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13화
106장 태풍 속으로(2)
살왕은 진백천과의 가벼운 신경전 이후로 무척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기이한 압박감은 그렇다 치고 자신이 그에게서 자신이 물러섰다는 게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물러선 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피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리, 그것이 아니라면 팔다리 하나쯤은 잘려나갔을 터였다.
‘그만큼 날카로운 기운이었지. 어린놈이 저 정도까지 실력을 쌓다니 제법이야.’
만약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차후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은 그의 차지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살왕은 더더욱 살심이 돋았다.
‘얼굴에 상처라도 남겨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죽은 듯이 자고 있던 그가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일렁이는 모닥불 너머로 진백천의 마차가 보였다.
어차피 정도회는 그가 속한 마교의 적.
여기서 그든, 아니면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이든 아무나 상처 주는 것 정도는 상관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살기로 뒤덮였다.
‘밤에는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마음을 정하려는 그때.
그의 뇌리에 조그만 조약돌 하나가 던져졌다.
다름 아닌 진백천이 있는 마차에서부터였다.
드드득-
조심스레 열린 마차의 문틈으로 검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진백천이 그를 응시했다.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얼핏 황금빛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일어나면 넌 죽어.
단순히 말뿐인 협박은 아닌 듯 살왕의 머리 위에는 낮에 느꼈던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살왕은 진백천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자 오히려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교에서 왜들 그렇게 정도회와 진백천을 잡으려 드는지 알 것 같았다.
-재밌군.
둘은 한참을 그렇게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한발 물러선 것은 살왕이었다.
진백천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여러 기척이 전해졌다.
이대로 싸우면 그가 불리한 것은 자명한 일.
살왕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진백천은 그 후로도 한참을 그를 주시했다.
그런 둘의 은근한 신경전은 항구가 있는 요녕까지 계속되었다.
* * *
진백천은 요녕까지 함께 이동하면서 의외로 연룡과 황노와 제법 친분을 쌓았다.
연룡은 호기가 넘치는 무인답게 강자이자 정도회의 회주인 진백천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 했다.
진백천도 연룡과 황노에 제법 관심이 많았기에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과할 정도로 그를 경계하던 황노도 시간이 갈수록 설렁한 진백천의 모습에 긴장을 풀었다.
“연 공자는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맞습니다. 한동안 황노와 강호를 유람하듯 돌아다녔는데 이제 돌아오라고 닦달이라서 말이죠.”
“나도 그 기분 잘 알지.”
진백천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당소예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닦달하지 않았잖아요. 대신 잡으러 왔을 뿐이죠.”
“응. 그래서 더 고맙지.”
연룡은 투닥거리는 진백천과 당소예 사이가 무척이나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보통 제법 직위가 있거나 이름이 있는 자들은 목을 뻣뻣이 들고 다니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에게는 그런 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연룡은 그런 둘을 지켜보다 문득 황노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곧 항구에서 헤어져야 하는 그들이기에 그는 궁금한 것을 참지 않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진백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룡은 자연스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회주님께서 천리안(千里眼)과 천리통(千里通)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아. 그거 말이지?”
연룡이 물었지만 주변에 있던 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태상장로와 적의단의 무인들부터 살왕까지 전부였다.
진백천은 그러한 시선에 괜히 장난기가 돋았다.
“비슷하지?”
어딘가 애매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은 오히려 담담한 황노에게 눈짓을 주며 말했다.
“황노께서도 나와 비슷한 걸로 아는데.”
“……저 같은 노인네야 회주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일 뿐이겠죠.”
연룡은 그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당소예의 만류로 대화는 끝이 났다.
식사를 하자는 이유였지만 당소예가 지능적으로 대화를 끊을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느리게 움직이던 마차는 마침내 요녕의 항구에 닿았다.
연룡은 마차로 계속 이동하기에 아쉽게도 헤어져야 했다.
“언제든 시간이 나면 연 가문에 들리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물론이지. 연 공자도 부디 집안일 잘 정리하고 정도회에 들르고 싶으면 언제든 와. 또 보자고.”
연룡은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물러났다.
그 뒤로 황노가 눈짓으로 인사를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연 가문이라. 역시 내가 아는 구중천(九重天) 중 하나겠지?’
비록 진백천에 비해 떨어지지만 연룡은 후기지수 중에 수위를 다툴 정도의 무력이었다.
사패천의 유소어처럼 가문의 사생아도 아니었고, 황노 같은 자가 붙을 정도면 분명 가문의 직계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연룡은 구중천 특유의 폐쇄성이 짙지도 않고 가문의 노인네들과 달리 아직 생각이 열려 있는 듯했다.
‘그런 자와 친분을 만들어놓아서 나쁠 건 없겠지.’
“자. 이제 우리는 또 지긋지긋한 배를 타고 이동해 볼까?”
“……그냥 마차 타고 가도 되는데.”
당소예는 올 때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며 작게 궁시렁거렸다.
도홍경과 중혁마저도 배라고 하자 얼굴을 찌푸렸지만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배가 정답이었다.
“하루빨리 돌아가려면 배를 타야 돼. 마차로 가면 며칠이나 더 걸릴지 모른다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잠잠했다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고 하늘에도 구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용풍(龍風)인지 뭔지도 없고 이 날씨면 멀미도 하나 없겠는데?”
진백천의 중얼거림에 항구에 있던 선원 중 하나가 맞장구쳤다.
“하하하! 공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 20년 바다 생활 중에 이렇게 잠잠한 바다는 처음입니다! 용풍(龍風)도 바로 얼마 전에 끝이 났고 호수나 다름없는 상태죠!”
바다를 휘젓던 용풍이 끝났다는 말에 다른 일행도 전부 안심했다.
일행이 많다 보니 진백천은 배를 2척을 빌렸다.
진백천과 당소예를 비롯해 당가의 무인이 탄 1척과 태상장로와 적의단이 탄 1척이었다.
혼자 겉도는 살왕은 진백천의 배에 올라탔다.
‘살왕은 내 시야에 두는 편이 더 안전하겠지.’
배는 두 척 모두 항구에서 가장 큰 크기였다.
워낙 잔잔한 바다 위에 있다 보니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멀미 없이 가겠는데요?”
“그러게. 아무래도 운이 따라주나 봐.”
선원이 뱃머리에 술병을 깨뜨리며 출항을 알렸다.
“빠르면 내일 저녁쯤에 요녕의 항구에 도착할 겁니다!”
칠주야나 바다를 헤맸던 당소예는 화들짝 놀라며 선원을 쳐다봤다.
“그렇게 빨리요?”
“물론입니다! 바다가 이렇게 잔잔한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제 선원 생활 30년에 이런 바다는 처음입니다! 으하하하하!”
분명 조금 전에는 20년이라 했던 것이 금세 10년이 늘었다.
잠잠한 바다를 지켜보던 진백천은 문득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태풍이 불기 전 일시적으로 날씨가 고요해지는 현상을 말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 날 저녁.
“용, 용풍이다아아아! 다들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다아아아! 이대로면 전부 죽고 말거야!”
아무 걱정 말라던 선원들은 바람에 휘청이며 절망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잠잠했던 바다는 어느새 폭군이 되어 배를 휘몰아쳤다.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용풍이었다.
* * *
용풍의 처음 시작은 막 어둠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힘없이 부채질을 하듯 바람이 불다 말고를 반복했다.
그때만 해도 일행은 전부 배의 갑판에 올라 식사를 하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배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흐음. 저거 설마…… 용풍인가?”
지평선을 지켜보고 있던 선원이 검게 치솟은 줄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먹구름이라 하기에는 바다까지 길게 연결이 되었고, 용풍이라고 하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컸다.
“에이. 저만한 용풍이 어디 있다고 먹구름이야. 먹구름!”
“그렇겠지?”
하지만 그곳에 가까워지자 바람이 매섭게 불기 시작했다.
뒤늦게 배를 돌렸지만 용풍은 바닷물을 거칠게 빨아들였다.
먼저 앞서나가던 태상장로의 일행의 배가 전복할 듯 거칠게 휘청였다.
“뭐예요! 잠잠하다면서요!”
“죄, 죄송합니다! 제 바다 생활 5년에 이런 용풍은…… 처음…… 허억!”
선원의 바다 생활 30년은 5년으로 줄었다.
동시에 배가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불안한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좀 해봐!”
“버,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아아!”
이미 앞서가던 태상장로의 배는 용풍의 물보라 덕에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 소리가 그들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젠장! 폭풍전야가 맞았어!’
진백천은 일행을 최대한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움켜쥐었다.
얼마나 계속될지도 모르는 용풍 속에서 진백천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허억! 피해애애애!”
그때 하늘에서 성인 남자보다 큰 생선이 펄떡이며 떨어져 내렸다.
용풍에 휩쓸려 올라갔다가 재수 없게 배 위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배에 구멍이 나거나 어디 하나가 부서질 게 분명했다.
진백천은 재빨리 검을 뽑아 들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스걱-
허공을 가는 검은 흔들림 없이 생선을 반 토막 내며 바다로 쳐냈다.
문제는 그런 생선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크고 작은 것들이 폭풍우에 섞여 배 위를 향했다.
“전부 고개 숙여!”
진백천은 재차 배의 돛대를 밟고 뛰어올랐다.
‘모조리 튕겨낸다!’
파류식(破流式).
휘이이이이이-
검신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허공에 퍼져나가며 빗물과 생선들을 끌어당겼다.
아주 순간적이지만 배 위로 떨어지는 배가 사라질 정도로 강한 흡입력이었다.
모인 물방울들은 금세 커다란 강줄기로 변했다.
그 안에 담긴 물고기들은 검 끝은 따라 요동치며 흔들렸다.
“저, 저게 무슨?”
“시, 신선님이시다!”
“역시 회주님이야!”
진백천에 대해 잘 모르는 선원들뿐만 아니라 일행조차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아압!”
이내 진백천은 강한 음성과 함께 빗물과 생선이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겨우 5년밖에 되지 않는 경력의 선장은 그 틈을 타 배를 옆으로 강하게 틀었다.
넘어질 듯 누운 배는 금방 자세를 잡으며 용풍의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반대편에서 마찬가지로 용풍을 벗어나는 배가 보였다.
“후우. 개죽음당할 뻔했네.”
배 위에 오른 진백천은 숨을 헐떡이며 용풍을 올려다봤다.
만약 저기에 계속해서 쓸려 갔다가는 아무리 큰 배라고 해도 산산조각이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진백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재빨리 몸을 빙그르르 돌며 검을 뻗었다.
어느 틈인가 다가온 살왕이 그를 향해 손을 뻗는 중이었다.
수라혈선(修羅血線).
미세하게 떨리는 주변의 기운을 감지해내지 못했다면 이미 뒤통수가 뚫렸을 공격이었다.
카앙!
피륙의 살과 검이 부딪쳤음에도 묵직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진백천은 그 충격에 뒤로 주르륵 물러나며 살왕을 노려봤다.
살왕은 더는 본색을 감추지 않고 살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굳이 지금 해보자 이거지?”
“끌끌. 지금이야말로 네놈을 죽일 절호의 기회 아닌가?”
둘이 재차 강하게 부딪치며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