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80화
95장 심상세계(1)
십만대산(十萬大山).
짧은 강호를 주유하고 돌아온 마뇌를 맞이한 것은 정마대전의 시작과 패잔병들만 우글거리는 마교였다.
초전박살이 난 오마군종대(八魔群種袋)와 화산신검에게 베인 구악정(九惡井).
자신이 직접 명령을 내리던 환야루(幻夜樓)는 무슨 일인지 악살신괴란 놈에게 찢기며 활동이 멈췄다.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누더기가 된 것들은 끼워 맞추고 얽혀서 새로운 이름으로 내보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이것 또한 마뇌 혼자서 행하기에는 무척이나 바쁜 일이었다.
정도회와의 연전연패로 낯이 부끄러웠지만 그나마 황군과의 전투에서는 꽤나 혁혁한 성과를 얻어냈다.
“진백천 회주 그자가 황군을 이끄는 장군처럼 조금만 더 모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뇌는 폐관에 들어갔다는 진백천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황군은 대응 없이 뒤로 밀려나며 청해 바로 옆에 있는 감숙(甘肅)까지 내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뇌는 반란군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천은 사갈 같은 당문부터 아미와 청성까지 있으니 괜히 발을 들이밀었다가는 소모전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감숙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 또한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많은 마교의 무인들이 이 결정에 의문을 자아내겠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문제였다.
지금은 청해와 서장 같은 넓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황군을 상대했다.
하지만 그들이 감숙을 차지하는 순간 그 이점을 제 손으로 떨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강호가 조금더 흔들려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손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야.”
이미 강호에는 조금만 이득을 취하게 해준다면 스스로 옆의 선 자의 목을 쳐 갖다 바칠 이들이 한가득이었다.
앞으로는 의(義)와 협(俠)을 부르짖지만 그것 또한 결국 자신의 이득 앞에서나였다.
“몇 차례 불씨를 튕겨주면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알아서 타오를 거야.”
마뇌는 살아오는 동안 그런 광경을 수없이 봐왔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면 곧 폐관에 들어갔던 교주도 곧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되면 그를 주축으로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하면 되었다.
“지금은 그저 흔들어주는 것만으로 족해.”
지금 이 순간에도 황금마전에서 뿌린 마검을 쥐고 미쳐서 날뛰는 이들이 계속해서 보고되었다.
수북히 쌓인 서신들을 정리하려던 그때.
마뇌의 방안에 줄줄이 켜진 촛불 중 하나가 갑자기 맹렬히 타올랐다.
화르르르륵-
그러더니 이내 뭔가에 베인 듯 툭 하고 불꽃이 꺼져 버렸다.
초는 다 타려면 아직 한참이나 더 남은 상태였다.
마뇌는 재빨리 초 밑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사천영(四天影).
“요녕으로 간 천살대 마인이 죽었다? 왜지?”
그곳에는 모용세가 외에는 별다른 문파조차 없었다.
사천영이 강호에 나간 천살대 마인 중 가장 약하다고는 하나 녹림의 문주인 임백서가 나타난다 해도 싸울 수 있는 자였다.
“수라혈마공과 완성에 가까운 구촉비전을 깰 수 있는 자는 당금 강호에 몇 없다! 도대체 누구지?”
마뇌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천영이 죽을 만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작전 진행 중이라 서신이 왔었다.
“누군가 나타나 그를 암살했다?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아!”
마뇌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이내 그녀는 초 밑에 있던 서랍을 열어 그곳에 담겨있던 사천영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아야겠어. 방금 죽었다면 분명 아직 영혼은 구천에 떠도는 중이겠지.”
마교의 사특한 술법 중에는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 캐묻는 것 또한 존재했다.
그 대가로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했지만 그 정도야 마뇌에게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명혼대법(命魂對法).
마뇌는 머리카락에 자신의 내력을 불어넣으며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스스로 불타오르며 점점 주변이 어두워졌다.
마침내 주변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을 때 그곳에서 흉측한 얼굴이 드러났다.
진백천에게 죽은 사천영이었다.
“사천영. 누구한테 죽임을 당한 것이냐?”
마뇌가 재빨리 영혼을 제압하며 물었지만 사천영은 백탁 어린 눈으로 입을 뻥긋거렸다.
벌려진 입안에는 이미 혀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목구멍에서 떠듬거리며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마…… 신공의…… 마기…… 그리고…….
“그리고?”
-……노인……!
“노인?”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마뇌가 되물었지만 사천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뒤편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보습을 드러냈다.
“…….”
순간 마뇌 또한 숨을 멈출 만큼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검은 용(龍).’
아마 실제 용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닮은 이무기면 몰라도.
마뇌의 예상대로 그것은 단지 검은 마기가 뭉쳐 만든 형상이었다.
검은 연기처럼 뭉글거리며 그대로 사천영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끄아아…… 아아악!
고통 섞인 사천영의 비명이 마뇌의 뇌리를 울렸다.
명혼대법이 끊어지면서 주변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마뇌는 결코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것으로 사천영이 죽은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얼핏 보이는 것은 저 멀리서 비춰오는 별빛이었다.
“저게 대체 뭐지?”
어스름한 별빛은 곧 시야를 덮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 사이로 보인 것은 검을 휘두르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검이 검은 용의 목에 틀어박히자 명혼대법이 깨지며 다시 촛불이 살아났다.
“허억!”
마뇌는 강제로 깨진 대법의 반발력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방금 본 것으로 가득했다.
“분명히 봤다. 검을 휘두르던 노인. 검은 용.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인것은.
다름 아닌 진백천.
마뇌가 조금 전에 본 것은 그의 심상세계 안이었다.
* * *
진백천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지금에서야 반성 중이었다.
‘……그 막대한 기운을 상단전에 밀어 넣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지.’
상단전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공간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백치가 되거나 뇌가 곤죽이 되어 즉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상단전을 건들지 않는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쯧.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고.’
천마신공의 마기와 태허무극진결의 내력은 상단전이 아니면 밀어 넣을 공간이 없었다.
죽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무작정 행한 행동이었지만 그러한 대가로 이런 상황에 놓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 봤자 저번처럼 투시력이나 생긴다든지 며칠 내력이 텅텅 빌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쯧.’
진백천은 검은 공간에 멍하니 앉아서 눈앞의 광경을 지켜봤다.
집채만 한 검은 용과 백발의 노인.
그리고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동자승과 멀찍이 생뚱맞게 심어진 독꽈리 나무가 그 전부였다.
처음 이것들을 봤을 때 그저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꿈이 도저히 깨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어딘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저 검은 용이 천마신공의 마기, 백발의 노인은 태허무극진결의 내력. 그리고 옆의 동자승은 혈강옥불상과 종마검. 마지막으로 저 독꽈리 나무는 독정이겠지?’
전부 이번 상단전에 밀어 넣은 기운들이었다.
쉬지 않고 싸워대는 검은 용과 백발의 노인과 달리 진백천에게는 조금의 내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가지고 있는 몸뚱이가 전부였다.
“이래 가지곤 그냥 갇힌 수준인데? 안 그러냐?”
진백천의 물음에 동자승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동자승이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음이야말로 완벽한 탈인(脫人)과 번뇌(煩惱)로부터의 자유이니라.
“그거야 네놈들 생각이고. 난 죽을 생각 없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 거야.”
-죽음이야말로 완벽한…….
진백천은 동자승의 이마빡을 툭 치며 밀었다.
놈은 뒤로 데구르르 구른 뒤 다시 졸졸 달려와 그의 옆에 앉았다.
“쯧. 말도 그것밖에 못 하는 게.”
혹시나 해서 독꽈리 나무에 다가가봤지만 독파리들이 위협하듯 위잉- 대며 날아올랐다.
내력 하나 없이 텅텅 빈 상태로 독파리에게 물렸다간 어찌 될지 모르니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미치겠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라고.”
그렇다고 검은 용과 백발 노인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으니 그저 앉아서 그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죽이지도 못할 거면 그만 좀 하죠?”
기다리다 못해 지친 진백천은 검은 용과 백발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짜증 섞인 목소리에 계속해서 싸우기만 하던 이들이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전부 네놈 탓이다!
검은 용이 거칠게 화를 내며 진백천을 질책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백발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사악한 것을 키웠으니 이 사달이 날 수밖에! 나는 그저 지키기 위해 싸울 뿐일세!
“아니. 대충 전부 정체는 알겠으니까 자세히 설명 좀 하시죠? 여기는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갇혀서 이어고 있는지. 이런 도움되는 설명 말이에요.”
재차 싸움에 돌입하려던 검은 용과 백발의 노인은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진백천을 보더니 서서히 떨어졌다.
그리고 번갈아가듯 진백천의 말에 대답했다.
-이곳은 너의 심상세계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무의식적 공간이지. 멍청하게 모든 기운을 상단전에 밀어 넣는 바람에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일세. 이 상태가 유지가 된다면 과부화된 뇌는 곧 파괴되고 백치가 되어버리겠지.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하네.
백치라는 말에 진백천이 화들짝 놀랐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백발의 노인이 지적하니 다급해졌다.
“선택? 무슨 선택을 말하는 겁니까?”
-그동안은 내가 다른 기운을 충분히 통제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방금 마기의 흡수로 인해 통제력을 잃었네. 말 그대로 어떤 기운에 힘을 몰아줄지를 선택하는 걸세.
백발의 노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진백천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선택하면 끝이라고? 만약 당신을 선택하면요?”
-나를 선택한다면 이 검은 용과 또다시 흡수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나가겠지.
문제는 두 기운이 대등하다는 것이었다.
두 기운 중 어떤 것을 선택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독꽈리 나무나 동자승을 선택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이 둘을 선택하면 다른 기운들에 의해 집어 삼켜지며 광인이 되어 버렸다.
“……허 참.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요? 죽을 때까지?”
허망해하는 진백천을 향해 동자승이 다시금 다가왔다.
-죽음이야말로 완벽한 탈인(脫人)…….
“헛소리하지 말랬지?”
곧 동자승은 시무룩하게 제자리에 앉았다.
진백천은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복잡해진 것은 바깥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