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78화
94장 천살대 마인(2)
“벌레 새끼가 왜 이리 앵앵거릴까.”
광대 가면은 쓰러진 오지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비영대의 마인들에게 걸어갔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었다.
“네놈들이 대답해 보거라. 무엇 때문에 기습을 허용하고 이 사달이 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느냐?”
“……죄송합니…….”
퍼억!
죄송하다 대답하려던 자의 머리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바로 그 옆에 있던 마인이 놀라고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머리가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머리 없이 무릎 꿇은 시체가 목에서 피를 쏟아냈다.
“죄송하다 말만 하지 말고 무릎을 꿇지 마라. 네놈들은 본교의 마인으로써 책임을 지면 될 뿐이다.”
그 책임이라는 것이 바로 죽음으로 죄값을 받는 것뿐.
방금까지 진백천과 다투던 마인들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머리가 사라지며 시체로 변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진백천이 이들을 죽인 것만큼이나 머리 없는 사체가 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백천이나 녹림의 형제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과연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이들과 다르게 진백천은 또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그 강함은 논외로 치고 적들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조차 않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것은 곳 뒤에 선 몇 명의 마인들을 제외하더라도 혼자서 이 모든 이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쯧. 벌레 놈들은 아무리 갱생하려 해도 쓸모가 없군. 이런 배덕자들은 천년마교에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마침내 남은 한 명까지 전부 처치한 그는 비로소 진백천과 녹림도들을 응시했다.
채주는 그 눈빛을 묵묵히 받아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기세를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지혈했던 상처가 터지며 등 뒤가 피로 젖었다.
“채주님!”
“가만 있어라!”
채주가 엉망인 몸으로 앞으로 나서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악살신괴. 아까는 10수 정도 버틸 수 있다 했지만…… 아쉽게도 5수로 줄여야겠군.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진백천이 그자를 관찰하고 약점을 찾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단 한 순간의 방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최상이었다.
“전에는 배신자 놈 때문에 제대로 붙지 못했었지.”
“그 덕분에 그나마 온전했다고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지?”
채주는 지하감옥을 빠져나올 때 가장 먼저 챙긴 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위압적인 자세와 다르게 뒤에서 지켜보는 녹림도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미 등 뒤는 패자처럼 전부 피에 젖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질 것을 아는데도 앞으로 나선다라. 이게 고리타분한 정파에서 말하는 옳은 죽음이라는 건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냐?”
일순간 광대 가면 사이로 뱀 같은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중에 진백천과 중혁에게서 잠깐 멈춘 듯했지만 이내 채주를 향했다.
“뭐. 상관없다. 네놈들은 이미 다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니.”
“어림없다!”
채주는 광대 가면이 움직이자 그대로 도를 아래로 내리그었다.
거산압도(巨山壓刀).
도가 그대로 광대 가면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단순히 빠르게 내리치기만 하는 것이 아닌 듯 채주 주변의 땅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채주의 공격이 통했다!”
“놈이 피하지 못했어! 입만 산 놈이었군!”
뒤에서 지켜보던 녹림도들이 거칠게 환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채주가 내리그은 도가 그대로 광대 가면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광대 가면을 부수고 그대로 머리마저 잘라낼 것 같은 도는 그 자리에 멈춰 바들바들 떨렸다.
까드드득-
오히려 걸어오는 광대 가면에 의해 채주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애초에 피할 가치도 없다 이거였나?’
이건 채주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상대의 내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탓도 있었다.
광대 가면의 몸 주변으로 검붉은 기운이 기지개를 하듯 피어올랐다.
“끄으윽!”
그리고 그 기운은 도를 밀어내며 서서히 어떤 형상을 만들어냈다.
“……수라……!”
수라는 마치 허공에서 채주를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결국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채주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허무할 정도로 일방적인 대결이었지만 진백천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수라혈마공(修羅血魔功)을 익혔다 이거지?’
몸에서 아수라가 일어나는 듯한 형상을 가진 마교의 무공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 효과는 의외로 구촉비전과 비슷했다.
전신의 혈맥을 깨우고 도검이 몸을 침범하지 못하게 단단해졌다.
또한 마공답게 아수라의 마기는 주변의 모든 이들의 내력을 진탕시켰다.
‘방금 채주의 일격도 마기에 진탕이 되며 스스로 무너진 것에 불과해.’
이러한 수라혈마공은 놀랍게도 천마를 따라잡으려던 혈마의 독문무공이었다.
하지만 아류는 진짜를 따라잡을 수 없는 법이었다.
천마신공이 모든 만마의 종주라면 수라혈마공은 단지 비슷하게 파생된 것으로 천마를 결코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 유난히 정도의 무공에 강하며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지.’
아마도 이것을 만든 혈마조차도 이러한 현상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원래대로라면 파기되어야 할 혈마의 무공은 몇몇에게서만 비밀리에 내려왔다.
‘그게 이놈이고 말이지.’
환상 속의 광대 가면이 마교 교주 마천영이라면 이놈이 수라혈마공을 익힌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천살대의 마인들은 실험하듯 각기 다른 무공을 익혔다.
회귀 전에 봤을 때는 심지어 소림의 무공을 익힌 놈도 본적이 있었다.
‘저놈이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 저런 상성이면 일반적인 무인들은 벌레처럼 보일 만도 하겠지.’
구척비전에 수라혈마공이라면 웬만한 정도의 무인들은 그를 상대하기 힘들었다.
가히 천적이라 불려도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진백천은 아니었다.
놈이 수라혈마공을 익혔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오히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정도의 무공에 강한 만큼 수라혈마공은 천마신공에 최약이니까.’
혈마는 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제대로 반항조차 못 하고 갈가리 찢겨 죽었다.
그간 혈마가 벌인 행적을 안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결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라혈마공의 마기는 천마신공에 복종하듯 그를 따랐다.
아무리 어떤 공격을 하더라도 천마에게는 조금의 해를 끼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천살대 마인에게 수라혈마공을 익히게 했을지도 모르지.’
생각을 정리한 진백천은 종마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짐짓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마인들을 베던 게 네놈이지?”
광대 가면의 물음에도 진백천은 그저 채주를 부축하며 뒤편으로 보냈다.
“맞아. 그래 봤자 네놈만큼이나 베었나 싶지만 뭐.”
“크큭. 건방진 놈이군.”
“내가 건방지면 네놈은 시건방진 거냐? 그딴 유치한 가면부터 벗고나서 말하지?”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면에 뚫린 두 개의 구멍 사이로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재밌어라기 보다 살심이 돋은 눈동자였다.
“네놈 같은 부류의 인간을 잘 안다. 막상 싸우기 전에는 그렇게 허장성세가 가득하지. 하지만 막상 벽을 마주치면 아이처럼 울부짖더군. 살려달라고 말이야. 네놈은 어떨까?”
“응. 자기소개 그만하고.”
“크큭.”
참으로 가성비가 좋은 놈이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참지 못하고 농도 짙은 살의를 내뱉었다.
격장지계(激將之計)의 표본이 있다면 정확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대 가면의 신형이 흐려지며 진백천을 향해 쇄도했다.
얼마나 빠른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서 있던 자리가 터져 나갔다.
솟구치는 모래 사이로 진백천과 광대 가면이 맞부딪쳤다.
카아앙!
독고구검과 맨손이 맞부딪쳤지만 들린 것은 묵직한 금속음이었다.
놈은 진백천이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반응하자 제법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곧 더 빠르게 손을 뻗으며 어깨를 노렸다.
“팔을 뽑아주마.”
“사양하지.”
끄드드득-
이번에도 놈의 손아귀를 밀쳐내며 그 반동으로 뒤로 크게 물러났다.
동시에 놈을 향해 장을 뻗어냈다.
천지만독수(天支萬毒手).
가슴팍에 정확히 적중했지만 놈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다만 넘실거리는 독이 놈의 시야를 가리며 피어올랐다.
“독? 이걸 믿고 까불었다면……!”
“혀가 뭐 이렇게 길어?”
진백천은 놈이 가슴팍을 강하게 밀어 차며 수풀 쪽으로 뛰어올랐다.
놈에게 천지만독수의 독이 통하지 않을 것쯤은 이미 예상한 지 오래였다.
대신 광대 가면이 녹아들면서 놈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희멀건 하니 생각보다 더 어린 얼굴이었다.
“끄드득. 감히…… 네놈 따위가……!”
진백천은 놈이 화내는 모습을 확인하고 예상대로 흘러감을 느꼈다.
더욱 속도를 높이며 도홍경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도 숲으로 따라오지 못하게 해.
-형님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노력해 봐야지. 그런데 지지는 않을 거야.
진백천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대 가면은 토끼를 쫓는 매처럼 허공에 날아오르며 진백천을 노렸다.
갈고리처럼 휜 손가락이 진백천의 머리를 노렸다.
‘……빠르기는 더럽게 빠르네.”
유령신법을 최상으로 운용했음에도 한순간에 따라잡혔다.
진백천은 혀를 차며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놈도 작정을 했는지 뻗어오는 공격을 무시하며 손을 뻗었다.
검과 손아귀는 각각 목과 가슴을 후려치며 떨어져 나갔다.
“크윽!”
확실히 구촉비전을 끝까지 익힌 놈이라 독고구검은 목을 파고들지 못했다.
단지 실금 같은 상처 하나만을 남겼다.
대신 광대 가면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갑옷을 입었군!”
놈의 손아귀는 호연보의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광대 가면의 눈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붉어졌다.
그럴수록 점점 더 빨라지며 손속이 악독해졌다.
‘수라혈마공이 아니더라도…… 강해!’
진백천은 양손에 검을 든채 놈의 공격을 막았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호연보의로 보호되는 곳을 제외하고는 뜯기고 베이는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미꾸라지 같은 놈!”
손에서 뻗어 나오는 마기가 진백천을 지나 뒤편의 아름드리 나무를 박살 냈다.
나무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조금 더 깊숙이……!’
진백천은 하염없이 뒤로 밀려나며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기어코 길마저 없는 곳까지 들어가자 우거진 나무로 인해 주변이 어두워졌다.
“네놈이 원하던 무덤 장소가 이곳이더냐?”
얼굴에 반쯤 걸친 광대 가면 옆으로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살의에 가득한 붉은 눈동자와는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후우. 네놈은 과연 얼마나 버틸까?”
진백천은 드디어 참고 참아왔던 천마신공의 마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의 역용술이 풀리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주변에 넘실거리는 어둠을 집어삼키는 마기를 살피며 광대 가면의 얼굴에 의문이 드러났다.
무척이나 그분과 비슷한 기운.
아니, 오히려 더더욱 진하고 농익은 느낌이 드는 마기였다.
“……네놈은 대체 누구지?”
광대 가면의 물음에 진백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마기에 반쯤 가려진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흑요석처럼 빛이 흘렀다.
“나? 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