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304화
103장 팔한지옥(八寒地獄)(1)
북해빙궁(北海氷宮) 빙정고(氷精庫).
빙정을 모아놓은 이곳은 북해빙궁 내에서도 특별한 자가 아니면 들어설 수 없었다.
만년한석(萬年寒石)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는 쩌릿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북해의 마을에 있는 화로를 부수면서까지 모은 빙정과 기존에 있던 것들이 전부 그곳에 담겨 있었다.
“이 만년한석만으로 만들어진 빙관만이 빙정의 차가움을 유지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는 자는 다름 아닌 소궁주였다.
그는 여유롭게 산책하듯 관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이자 궁주인 설류운이었다.
“쯧. 끈질기군. 언제쯤이면 완성되는 거지?”
그는 뒤편의 어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어둠이 일렁이며 광대가면은 쓴 남자가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마뇌가 강호로 내보낸 천살대 마인 중 하나이며 빙궁의 마인들을 이끄는 자였다.
“시간 싸움입니다. 소궁주.”
“그놈의 시간 싸움! 벌써 3년이 지났다! 빙정이 필요하다 해서 마을에 있는 것까지 뺏어다 주었는데도 더 기다리라고?”
“어차피 천륜을 어긴 이상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시간이 더 걸릴수록 빙정의 힘을 더 흡수한다는 것일 테고…… 완성되는 빙마(氷魔)도 더더욱 강할 테니.”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삼천영(三天影)을 노려봤다.
놀랍게도 그의 목적은 쓰러진 자신의 아버지이자 궁주인 설류운을 최강의 무인이자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정신력이 강했고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삼천영. 당신이 나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빙궁의 내분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나?”
광대가면을 쓴 자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하지만 두 개의 구멍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결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귀귀백서(鬼鬼魄書)를 익혀 귀기로 일렁이는 두 눈은 그 누구도 오래 마주 볼 수 없었다.
소궁주가 이를 악다물며 고개를 돌리자 그제서야 삼천영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어차피 서로 원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소궁주는 궁주의 자리와 최강의 무인을. 그리고 저희 마교는 북해빙궁의 동맹을 말입니다.”
“동맹은 무슨! 노예를 원하는 것일 테지!”
소궁주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자신의 아버지마저 독으로 쓰러뜨린 이상 지금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빙마만 완성되면 삼천영 네놈부터 갈가리 찢어주마!’
소궁주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빙관을 내려다봤다.
“그나저나 소궁주. 언제쯤 다른 공자들을 처리할 생각인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어차피 제 분수를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니.”
“흐흐. 소궁주가 그들을 도륙할 때가 기다려져서 참을 수 없군요. 아비에 이어 형제까지 죽이는 천륜이라!”
삼천영은 그가 천륜이란 말을 꺼낼 때마다 소궁주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그를 계속해서 도발하며 즐거워했다.
“……태상장로와 개방의 무인들은 어쩔 셈이지?”
“궁주의 상태를 짐작했으니 이대로 중원으로 쫓을 수도 없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피를 묻히는 건 내 손이고?”
삼천영은 바람 빠지는 듯 흐흐거리는 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귀신 소리처럼 들려서 소름이 끼쳤다.
“걱정 마십시오. 곧 궁주가 아니, 빙마가 일어설 겁니다. 그러면 그 누구도 소궁주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 거칠 것도 없으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삼천영은 그 말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어둠 속에 파묻혀간 신형이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귀신처럼 사라졌다.
소궁주는 그림자를 한참이나 노려보다 다시 빙관으로 다가갔다.
궁주의 얼굴은 저 하얀 빙정만큼이나 맑고 투명했다.
“일천귀마대법(一千鬼魔對法)을 펼치기 위해서 네놈들과 손을 잡았지만, 주문에 쓰인 것이 내 피인 이상 네놈들은 결코 빙마를 다스릴 수 없다. 아무리 뒤 꿍꿍이가 있다 해도 결국 내 뜻대로 흘러갈 테니까!”
소궁주의 두 눈이 그 포악한 음기만큼이나 날카롭게 빛났다.
* * *
새벽이 되자 진백천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비몽사몽으로 일어났다.
이미 북해에 온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이 추위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더 추운 새벽에 나서려고 하니 쉽게 발이 안 떨어졌다.
“으으. 이 추위 정말 싫다.”
“……형님. 저는 그냥 마을에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진백천은 억지로 도홍경을 끄집어내며 밖으로 나섰다.
이미 촌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촌장님이 직접 안내하시려고요?”
“그래야지! 내가 얼굴을 직접 비추는 것 말고 더 확실한 게 뭐가 있겠나?”
그는 성치도 않은 몸을 끌고 나섰다.
이 엄동설한에 직접 걷는 것은 아니고 썰매를 타고 이동했다.
썰매 앞에는 유난히 털이 두껍게 난 개들이 춥지도 않은지 숨을 헥헥대며 장난치는 중이었다.
말에 비해 추위를 더 잘 견딜뿐더러 눈 위에서만큼은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손잡이 꽉 잡게.”
“네. 알겠습니다.”
개들이 빨라 봤자 얼마나 그럴까 싶었지만 질주하기 시작하자 몸이 뒤로 휘청이며 썰매가 미끄러지듯 눈 위를 나아갔다.
가속도가 붙자 그 속도가 경공을 펼친 것만큼 빨랐다.
밤하늘을 풍경 삼아 한시진 정도 달리자 저 멀리 달빛 아래로 거대한 성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북해빙궁?”
“마치 얼음의 성처럼 보여요.”
도홍경의 말대로였다.
평범한 돌이 아니라 전부 눈으로 조각해 만든 것 같은 외견이었다.
“벽돌이었던 곳 위에 눈이 녹고 얼고를 반복하면서 저렇게 얼음의 성이 되어버렸지.”
촌장은 지근거리에 멈추고 거울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달빛을 반사시키며 어딘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흐음. 부디 확인해야 할 텐데.”
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반대편에서 똑같은 빛이 번쩍였다.
이쪽의 것과 다르게 다급함이 느껴졌다.
불빛의 반짝임을 세던 촌장이 몇 개의 꾸러미를 수레에서 내리며 진백천에게 건넸다.
“맞군. 이걸 창고지기 장 씨에게 건네면 될걸세.”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북해의 마을 사람들은 전부 죽었을 거야.”
그 말은 진심인 듯 진백천의 팔을 잡은 촌장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북해의 사람들은 자네를 절대 잊지 못할 걸세!”
그리고 촌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이름을 물었다.
단순히 정도회에서 왔다고만 해서 그 이상은 묻지도 않았었다.
“진백천입니다.”
북해빙궁까지 온 마당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속이지 않았다.
그리고 촌장이 어딜 가서 자신에 대해 떠벌릴 자도 아니었다.
촌장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지 두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역시 평범한 자는 아니었군!”
“또 인연이 되면 뵙죠.”
진백천은 가볍게 웃으며 빙궁으로 향했다.
촌장은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 * *
“후우. 젠장할 하늘의 쓰레기.”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발은 허벅지까지 푹푹 빠졌다.
“젠장. 다들 내 뒤를 따라와.”
참지 못한 진백천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눈 위를 밟고 지나갔다.
발자국조차 남지 않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공이었다.
도홍경과 중혁도 그처럼 완벽하진 않지만 눈을 밟으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빛이 나는 곳에 도착하자 촌장이 말한 장씨가 나와 있었다.
빙궁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북해 마을 사람들에 비해 조금도 나아 보이지 않았다.
퀭한 얼굴에 잘 못 먹는지 비쩍 곯은 몸이었다.
“정말 왔군! 다들 나를 따라오게!”
그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둘러 쪽문으로 들어갔다.
겨우 한 사람 들어갈 정도로 뚫려있는 돌벽이었다.
창고와 이어진 비밀통로가 이곳인 모양이었다.
모두가 들어오자 그는 다시 벽돌을 쌓아 벽으로 만들어놓았다.
“으윽. 나 좀 도와줘.”
겨우 작은 벽돌을 드는 것만으로 몸을 휘청이는 것을 보니 상당히 굶주린 모양이었다.
진백천과 일행은 재빨리 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그제서야 장 씨는 안심하며 진백천 일행을 살펴봤다.
“……그거 혹시 촌장이 준 건가?”
그는 진백천이 건네는 보따리를 건네받고 서둘러 풀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장 씨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어렸다.
“허억! 얼마 만에 보는 음식이야!”
그는 보따리에서 음식이 나오자 허겁지겁 입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익히지도 않은 쌀알을 으적거리며 삼켰다.
그리고 이내 배를 채우고 한숨을 내쉬며 널브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하아. 추한 모습을 보였군. 미안하네. 나는 빙궁의 창고지기 장호열이야. 편하게 장 씨라 부르게.”
굶주림을 달래자 목소리에 제법 힘이 실렸다.
“자네들은 아무래도…… 중원인들이겠지?”
이미 진백천의 외모와 말투에서부터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맞습니다. 우선 여기 상황에 대해서 알려주시겠습니까?”
“허허. 어려울 것 없지. 현재 빙궁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야. 저 높으신 사람들은 여전히 배부르고 등따시지만 나 같은 자들은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힘든 실정이지. 그런데도 서로 싸워대는 꼴이란. 쯧.”
그는 봇물 터지듯 빙궁의 삼 형제에 대한 욕설을 쏟아부었다.
궁주가 갑자기 쓰러지고 난 뒤 지난 몇 년간 그들의 옆에서 빙궁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똑똑히 지켜본 장 씨였기에 가능한 욕이었다.
“잔악한 첫째 소궁주 설시한은 자신의 말을 안 듣는 자들을 전부 죽이거나 감옥에 가뒀지. 처음에야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해 겉으로 보여주는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빙궁이 마교의 손에 넘어가든 말든 죽이고 없애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자는 원래부터 폭력적인 자였던 거야.”
두 번째 소궁주인 설모한 조차 간교함에 극에 달한 자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마교마저 빙궁에 끌어들이며 설시한에게 대항했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마교에 목덜미가 잡혀 말도 안 되는 이점을 계속해서 제공해 왔다.
“빙궁의 사재를 마음대로 마교에 넘긴 거지. 이 텅텅 빈 창고를 보게. 원래는 10년 동안 틀어박힌다 해도 빙궁 전체가 생활할 수 있는 물자가 있던 곳이야.”
“그걸 전부 마교에 넘긴 겁니까?”
“넘겼을 뿐일까! 빙궁의 무인들이 사용해야 할 무기마저 빼돌리려던 것을 겨우 셋째 공자가 막은 거지!”
장 씨는 입을 삐죽이며 계속해서 그들에 대해 털어놨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세 번째 공자에 대해서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설궁한 공자는…… 흐음. 몸이 약하지. 그래서 처음부터 별궁에 갇혀 지내는 신세야. 가끔 궁주님을 보러 가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그곳에서 계시지. 중원인들이 축출된 이후에는 별다른 세력도 없어서 첫째, 둘째 공자들도 신경 쓰지 않아.”
“그 중원인들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아는 자들인가?”
진백천의 진중한 얼굴에 그가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장로와 그 개방의 무인들은 현재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중이지. 아마…… 꽤나 고생하는 중일 거야.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들이 갇힌 곳은 빙궁의 가장 지하인 팔한지옥(八寒地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