면 큰일 나.
하지만 일일이 하나하나 해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곳에 백서왕이 없는 지금 빠르게 궁주를 구출하고 빠져나가야 했다.
‘차라리 단번에 기관진식을 전부 작동시켜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금노산의 십이금천각(十二金天閣)을 다시 상대한다고 해도 자신이 있는 진백천이었다.
그거에 비하면 이곳의 기관진식은 겨우 쥐새끼가 만들어놓은 자글자글한 수준이었다.
어차피 새롭게 얻은 반탄지기(反彈之氣)를 시험해 볼 기회가 필요했다.
진백천은 곧바로 전신에 태허무극진결을 순환했다.
미력한 바람이 불어오며 반탄지기가 피어올랐다.
“흐음. 제가 먼저 내려가 볼게요.”
“조심해라.”
진백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아래로 향했다.
투욱-
그가 바닥에 내려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에서 기관진식이 작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