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회귀백서-282화 (282/346)

무림회귀백서 282화

95장 심상세계(3)

-혈뢰음사의 무공을 이루는 근간이 뭔지 알고 있나?

-미친 부처의 무공.

-피와 살기에 젖은 부처.

-죽음이야말로 완벽한 탈인(脫人)과 번뇌(煩惱)로부터의 자유이니라!

“죽음만이 유일한 깨달음의 길이라고 본 거요?”

-맞아. 그런데 자네를 보아하니 그것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오해라고 할 게 있어요?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라는데 어느 미친놈이 거기에 따릅니까?”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 하지만 이 동자승이 말하는 죽음은 그런 의미가 아닐세.

죽음은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다.

원래의 혈뢰음사의 무공은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죽여 자신을 완벽한 탈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무공을 원했지만, 그것에 다다르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간 것뿐이었다.

-애초에 무공의 근간과 다르게 말이지.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신묘한 뜻은 바뀐 것이 없으니 백발의 노인은 진백천이 그 무공을 익히기를 바랐다.

어차피 그 안에 담긴 죽어간 승려들의 사기는 태허무극진결의 파사의 기운이 전부 막아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도 함께였다.

“쯧. 그렇다면 뭐. 한번 배워볼까요?”

동자승은 신난다는 듯이 방방 뛰며 팔다리를 휘둘렀다.

진백천의 수련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심상의 세계에서는 배고픔도 어떠한 피곤함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독꽈리 나무에게 10번째 열매를 받아먹을 때쯤에는 백발의 노인도 더는 그의 동작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늘도 열매 고맙다.”

독꽈리 나무는 이제 제법 자라서 어엿한 대형 나무가 되었다.

처음 봤을 때의 시들시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푸릇푸릇했다.

달라진 것은 독꽈리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혈뢰음사의 무공을 수련하자 동자승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점점 크더니 환상 속에 보던 성인의 모습까지 성장한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시끄러워.”

물론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왜 어르신만 그대로예요?”

-나도 많이 변했지. 다만 그 변화가 나 대신 자네의 검에 깃들었을 뿐일세.

진백천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평범한 독고구검의 모습이었지만 처음 만들어낼 때와 다르게 예기가 무척이나 날카롭게 흘렀다.

“내력도 제법 쌓였고, 지금이라면 저 검은 용을 잡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절대 무리지만 언젠간 가능하겠지. 저 나무의 열매를 이천 번쯤 먹고 나면 말이야.

한마디로 죽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눠서인지 검은 용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

무작정 달려들기만 하고 백발의 노인을 공격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진백천에게 점차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왜 저 노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지? 나와 함께라면 지금까지 헛수고한 시간보다 더 빠르게 이곳을 나갈 수 있다.

‘나갈 수 있다고?’

무척이나 혹하는 말이었다.

“우선 들어볼 테니까 말해봐.”

-간단하다. 저것들을 전부 집어삼키면 된다. 지금 저 노인은 당장 잡아먹지 못해도 동자승과 나무를 집어삼키면 나는 더더욱 커진다. 그 후에 저 노인마저 집어삼키면 된다!

“뭐? 그렇게 간단한 문젠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지?”

-그거야 저것들이 저 정도로 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만큼 커졌으니 이제 충분히 집어삼킬 만한 가치가 생겨났다!

검은 용은 욕심에 찌든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입가에서는 침처럼 맺힌 마기가 뚝뚝 떨어졌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굳이 너를 선택할 이유가 없잖아?”

-아니다. 다른 기운을 집어삼켜서 몸을 키우는 것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가능하다. 위대한 천마신공의 마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진백천이 사실이냐는 듯이 백발의 노인을 쳐다보자 그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천마신공의 구결을 따라 나를 받아들여라! 그래서 저들을 집어삼키고 당장 밖으로 나가자!

검은 용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놈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진백천은 어딘가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을 벗어나고픈 것은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천마신공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마화린처럼 집어삼켜지거나 결국 천마의 부활에 이용당할 뿐이야.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면 죽으나 사나 태허무극진결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

그런 속내와 다르게 진백천은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검은 용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자 검은 용이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허 참. 내 몸속에서 기생하면서 이렇게까지 몸을 키웠다는 거지?”

-기생이 아니다! 천마신공은 모든 만마의 주종. 그 어떤 마기라도 먹이로 삼아 더욱 강해진다!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그게 내 몸이냐고.”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은 용이 반응할 새도 없이 턱밑 깊숙이 쑤셔 넣었다.

푸욱-

검은 연기와 같은 피가 터져 나오며 검은 용이 광적인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괜한 짓을 하는군!

“하하하. 어차피 뒷일은 어르신이 봐줄 거 아닙니까? 그동안 쉬었으니 움직이시죠?”

백발의 노인은 짜증 섞인 목소리와 달리 피식 웃으며 진백천을 뒤로 잡아당겼다.

동시에 발광하는 검은 용을 뒤로 밀쳐내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크아아아악! 결국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나뿐이다아아!

“쯧. 기생충 같은 놈이 징징대기는!”

진백천의 이죽거림에 다시 한번 마기를 쏟아냈지만, 백발의 노인의 검에 막히며 사그라들었다.

-뒤로 물러서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섰다.

그리고 손을 뻗자 검은 용의 턱을 파고들었던 독고구검이 다시금 그의 손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분한 검은 용은 전력을 다해 백발의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공격에 실패하며 튕겨났지만 그 마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드드드득-

심상세계가 거칠게 흔들리며 찢기듯 여기저기에 흠집이 생겨났다.

단순히 검은 공간만 봐오던 진백천에게는 새로운 광경이었다.

그것은 검은 용과 백발의 노인이 서로 부딪치는 충격이 더 커질수록 더해갔다.

‘으음?’

그리고 가장 깊게 찢긴 공간 너머로 얼핏 붉은 뭔가가 보였다.

촤아아악-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것은 분명히 진백천도 본 적 있는 것이었다.

‘금혈화린어?’

찢어진 공간이 순식간에 아물며 금혈화린어의 모습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백천이 본 것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설마 그 습성 탓에 이곳에서도 바닥 깊숙이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인 건가?’

소림사의 금지에서 봤던 녀석과 비슷하지만 심상세계라 그런지 몇 배는 더욱 커다란 놈이었다.

족히 검은 용의 목을 물어뜯을 만큼.

상단전으로 밀어 넣을 때 대환단의 기운까지도 온전히 흡수했을 테니 결코 평범한 기운은 아니었다.

진백천은 곧 좋은 생각을 떠올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더 빨리 벗어날 수도 있겠는데?’

* * *

“중혁아, 이제 슬슬 내가 들을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길림으로 향할수록 땅이 질어지고 얕은 강과 늪지대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발이 푹푹 빠지고 산발한 머리 같은 가시덩굴이 몸을 붙잡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런 땅에서는 쉬기도 어려웠고 몸을 물어뜯는 벌레들 때문이라도 서둘러 늪지대를 벗어나야 했다.

오죽하면 용풍에 휩쓸리던 바다 위 배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배라도 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의 목적지인 길림의 교하(蛟河)까지는 강물이 깊지 못했다.

겨우 몸이 잠기는 수준이었기에 배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나마 벌레나 쫓으며 빠르게 걸어가는 게 전부였다.

“마른 땅이다. 저기서 잠시 쉬고 가자.”

“네.”

중혁은 곧바로 진 지게를 내려놓았다.

벌레들에 물려 퉁퉁 불은 도홍경이나 중혁과 달리 진백천은 가부좌를 튼 모습 그대로였다.

아마도 그의 피에 흐르고 있는 독을 벌레들도 알고 피하는 듯했다.

“하아. 배라도 채우자.”

도홍경은 작은 모닥불을 지피고 거기에 각종 약초를 집어넣었다.

진한 연무가 피어나며 그들을 괴롭히던 벌레가 그제서야 조금씩 사라졌다.

“지긋지긋한 놈들. 이런 게 겨울에도 들끓다니. 여름에는 대체 어떻다는 거지?”

“……길림에 다시는 안 올 겁니다.”

“그래. 이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말자.”

그들은 몸서리를 치며 모닥불에 냄비를 올리고 죽을 끓였다.

현재 제대로 씹을 수 없는 진백천을 생각하면 죽이 최선이었다.

중혁은 묽은 죽을 진백천의 입가에 밀어 넣었다.

“……회주님은 괜찮으시겠죠?”

“당연하지. 깨어나시기만 하면 바로 털고 일어나실 거야.”

만약 그의 몸 상태를 살폈더라면 텅텅 비었던 몸에 내력이 순환하는 것을 확인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늪지대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더구나 밤이면 들끓는 벌레들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 자니 계속해서 늪지대를 걸어나가는 게 전부였다.

잠은 잠깐 선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후우. 이제 다시 출발하자.”

도홍경은 벌레를 쫓는 약초에 불을 지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나마 연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벌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중혁은 도홍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형님은 회주님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무심결에 한 질문이었다.

도홍경은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향했다.

“나? 아주 우연히 마주쳤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보다는 운명 같기도 하고.”

도홍경은 처음 진백천과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실과는 조금 다른 각색된 내용이었다.

자신이 공주를 몰래 쫓던 사실은 쏙 빼고 진백천과 우연히 만나 의기투합을 한 전형적인 영웅 서사였다.

“형님이 황궁의 보고인 황음각(凰陰閣)에 들어간 건 알고 있지? 거기서 세 가지 보물을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가 모산파의 신물이었어.”

약속은 했지만 사실 진백천이 그것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온갖 보물이 전부 모여 있는 그곳에서 한 번의 기회를 자신 때문에 소비할 거라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진백천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향로를 가지고 나와 그에게 건넸다.

그렇기에 남을 절대 믿지 않는 도홍경조차도 진백천과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재밌었지. 나쁜 놈들도 때려잡고.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맛보고 말이야. 하하.”

산적과 같은 얼굴처럼 도홍경을 대하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강호에 대해 배우고 의협(義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전부 진백천과 정도회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모산파 장문인이나 돼서까지 이렇게 형님을 돕는 것 아니겠냐? 적어도 그 배움 값은 꼭 갚고 싶었거든.”

그러던 차에 이렇게 은혜를 갚을 기회가 생겼으니 나중에 진백천이 깨어나면 몇 년은 우려먹을 거라며 웃어댔다.

“그러면 중혁이 너는? 왜 형님을 따라다니는 거냐?”

중혁은 평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할 것도 없고 굳이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좋은 내용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럴 때가 아니면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도홍경은 은근슬쩍 물었다.

중혁은 잠시 머릿속으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

철퍽- 거리는 발소리만이 잠시 들려오다 다시금 중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요.”

“뭐?”

“부끄럽지만 그동안 단지 숨만 쉬었을 뿐이지 스스로 살아간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회주님이 알려주시겠다고 해서요.”

“허 참. 살아가는 방법이라니. 나 같은 오늘만 사는 도사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소리네.”

중혁은 잠시 자신이 괜한 소리를 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곧 도홍경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피식 웃으며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확실한 건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거겠지. 너도 굳이 형님한테만 묻지 말고 나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봐. 나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봐서 쓸데없는 건 많이 알거든.”

“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야. 나도 나름 너를 좋게 보고 있으니까.”

제법 남부끄러운 말을 내뱉은 도홍경은 웬일인지 갑자기 제 자리에 멈춰섰다.

빠르게 치켜든 손은 긴장으로 잘게 떨렸다.

그리고 뚫어져라 어둠 속을 주시했다.

“왜 그러세요?”

“……!”

중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둠 속에서 뭔가 반짝였다.

그 순간 도홍경은 중혁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넘어진 중혁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도홍경의 몸에 3개의 화살이 꽂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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