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99화
101장 도광귀의 충고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
잠이 들었던 중혁은 몸을 일으켰다.
원래부터 깊게 잠들지 못하던 그였기에 여러 번 자다 깨는 것은 익숙했다.
특히나 오늘처럼 격하게 움직이거나 피를 본 날은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차가운 바람이라도 쐬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여전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성에 남은 황금 조각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중에는 어른이고 아이고 구분이 없었다.
“어엇. 이놈아! 그 황금 조각 내놔라!”
“싫어요. 내 거예요!”
고아로 보이는 꼬질꼬질한 아이가 자신의 황금 조각을 노리는 남자를 밀치며 도망쳤다.
“이놈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
남자는 아이를 쫓아 절뚝이며 뛰어갔다.
아이가 걱정이었지만 중혁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그 아이를 구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쯧쯧. 다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건 마찬가지군.”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도광귀였다.
그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중혁의 옆에 걸터앉았다.
“너는 어린놈이 뭐 그렇게 세상 다 산 표정을 짓고 있느냐?”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중혁은 도광귀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십대악인에 속한 자, 진백천과 안면이 있어 함께 있을 뿐 그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역시 속이 뒤틀려 있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광귀는 중혁의 날 선 반응에 끌끌거리며 웃었다.
“말 그대로다. 어린놈이 호기심도 없고 잔뜩 메말라 있어.”
보통이라면 화를 내며 당신이 뭘 아느냐 따져 물을 테지만 중혁은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흘려넘겼다.
도광귀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네 또래의 아이들은 어땠는지 아느냐?”
중혁은 그의 말에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구촉비전의 부작용을 겪으며 죽거나 사혈방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자신이 또래에 대해서 모르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조금만 잘나도 으스대며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대지. 끊임없이 자신을 알리려 하고 그 때문에 자신을 과대해서 드러내. 물론 주먹 몇 번 맞으면 제정신을 차리기도 하지만 말이야.”
도광귀는 자신의 커다란 주먹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네놈은 금방 늙어 죽을 노인처럼 속이 컴컴해.”
“맞는 말입니다. 바뀌려고 노력 중인데 어렵더군요.”
“노력? 설마 회주를 닮으려 하는 거냐?”
중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광귀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멍청한 놈아. 저놈은 군계일학이다. 혼자 세상 사는 놈이며, 따라 한다고 따라갈 수도 없고 그저 하늘의 태양 같은 놈이다. 너같이 속이 뒤틀린 놈이 태양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는 눈이 멀고 그나마 가야 할 길도 잃어버릴 뿐이야.”
“그렇다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저 고개만 죽이고 있으라고요?”
“아니지. 그저 태양의 따스함을 느끼며 감사해 해라. 대신 네놈이 가야 할 길은 스스로가 찾아 걸어가라. 남들의 기대가 아닌 네놈이 원하는 대로.”
그렇기에 도광귀는 내기에 미쳐 지금까지 십대악인이 되어 살아왔다.
하지만 후회하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자신의 멋대로 살아왔기에 오히려 더욱 즐겁게 살아올 수 있었다.
“인생은 말이지. 되감기는 없다. 그저 앞으로 걸어나가며 하나하나 배울 뿐이다. 그렇기에 느릴 순 있어도 늦음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그러면 지금의 뒤틀림도 조금은 펴질 테니.”
겨우 십대악인 따위가 하는 말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지만 중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봤다.
그리고 그건 썩어 고인 물이 된 마음을 이리저리 뒤섞어놨다.
‘원하는 대로 살라고?’
도광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품속을 뒤지더니 묵빛의 권갑(拳甲)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이건 선물이다. 주먹으로 꽤나 이름 날리던 놈의 권갑인데 그걸 끼고 있으면 손을 다치는 일은 없을 거다. 천하의 도광귀가 내기 없이 이렇게 선물을 주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회주에 대한 빚을 갚는다 치면 되겠지.”
“회주님께 진 빚을 왜 저한테 갚습니까?”
“그거야 내 마음이다.”
도광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 하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중혁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다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기민한 기감에 어린아이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까 남자를 밀치고 도망간 아이가 마침내 붙잡힌 터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이상하게도 도광귀의 음성이 자꾸 머릿속에 울렸다.
중혁은 뒤돌아서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역시나 아이는 남자에게 잡혀 웅크린 채 두들겨 맞는 중이었다.
“이놈! 잡히지 않을 줄 알았냐! 어서 금 조각을 내놔라!”
“싫, 싫어!”
“내놓지 않으면 불구로 만들어 주마!”
남자는 겁만 주려는 게 아닌 듯 아이의 여린 발목을 짓밟으려 했다.
중혁은 그대로 남자의 뒷목을 붙잡아 멀찍이 집어던졌다.
“어엇! 네, 네놈은 또 뭐냐!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라!”
“싫다면?”
“뭐, 뭐?”
남자는 중혁과 아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도망쳤다.
방금 한 수로 중혁이 평범한 자가 아니란 것을 알아챈 것이다.
중혁은 넘어진 아이의 근골을 살피며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멍이 든 것을 제외하면 다친 곳은 없었다.
“괜찮아?”
“……네. 괜, 괜찮아요.”
아이는 중혁이 구해줬음에도 그가 혹시나 금 조각을 빼가지 않을까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안 뺏을 테니까 안심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괜히 저런 사람 또 만나지 말고.”
“……감사합니다.”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인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단순히 아이를 구해줬을 뿐인데 중혁은 왠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답답함이 일부지만 사그라들었다.
‘단순히 아이를 구해서가 아니야.’
그런 선행은 진백천과 함께 다니며 지금까지 충분히 베풀어왔다.
‘도광귀. 그 사람의 말대로 내가 내 의지대로 아이를 도왔기 때문이겠지.’
중혁은 가볍게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말이다.
* * *
진백천이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자 일행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후였다.
“뭘 이렇게 서둘러?”
“서두르긴요. 벌써 한낮입니다. 해가 중천이라고요.”
“그래? 며칠간 고생했으니 하루 정도 쉬엄쉬엄해도 괜찮아.”
뒤늦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도광귀를 가장 먼저 작별 인사를 했다.
“벌써 가시게요?”
“여기 있어서 뭐 하냐? 그렇다고 내가 네놈 뒤꽁무니를 쫓아다닐 노릇도 아니고.”
그건 진백천도 같은 생각이었다.
도광귀는 그 자체로 강호에서 꽤나 유명인사였다.
어디든 그가 다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부 내기에서 이겨서 그가 가진 보물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아참. 지하 감옥에서 도와드렸으니까 좋은 물건이라도 주세요.”
마치 밀린 외상값이라도 달라는 듯이 손을 뻗는 진백천을 보며 도광귀가 헛웃음을 지었다.
“황강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느끼는 거지만 네놈은 참으로 뻔뻔하구나.”
하지만 말과 다르게 도광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품속에 손을 넣었다.
도광귀가 꺼낸 것은 약간 붉은 기가 도는 돌멩이였다.
“화금석(火金石)?”
“알고 있느냐?”
“물론이죠.”
화금석이란 화로 밑에서 수십 년 동안 녹았다 굳었다를 반복하며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결정체였다.
다소 특이한 모습만큼이나 그 효능도 특이했는데 단순히 내력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을 냈다.
또한 불 속에 넣으면 그 자체만으로 불길이 더욱 강하고 오래 유지되었다.
진백천이 북해빙궁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준 것이다.
“북해의 추위는 무척이나 매섭다. 단순히 춥다고 설명될 정도가 아니지.”
오죽하면 북해에서는 입 가리개를 풀고 숨을 쉬어도 안 되었다.
뜨거운 입김을 타고 찬기가 들어가 촉촉한 폐를 얼려 버렸다.
언 폐는 곧 수축하며 찢기며 피를 토하고 죽게 되었다.
“화금석이 있으면 그나마 따뜻하겠네요.”
“그것도 그렇지만 단순히 그러라고 준 게 아니야. 북해의 마을에 그것을 굉장히 가지고 싶어하던 놈이 있다. 철관표라는 자인데 그놈에게 그것을 대가로 빙궁까지 길 안내를 부탁하면 들어줄 거다.”
북해에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눈보라를 뚫고 빙궁까지 가려면 길 안내는 필수였다.
특히나 빙궁으로 가는 길은 그곳에 사는 주민들마저도 위험해할 정도였다.
“철관표?”
“그래. 북해의 대장장인데 나와 내기를 해서 그 화금석을 얻으려 했지. 하지만 결국 연달아 내 앞에서 죽는 이들을 보며 포기하고 돌아갔다. 무척이나 원하던 것이니 웬만해서는 부탁을 들어줄 거다.”
“흐음. 감사합니다. 확실히 도움이 되겠네요.”
“쯧. 그렇게 감사하면 언제든 남만에 한번은 들려라. 다른 십이지괴를 소개시켜주마.”
남만으로 진백천을 초대하는 것은 단순히 은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십이용천공의 비급을 2개나 얻은 진백천이었다.
그라면 남은 이들의 것을 얻어 최초로 완성된 십이용천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에서였다.
“기회가 되면 꼭 가보죠.”
“그래. 나는 그곳에서 수련을 하며 기다리마. 네놈의 호무살을 보니 피가 끓어올라서 말이지!”
“굳이 기다리지는 말고요.”
도광귀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시는 뒤도 안 보고 사라졌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흑룡강을 벗어난 진백천 일행은 운이 좋게도 인근에서 지나가는 상단과 마주쳤다.
그들에게서 마차 한 대와 식량을 비롯해 여러 물건을 구매했다.
혹시 몰라 추위를 피하기 위한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도 겹쳐 입었다.
“후우.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무리 추워도 끄떡없을 것 같은데요?”
얼핏 보면 둥글둥글 곰처럼 보이는 3명이 서로를 보며 흡족해했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상인은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미간에 커다란 점이 박힌 퉁퉁한 남자였다.
“혹시 북해로 가십니까?”
“그건 왜?”
“아아. 별건 아니고. 만약 그렇다면 말에게도 옷을 입혀줘야 합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다른 곳에서 사는 것보다 살짝 비쌌지만 아끼지 않고 구매한 결과 상인은 환하게 웃으며 묻는 것에 잘 대답했다.
“이 정도면 북해의 마을까지는 갈 수 있겠나?”
“아아. 물론입니다. 아주 따듯하게 가실 수 있죠.”
상인의 호언장담에 진백천은 뿌듯하게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에게서 북해 마을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까지 받았다.
“북해라니. 괜히 떨리는데?”
북해빙궁까지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곳까지 가는 길이 아무리 춥다고 하지만 진백천과 일행들은 전부 숙련된 무인들이었다.
겨우 추위 따위에 고생을…….
“허어어억! 추, 춥다!”
“마, 말이 선 채로 죽었습니다! 얼어 죽었어요! 그 상인놈 물건을 팔아먹으려고 거짓말을 한 게 분명합니다!”
“제, 젠장! 왜 눈이 멈추지 않는 거냐! 하늘의 쓰레기!”
……죽을 만큼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