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11화
105장 북해빙궁의 주인
[진백천이 북해빙궁으로 향하고 있으니 주의.]
단 한 문장의 글귀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았다.
우선.
“내가 정도회에서 빠져나온 걸 알고 있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며 이동했었다.
그런데도 마교에 처박혀 있던 마뇌는 그의 이동을 알아차렸다.
“보통이 아닌 건 알았지만 마뇌야말로 정말 천리안이라도 있는 건가?”
진백천은 혀를 차며 서신을 그대로 불태워 버렸다.
만약 이 전서구가 조금만 더 빨리 도착해서 삼천영이 확인했었더라면 이처럼 쉽게 죽지 않았을 터였다.
절대 몸을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에 숨어서 꽤나 귀찮게 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다니. 이제 정말 정도회로 돌아갈 때군.”
어차피 태상장로를 돕고 북해빙궁의 일을 처리하겠다는 초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배를 타고 서둘러 돌아간다면 북해로 올 때보다 더 빠르게 돌아갈 수 있었다.
“슬슬…… 겨울이 끝나가기도 하고.”
겨울이 끝난다는 것.
그것은 곧 길이 열리고 전투가 시작함을 뜻했다.
겨우내 준비를 끝마친 마인들은 이제 봄의 새싹을 짓밟으며 중원으로 들어설 것이다.
“돌아가면, 잔소리…… 꽤나 듣겠지?”
당소예의 성난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진백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빙궁으로 돌아갔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의 몸에 물든 피 냄새는 빙궁에 흐르는 자들의 피 냄새로 맡아지지 않았다.
* * *
북해빙궁(北海氷宮) 가주전.
설류운은 아직까지 변한 자신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주름 하나 없이 젊어진 것은 물론이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찻잔이 얼어붙을 정도로 냉기가 넘쳐흘렀다.
바로 앞에 독대한 태상장로에게 차를 따라주려 했지만 뜨거웠던 잎 차는 금세 냉차가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쓰러지고 일어났더니 생긴 변화였다.
“미안하군. 영 적응이 되지 않아.”
“당연히 그렇겠지. 그 주름진 얼굴이 그리 팽팽해졌는데 적응이 되겠나?”
태상장로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차를 뜨겁게 달구며 입가에 가져갔다.
“듣기론 내가 쓰러진 사이에 빙궁을 많이 도왔다고?”
“돕긴. 설궁한 그 아이에게 이용이나 당했을 뿐이지.”
“흐음.”
자신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설류운은 처음으로 표정 변화다운 모습을 내비쳤다.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듯하며 싸늘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가라앉히며 냉기를 흩어냈다.
“미안하군. 아내가 죽으면서 낳은 늦둥이들이라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성미가 악독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설류운은 자신이 쓰러진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삼 형제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갖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지켜보기만 하던 설류운은 뼈를 깎아내는 심정으로 이들을 전부 소궁주의 직위를 박탈하고 일반 무인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삼 형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마 내 아들들이 내게 독을 먹이고 강시로 만들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흐음.”
태상장로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한 침묵이 잠시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설궁한은 자네들이 갇혔던 팔한지옥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리고 정확히 49일 후에 꺼내 장례를 치러줄 생각일세.”
태상장로마저도 불과 7일을 견디지 못해 반쯤 죽어가던 팔한지옥이었다.
그런 곳에서 홀로 49일을 버티라는 것은 결국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설류운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더는 생각하기 싫은지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나를 정신 차리게 해준 그 친구는 누군가?”
“아아. 회주를 말하는 건가?”
회주라는 단어에 설류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직책으로 짐작되는 인물은 강호에 몇 없었다.
“자네가 쓰러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 그중에 가장 큰 일은 정도회와 어린 회주겠지.”
태상장로는 감출 것 없이 진백천에 대해 전부 털어놨다.
마교의 음모를 여러 차례 간파해 낸 것뿐만 아니라 강호의 세력 대부분 통합하고 놈들에게 선전포고까지 했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설류운도 그 이야기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단순히 무공이 뛰어나다고만 하면 평범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사패천의 천주인 사자혁이 그랬고 젊은 강자는 끊임없이 등장하니까.
다만 많은 이들을 이끌어나가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인가.”
장강의 앞 물을 뒷물이 밀어낸다는 뜻이었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세대교체를 일컬었고 또 다르게 썩은 물을 밀어내는 신성을 뜻하기도 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뭐가 말인가?”
설류운은 진백천이 자신과 내력대결을 하며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일 때부터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그저 남의 꿈속에서 지켜보는 듯한 몽롱함뿐이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백발의 노인이 내게 다가왔지.”
“……백발의 노인? 일어나라고 자네를 깨우던가?”
설류운은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라고는 맞지만. 거침없이 뺨따귀를 때리더군.”
“허허. 제법 독특한 꿈이군.”
“그런데 그 백발의 노인이 뿜어내는 기운이 그 어린 회주와 똑같았어.”
태상장로는 그 말에 껄껄거리며 웃었다.
“회주가 가끔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지만 결코 노인은 아닐세. 오히려 천방지축인 어린아이 같기는 해도 말이지.”
“그런가.”
설류운은 백발의 노인 뒤로 검은 용을 본 것도 같았지만 그것은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단순히 그의 꿈일 테니까.
둘은 말없이 차를 한 잔씩 들이켰다.
태상장로는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고맙군.”
둘은 우정 섞인 시선을 교환했다.
* * *
진백천이 다시 설류운을 보게 된 것은 둘의 독대 이후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때쯤은 어수선한 빙궁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서서히 정상화가 되어갔다.
빙궁을 가득 채우던 마인의 흔적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빙궁을 도와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 혹시 뭔가를 원하는 게 있으면 주고 싶은데.”
궁주의 시선은 정확히 진백천을 향해 있었다.
태상장로와는 이미 독대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진백천은 미리 생각했던 것을 꺼내놨다.
“정도회와 동맹을 맺으시죠.”
“동맹? 북해에 있는 북해빙궁과 동맹을 맺어봤자 이득 볼 게 있나?”
“친구 사이에 이득을 따져봤자 좋을 게 없죠.”
“친구가 되면 달라질 게 많을 텐데?”
설류운의 냉정한 표정에도 진백천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별로요. 가끔 무림대회나 축하할 일 있으면 따듯한 중원으로 놀러도 오시고, 서로 선물이나 보내면서 안부나 물으면 되죠.”
“그것뿐인가? 친목?”
“굳이 캐물으시면 뭐. 공동의 적을 위해 함께 어깨를 맞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그 공동의 적이라면 당연히 마교를 뜻했다.
설류운도 마교에 의해 이런 꼴을 당했으니 원한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자세한 사항은 논의해야 했지만 북해빙궁과 정도회 사이의 동맹관계는 무난히 이루어졌다.
그 이외에 꾸준한 교역과 친선교류는 덤이었다.
“앞으로 마인들은 결코 북해에 발을 들이지 못할 거야.”
“그 정도만 돼도 정도회는 무척이나 안심될 거예요.”
더는 머리 위에서 밀려온 얼음과 같은 비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서로 작성한 동맹의 문서는 한 장씩 나눠 가졌다.
볼일은 다 끝났지만 설류운은 아직 궁금증이 담긴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혹시 누구에게 무공을 사사받았는지 물어도 되나?”
“가전무공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배웠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스승 중에 백발의 노인이 있나?”
설류운은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로 자신의 꿈 이야기를 꺼냈다.
태상장로는 저 친구가 주책을 떤다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백천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백발노인의 모습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해내기에 제법 놀랐다.
“맞을 겁니다. 아마도요.”
“그랬군.”
설류운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제법 기뻐 보였다.
“무공에 담긴 근원과 그 원류는 뜻이 흐려지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지는 법이지.”
설류운은 아마도 자신이 본 백발의 노인을 진백천이 익힌 무공의 원류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백천을 쳐다보며 충고하듯 말을 이었다.
“부디. 자신을 잃지 말게.”
다짜고짜 하는 말에 진백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누구한테나 하는 충고라고 하기에는 소림사의 죽어가던 장문인도, 심상 세계의 백발노인도 전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진백천이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설류운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고 감사합니다. 새겨듣죠.”
설류운이 그런 말을 한 것은 그저 꿈속에서 봤던 검은 용 때문이었다.
섬뜩한 기운을 뿜어내던 그것은 백발노인의 뒤에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든 기회를 노리다 단숨에 씹어 삼킬 것처럼.
“그래. 부디 그러게.”
둘의 의미심장한 대화를 끝으로 가주전에서의 짧은 만남은 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류운의 보답마저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그는 칼 같은 자답게 그들이 빙궁을 도와준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상하려 했다.
놀랍게도 그가 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누워 있던 빙관에 들어 있던 빙정이었다.
냉기가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보물답게 여전히 그 기운을 잃지 않았다.
“허어. 근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도홍경은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빙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눈밭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끔찍한데 이렇게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것을 품고 가는 건 더더욱이었다.
“그래도 보물이니까 중원에 가지고 가면 제법 돈이 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겠지.”
“싫으시면 저 주십시오. 제가 가지겠습니다.”
중혁이 손을 내밀자 도홍경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 빙정을 넣었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자신이 가지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전해졌다.
* * *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일행은 바로 다음 날 떠날 준비를 했다.
드디어 따듯한 중원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장개가 서둘러 옷을 챙겨입었다.
“후우.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나은 법이지.”
“꼭 여기가 저승처럼 말하네.”
“얼마 전까지 팔한지옥에 갇혀 있었는데 거기가 저승이 아니면 어디냐!”
진백천 또한 장개와 투닥거리며 썰매에 오르려는데 창고지기 장 씨가 다가왔다.
“……잠깐 말 좀 나눌 수 있겠나?”
그는 할 말이 있는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다름 아닌 동창을 상징하는 동패였다.
의문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장씨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빙궁에 오래전 잠입했다는 동창의 무인이 바로 날세. 원래대로라면…… 내가 나서야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지.”
도망가지 않고 이곳에 계속해서 남아 있던 것도 중원인을 비밀통로로 몰래 받은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진백천이 화라도 낼 줄 알았는지 헬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은 그를 이해했다.
마인들이 가득 찬 상태에 늙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곳에 남아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빙궁이 더 익숙하신가 봐요?”
“그렇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으니까.”
진백천은 동패를 다시 그에게 건넸다.
“가끔가다 소식 한 번씩 전해주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제 이름도 팔고요.”
“……그래도 되나?”
“그러지 못할 게 뭐 있겠어요. 같은 동창끼리.”
물론 진백천은 가짜로 만들어낸 것이고, 장 씨는 존재하지도 않는 동창이었지만 둘은 큰소리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으으. 춥다. 형님 어서 가시죠!”
도홍경이 썰매에 타서 그를 불렀다.
“잘 가게.”
진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썰매에 올라탔다.
썰매는 곧 빠르게 눈밭을 미끄러져 가며 나아갔다.
올 때와 다르게 바람도 없이 무척이나 포근했다.
‘내가 이곳에 익숙해진 걸까?’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올 때와 다르게 북해의 초입에 금방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마치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꽤나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진백천의 얼굴을 확인하고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회주니이이이임!”
다름 아닌 당소예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 꼴이 꾀죄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