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08화
104장 대환장 통수전(2)
“……설류운. 그 친구가 강시가 되었단 말인가? 그것도 자기 아들들 때문에?”
“그거 정확한 거냐?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도운 게 전부 헛짓거리였다는 뜻인데.”
진백천은 황망한 그들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의 마을에서 화로를 부순 소궁주를 본 철관표의 증언과 도홍경이 목격한 것만 합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물론 소방방이나 몇몇 무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설궁한 공자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굳이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내 생각이 맞다면 오늘 저녁의 별궁에서는 많은 피가 흐를 거야. 당연히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은 중원인들의 피일 테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태상장로의 표정이 굳었다.
“그 광대가면을 쓴 마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네. 마교 교주의 직속 무력단체 중 하나인 천살대의 무인이에요. 설궁한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 한 명만으로도 족히 삼공자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전부 죽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자와 우리가 양패구상을 하거나 힘을 빼놓길 원하는 것일 테군.”
과연 연륜은 무시 못 하는지 태상장로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 말을 꺼낸 건 당연히 좋은 생각이 있어서겠지?”
진백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성공한다면 빙궁의 삼 형제부터 마인들까지 전부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터였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그의 말에 모두가 이채를 띄며 혀를 내둘렀다.
“허허…… 정말 어떤 의미로 대단한 계획이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너는 대체 어떤 세상을 사는 거냐.”
진백천은 장개의 그 말을 최고의 극찬으로 받아들였다.
* * *
설궁한이 머무는 별궁.
저녁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빙궁의 삼 형제는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자리였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옷이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무척이나 달랐다.
“이제 아버지를 따르던 장로들은 잠잠해졌어?”
“저번에 시범 삼아 몇몇 놈들을 처리했더니 다행히 조용해. 더구나 오늘 우리가 모인다고 하니까 좋아하는 꼴들이…… 크큭”
설궁한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첫째인 설시한이었다.
그는 소궁주로 자리하면서 실상은 전부 설궁한의 지시를 받았다.
“마인들은?”
“삼천영 그자가 워낙 귀신같아서 어떤 분위기인지…….”
콰앙!
설궁한이 답답한 듯 탁자를 내리치자 찻잔이 깨지며 붉은 찻물이 흘러내렸다.
둘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설궁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아버지가 쓰러진 지 3년째야. 그 3년 동안 마인들 분위기 하나 파악해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럴 거면 살아 있을 가치가 있나?”
“미,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었는데.”
설모한은 긴장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인 설류운은 쓰러뜨리고 강시로 만들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시행한 것은 전부 설궁한이었다.
그의 잔악함과 간교함을 전부 봐왔기에 그들은 설궁한을 두려워했다.
“이번에만 잘 풀어가면 북해빙궁도 우리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아버지가 형들 전부 병X짓 한다고 쳐내려던 거 내가 다 막아준 거 알지?”
“물론 잘 알지.”
“너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자리를 유지했겠어.”
“그러니까 오늘 밤은 잘 좀 하라고.”
설궁한은 시녀에게 새로운 차를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켜면서 태상장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나 다른 두 명은 그들이 팔한지옥에서 빠져나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왔다고? 어떻게?”
“동창의 무인이 도왔다더군. 바퀴벌레 새끼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잡아 죽였는데도 숨어 있는 꼴이라니.”
“지금이라도 내가 죽여 버릴까?”
“아니. 됐어. 놈들을 이용해서 마인들을 공격할 거니까.”
설궁한은 오늘 저녁에 있을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첫 시작은 삼천영을 기습하는 태상장로의 일행이었다.
물론 그들로 인해 수많은 마인들이 지키는 삼천영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기습이 성공하면 그거야말로 좋은 거고 아니더라도 서로 피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빙궁의 무인들은 뒤에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언제까지?”
“중원인들이 전부 죽을 때까지.”
그 후에 마인들을 돕듯 태상장로와 적의단의 사체를 치워주면 되었다.
“그리고 놈들의 긴장이 풀렸을 때 그때를 노려 다시 한번 공격하는 거야.”
힘까지 빠진 상태에서 마인들이 빙궁의 무인들을 이겨낼 리 없었다.
벌레 잡듯이 놈들을 으깨 버리면 남은 것은 분명히 삼천영뿐.
“그자는 빙궁의 무인이나 우리가 직접 나서기에는 제법 무서운 놈이지.”
“맞아.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자야. 하지만 그런 놈도 아버지한테는 안 될 거야.”
“아버지……?”
설궁한은 의문에 찬 두 형제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설마 완성된 거야? 그 빙마인지 뭔지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삼천영과 마인들은 오늘부로 끝이야.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지.”
설시한과 설모한은 그를 따라 활짝 웃기 어려웠다.
그가 궁주로 등극하는 날 두 형제가 어떻게 될지는 그들조차도 모르니까.
다만 그의 자비에 기대며 지금같이 꼭두각시로라도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저녁에 가까워지자 설궁한의 시녀가 다시 그들을 찾아왔다.
차가운 표정은 여전히 속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모시러 왔습니다.”
태상장로는 말을 아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진백천과 도홍경, 중혁은 그들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별궁에 따로 이동한 진백천은 장씨가 구해준 마교의 흑의를 갈아입었다.
“으으. 이제 하다하다 마인으로 분장이라니.”
“걱정 마. 치고 바로 빠질 거니까.”
마인으로 변한 그들은 조심스레 그들 틈에 섞였다.
들어선 별궁의 분위기는 마치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마인들과 빙궁의 무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거칠게 일어났다.
“설시한 소궁주님이십니다.”
시녀의 소개에 첫째 공자가 들어섰다.
그는 포악한 기세를 숨기지 않으며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 뒤를 이어 둘째인 설모한 또한 냉기를 풀풀 풍기며 반대편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설궁한이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힘없는 셋째라고 생각하는 걸 테지.’
하지만 다른 두 형제의 변화는 극명했다.
설궁한의 시선에 따라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빙궁의 무인들로 변장한 태상장로 일행이 보였다.
삼 형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수만은 없으니, 우리도 의견을 합쳐야 하지 않겠어?”
“무슨 의견?”
그다지 알맹이가 있는 내용의 대화는 아니었다.
단지 곧 벌어질 사태에 대비하듯 긴장감만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진백천은 양옆의 중혁과 도홍경을 쳐다봤다.
둘 다 두건으로 눈 밑을 가린 상태였다.
-함께 공격하고 난전이 벌어지면 바로 뒤로 빠져.
-네. 형님.
진백천은 조심스럽게 마인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빙궁의 무인들에게 집중된 터라 그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는 자는 없었다.
별 시답지 않은 내용으로 대화를 하던 삼 형제는 긴장감을 돋우려 함인지 괜히 쓸데없이 큰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다 괜히 마교를 끌어들인 네놈의 잘못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냐?”
“나도 살기 위해서 그런 거였어!”
“살기 위해서는 무슨! 혹시 알아? 지금이라도 공격하려는 속셈…….”
진백천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마인의 팔을 툭 치며 등을 강하게 밀어냈다.
“크윽!”
마인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며 빙궁의 무인들을 향해 나아갔다.
누가 봐도 기습을 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감히!”
마인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빙궁의 무인들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손을 뻗었다.
한백신장(寒白神掌).
마인이 다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사방에서 쏟아진 차가운 장기가 전신을 직격했다.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마인은 동상처럼 깨어져 나가며 피와 살점으로 흩날렸다.
진백천은 이때다 싶어 마인들의 등을 쳐내며 소리쳤다.
“공격해라! 빙궁의 얼음 개들을 당장 죽여 버려!”
“이놈들이 감히!”
곧 마인들과 빙궁의 무인들이 섞이며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가장 앞에 서서 무기를 휘두르던 도홍경과 중혁은 진백천의 명령대로 조심스레 자리를 벗어났다.
펼쳐진 아수라장에 삼 형제는 당황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못했다.
“설마…… 나를 죽이려고 이런 자리를 만든 거야?!”
“무슨 소리! 마인들이 먼저 공격했다! 네놈이야말로 나를 노렸겠지!”
그런 둘을 말린 것은 설궁한이었다.
아수라장이 벌어지기 전부터 기묘한 상황을 지켜봤다.
마인은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삼천영의 계략일까 쳐다봤지만 그는 조용했다.
마찬가지로 불쾌한 기색으로 그와 삼 형제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설궁한. 혹시라도 마교를 배신하려는 것이라면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서슬 퍼런 전음에 기가 죽을 만도 했지만 설궁한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제 아비인 설류운의 질책조차도 불쾌하게 느꼈던 그였다.
핏줄도 아닌 삼천영이 그를 협박하자 눈이 뒤집힐 듯이 화가 솟구쳤다.
“각오라. 그건 살아남고 나서나 하지?”
그의 신호에 문이 열리며 대기하고 있던 빙궁의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태상장로의 일행이 먼저 나서지 않은 것이 계획과 달랐지만 어차피 그들은 적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인들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인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명령뿐만이 아니라 삼 형제는 직접 앞으로 나서며 마인들의 머리를 터뜨렸다.
양손에서 희뿌옇게 일어나는 한기는 북해빙궁의 직계만 익힐 수 있다는 빙백신공(氷白神功) 이었다.
마인들은 빠르게 그 수가 줄어들었다.
남은 것은 삼천영과 그 옆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삼천영. 지금이라도 목숨을 구걸하면 살려주지.”
“흐흐흐. 새끼 강아지 셋이서 모이더니 이제 이무기라도 잡아보겠다는 거냐?”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빙궁의 무인 중 하나가 한기를 풀풀 날리며 달려들었다.
곧게 뻗은 주먹에 머리가 으깨질 것만 같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퍼억!
삼천영의 손이 언제 뻗었는지 모르게 무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튀어나온 손에는 여전히 벌떡이는 심장이 들린 채였다.
벼락같은 움직임은 구촉비전이 분명했다.
‘놈이 익힌 다른 무공은 뭐지?’
진백천은 구석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놈을 주시했다.
사천영 같은 경우에는 혈마의 독문무공이던 수라혈마공(修羅血魔功)이었다.
하지만 삼천영에게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지독한 기운이 느껴졌다.
“흐흐흐. 네놈들에게는 벌이 필요하겠구나! 그것도 아주 지독한 벌 말이다!”
놈은 손아귀의 심장을 으깨버림과 동시에 그 피를 사방에 흩뿌렸다.
독이라도 섞여 있을 줄 알았지만 그저 평범한 피였다.
하지만 그 피는 산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어나라! 망자들아!”
삼천영의 눈에서 폭발하듯 귀기 쏟아지며 죽은 자들을 훑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시체가 몸을 들썩였다.
“귀신들아. 산 자들의 피와 살점을 뜯어라!”
놈의 명령에 죽은 자들이 대답하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굶주린 늑대처럼 빙궁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