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77화
94장 천살대 마인(1)
진백천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채주의 근처에 있던 자들뿐이었다.
하나같이 갑자기 나타난 귀신 같은 목소리에 기겁했다.
“당신은 누구……?”
“정도회 소속 무사입니다.”
“정도회라고?”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도회는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온다고 해도 요녕에 있는 모용세가 정도였다.
“북해로 가던 길에 문제가 생긴 거 같아서 들렸으니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마시죠.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보이니까.”
그들은 곧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며 피어오르는 의심을 전부 지워 버렸다.
어차피 지금 믿을 곳이라곤 눈앞의 이자뿐이었다.
“혹시 이곳으로 온 정도회 무사가 몇인가?”
“이곳의 마인들을 전부 몰아내려면 적어도 무력대 1대는 필요할 거요.”
“아아. 마인들의 수는 대충 파악해놨습니다. 대략 50여 명 정도 맞죠? 전부 상대할 수준은 되니까 걱정들 마십시오.”
진백천의 당당한 대답에 그들의 표정에 안도의 기색이 흘렀다.
물어보니 사림채 외에 따로 더 있는 마인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놈들의 실력이 상당하네. 평범한 마인들 같지 않아.”
“우선은 상처부터 치료하시죠.”
진백천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응급처치뿐이었다.
내력이 금제되어 있는 자들을 풀어주고 금창약을 아끼지 않고 발라주었다.
덕분에 당소예가 수련동에 들어가기 전에 넉넉히 넣어두었던 것까지 전부 텅텅 비었다.
하지만 덕분에 급한 이들의 치료는 끝낼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채주뿐이었다.
“칼끝이 뼈에 박혀 있네. 잘못 뽑다가는 불구가 될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해.”
“그건 제가 조심해서 할 테니 걱정 말고 다들 운기조식부터 하시죠.”
진백천은 심드렁하게 채주를 반가부좌 상태로 앉혔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렀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조심하게나!”
“지금은 한시라도 더 빨리 치료하는 게 더 급선무입니다.”
진백천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비수를 뽑아냈다.
안에서 고름 섞인 피가 터져 나왔다.
역시나 보통의 단검은 아니었는지 상처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기습을 하는 놈이 평범한 비수를 휘두를 리 없겠지.’
더구나 녹림의 채주를 공격하는데 더더욱 더.
진백천은 손을 뻗어 독기에 물든 상처를 손으로 감쌌다.
다행이 대부분의 독기는 그의 독정으로 전부 해결이 되었다.
스으으윽-
독기가 빨려 나가며 상처와 피가 점점 제 색을 찾았다.
동시에 금제되어 있는 내력을 풀어헤치며 부드럽게 전신을 휘감았다.
막혀 있던 혈도가 뚫리며 입과 코에서 죽어 있던 피가 터져 나왔다.
“이봐! 조심하게!”
그들의 걱정과 달리 채주의 얼굴은 점점 제 색을 찾아갔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고르게 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끄으윽……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직까지는 몸이 불편한 듯 말할 때마다 허연 수염이 바르르 떨렷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녹림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채주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오지헌 그놈이 마교와 손을 잡고 배신을 했습니다!”
“……그렇군.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나.”
갑자기 쳐들어온 마인들을 상대하던 중.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뒤돌아보니 오지헌이 이죽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맸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치료한 자를 찾다가 진백천을 올려다봤다.
“자네로군.”
“맞습니다. 정도회 소속 무사입니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딱히 이름이랄 것도 없어 그저 악살신괴라 아시면 됩니다.”
악살신괴란 별호에 녹림도들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무리 산속에 처박혀 있는 그들이라고 해도 악인을 베는 검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알았다.
놀라운 것은 그런 이가 정도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었다.
“과연 정도회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군.”
“감사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하도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밖의 마인들은 여전하니 말입니다.”
진백천은 이미 대부분의 상황을 파악했지만 채주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일반 마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천살대의 무인에 대해 알기 위해서였다.
채주는 진백천이 유난히 강한 마인에 대해 묻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괴물 같은 자가 있었지. 사실 오지헌의 기습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놈에게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르네.”
무려 녹림18채 중 7채주의 말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맞붙기 전에 그렇게 느낄 정도면 천살대 마인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다시 맞붙는다면 얼마나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얼핏 듣기에는 기분 나쁠 만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채주는 그런 기색도 없이 진지하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과 같은 몸이라면…… 10수가 한계겠군.”
절망적인 대답이었지만 진백천은 충분히 만족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한 수도 못 버티고 죽을 거야. 10수라면 무척이나 길지.’
“내 대답이 나쁘지 않았나 보군. 그러면 나는 망가진 몸을 다스리는 데 집중하겠네.”
“그러시죠. 저는 잠깐 밖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진백천은 이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사라지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도홍경과 중혁은 여전히 사림채 밖에 대기 중이었다.
“별일 없었지?”
“네. 딱히 움직이는 자들도 없었어요. 대신 조금 특이한 말을 들었는데요.”
“무슨 말?”
“대주라는 자가 지금 자리를 비운 모양이에요. 확실하지는 않은데 근처의 무림세가를 찾아간다고 했으니 아마도…….”
“모용세가겠지.”
오지헌이라는 놈이 마인들과 이야기하며 흘러나왔다는 말이니 거짓을 아닐 터였다.
‘흐음. 마교에서는 역시나 모용세가와 손을 잡으려는 모양이군. 그들도 한발 걸치려는 걸 테고.’
그렇다면 지금은 진백천에게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모용세가까지는 이틀은 족히 걸렸다.
떠난 지 하루가 채 안 되었으니 놈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았다.
“마인들은 처리하려면 지금이 적기라 이건가?”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 둘은 할 일이 있어. 지하감옥에 있는 자들을 챙겨. 아직까지는 몸이 정상이 아닐 거야.”
진백천은 대놓고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기척 없이 조용히 놈들의 수를 줄여나갈 생각이었다.
‘빠르게 놈들을 상대하려면 나 혼자 나서는 게 맞아.’
* * *
마인들은 작전이 상당히 진척된 탓인지 고무된 상태였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제대로 대항한 자들은커녕 심심한 생활이 전부였다.
이제 조금 더 소란을 일으키고 빠지면 끝이었다.
“흐음. 그나저나 표협 표국인지 뭔지를 처리하러 간 이들이 늦는군.”
“가지고 가던 표물이 상당하다 했으니 그걸 가져오느라 그럴 테지.”
워낙 위험 따위 없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만약 그들의 새로운 대주가 있었다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잠시 둘러보고 와야겠어.”
“그래 봤자 쥐 새끼 하나 없는데 뭘 본다고.”
마인은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산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멀어지자 놈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궐련이었다.
얼마 전 상단을 털면서 그곳의 상단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자 짙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긋지긋하군. 언제 여기를 벗어날지.”
그가 있던 중원과 달리 이곳은 벌레도 많고 따분함 그 자체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정도회에 숨어들어 진백천의 목을 베라고 하면 군말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정도였다.
“후우우.”
그가 진한 연기를 다시 한번 내뱉을 때 문득 시야에 특이한 것이 하나 들어왔다.
붉게 물든 솔잎이었다.
“뭐지? 이런 나무도 있었나?”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붉은 솔잎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 무엇보다 익숙한 비린내의 액체는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투욱-
“……침입…… 커헉!”
뒤늦게 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폐를 파고드는 검이 먼저였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를 공격한 자는 품속의 신호탄에 대해서도 아는지 능숙하게 팔을 꺾으며 신호탄조차 집지 못하게 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비영대 마인은 그제서야 나무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마치 장식품처럼 가지에 마인들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였다.
‘……미친.’
하지만 그렇게 마인들이 걸린 나무는 한 그루뿐만이 아니었다.
줄 지어선 나무, 전부였다.
“후우. 23명째인가. 다행히 놈들이 전과 달리 나태해져서 다행이야.”
원래의 비영대를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처리하게 무척이나 편했다.
전부를 처리할 때까지 이런 방심이면 좋겠지만 시체가 30구가 넘어서자 놈들도 눈치를 챘다.
“침입자다! 움직여라!”
“지하감옥부터 확인해!”
그리고 때를 맞춰 쉬고 있던 녹림도들도 마인들을 밀고 올라왔다.
“놈들이 탈출했다!”
“녹림의 개들을 막아!”
수는 녹림이 월등히 많았지만 마인들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내력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거나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나마 채주를 비롯해 그를 따른 자들이 마인들과 맞부딪쳤다.
하지만 잠시 뒤 상황은 완전히 역전했다.
뒤편에서 진백천이 광인처럼 쌍검을 휘두르며 마인들을 썰어냈다.
“크헉! 이놈은 또 뭐냐!”
‘천살대 마인이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놈들을 도륙한다!’
진백천은 처음부터 자신의 내력을 감추지 않았다.
걸리는 족족 마인들 썰어냈고 사방은 곧 놈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주변은 그가 내뿜는 내력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인이 채 10명도 남지 않았을 때 진백천이 옆으로 물러났다.
“후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그의 시선은 산채 밖으로 향해 있었다.
놈은 이미 산채 가까이 다가오면서 소란을 느꼈는지 자신의 기척을 감추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였다.
스스슥-
천살대의 무인은 풀을 헤치며 등장했다.
그의 뒤로 십여 명의 마인들이 더 보였지만 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놈이 쓰고 있는 것은 종마검의 환상에서 본 것과 똑같은 광대 가면이었다.
“흐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다행히도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자와 달랐다.
잠시나마 긴장했던 진백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짐작하기로 환상 속의 광대 가면은 다름 아닌 마천영이었다.
‘……마교의 교주가 여기 와서 이러고 있을 리 없지.’
질문하는 그에게 쏜살같이 달려간 것은 마인이 아니었다.
채주를 배신했다는 박쥐상의 오지헌이었다.
“저놈들이 감옥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저 검을 든 자가 마인들을 기습했습니다.”
“기습?”
광대 가면의 말투가 다소 비틀어졌지만 오지헌은 그런 것 따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서 비영대의 날카로워지는 눈빛에도 하나하나 전부 떠들어댔다.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되는 동안 네놈들은 모르고 있었다?”
광대 가면이 그렇게 말하자 오지헌은 그제서야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감을 눈치챘다.
“대주님!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저놈들이 기습을 하고…….”
“쯧.”
퍼억!
광대 가면은 마치 파리라도 쳐내듯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가벼운 동작과 다르게 그 결과는 극단적이었다.
오지헌의 머리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이 자리에서 방금 그의 한 수를 확인한 이는 채 한 손에 꼽혔다.
‘과연 천살대 마인이다. 단순히 구촉비전만 익힌 게 아니야. 철저하게 무공을 수련한 흔적이 보인다.’
진백천은 점점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