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74화
93장 수상한 녹림채(2)
쿠웅-
기수식을 취한 진백천은 자신의 뒤에 있는 나무를 강하게 발로 찼다.
그러자 마른 가지가 거칠게 흔들리며 솔잎이 비처럼 흩날렸다.
진백천은 그것들을 전부 각각의 공격이라 생각하며 검을 뻗었다.
파류식(破流式).
1초인 파초식이 초식을 파훼하고 2초인 파강식이 상대를 부서뜨리는 것이라면.
3초인 파류식은 모든 공격을 바람처럼 이끌어야 했다.
독고구검이 어둠 속을 유영하듯 부드럽게 나아갔다.
사방에서 분분히 떨어지는 솔잎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휘이이이이이-
검신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검을 이끌며 솔잎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내력의 흡자결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강한 움직임이었다.
솔잎들은 마치 물결처럼 독고구검의 검로를 따랐다.
‘공격의 방향을 바꾸고 이끌었다면 이후에는 튕겨내고 반격할 차례.’
파류식의 내력이 순간 들끓는다 싶더니 솔잎들이 바르르 떨렸다.
바싹 마른 잎들은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튕겨낸다!’
단순히 막아내고 튕겨내는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각각의 솔잎은 자신이 떨어졌던 자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파아아앗-
아름드리 나무가 거칠게 떨리며 나뭇가지가 터져 나갔다.
주변에 있던 도홍경과 중혁이 입을 쩍 벌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지만 진백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실패야.’
그의 온몸에는 녹색의 가루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부서진 솔잎들을 사방으로 튕겨내지 못하며 몸에 닿은 것들이었다.
만약 이것이 솔잎이 아니라 비수나 무기였다면 이미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뭇가지도 멀쩡한 것들이 너무 많아.’
원래대로 모조리 튕겨냈다면 솔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는 전부 조각나거나 떨어져 나가야 했다.
이렇듯 폭발하듯 터진 것은 물론이고 멀쩡히 남아 있는 것들은 보면 제대로 통제되지 못했단 뜻이었다.
‘아직 멀었어.’
진백천은 들끓는 내부를 가라앉히며 검을 갈무리했다.
실패했지만 낙담하지는 않았다.
아직 숙련되지 않았을 뿐이지 방법은 이미 알았다.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곧 완숙한 경지에 다다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봐?”
“지금도 그렇게 강하신데 끊임없이 수련하시니 새삼 대단하다 싶어서요.”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수련해.”
“저야 뭐. 열심히 만들어야죠.”
도홍경이 한 손에 부적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밤이 깊어졌으니 잠자리를 정리하려던 진백천은 문득 귓가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아주 약하지만 분명 금속음이었다.
이런 산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기에는 낯선 소리였다.
“회주님.”
중혁도 들었는지 진백천을 쳐다봤다.
금속은 점점 더 다급하게 들려왔다.
“중혁은 따라오고 도홍경은 주변을 살펴봐.”
“네. 형님!”
빛 한 점 없는 숲속을 달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눈먼 나뭇가지에 베이며 눈을 다치거나, 함정에 걸릴지도 몰랐다.
진백천은 일부로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밟으며 뛰어갔다.
가히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지로 한번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이 앞으로 쭈욱 뻗어 나갔다.
뒤편에서 아직은 어색한 몸놀림으로 중혁이 이를 악다물고 쫓아왔다.
“천천히 와.”
금속음이 들리는 곳에 도달하자 보인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녹림의 산적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격 중이었다.
기습을 당한 자들은 오전에 진백천을 표사로 고용하려 했던 표협 표국이었다.
“이놈들!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우리를 공격하느냐! 통행비를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통행비 따위 필요 없다! 네놈들 피로 그것을 대신할 것이다!”
스스로를 표두라 소개했던 표청은 얼굴에 피칠을 한 채로 필사적이었다.
이대로라면 물건은 물론이고 자신들 전부가 죽게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산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저놈들 녹림은 맞는 건가?’
녹림은 한낱 흑도방파나 동네 건달 집단이 아니었다.
자신들만의 규칙이 있었고 그것을 어기면 가차 없이 목을 베어낼 정도로 규율이 강했다.
진백천은 복잡해지는 속내를 밀어두고 우선 장내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중혁. 상태가 위험한 사람들부터 뒤로 빼내.”
“네. 알겠습니다.”
그는 곧바로 머리로 보이는 자 앞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표청을 상대하던 산적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알면 뭔가 달라져?”
“뭐라?”
진백천은 더 대화를 필요도 없이 곧바로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도를 휘두르려던 놈이 허공을 가르며 몸을 휘청했다.
진백천은 어느새 놈의 손목을 뒤틀며 마혈을 짚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녹림의 산적들은 당황했다.
“채주가 붙잡혔다!”
“이놈 당장 채주를 풀어라! 안 그러면 이 자들을 전부…… 커헉!”
진백천을 협박하려던 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중혁이 더 들어볼 것도 없이 주둥이를 으깨 버렸기 때문이었다.
“더 해보려면 해보든가?”
“……젠장. 우선 다들 물러나라!”
산적들은 자신의 채주가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마혈이 짚인 채주가 눈을 부릅떴지만 산적들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진백천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을 도홍경에게 놈들의 뒤를 따라가 보라고 지시했다.
-안쪽까지는 말고 산채가 어디인지만 알아내.
-네. 형님.
산적이 물러나자 표협 표국의 사람들은 크게 안도했다.
특히나 표청은 진백천에게 절할 것처럼 감사를 표했다.
“대협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전부 죽었을 겁니다.”
“사해의 동도끼리 돕는 것은 당연하지.”
짧은 사이에 표협 표국의 표사들은 상당히 많이 다치거나 죽었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기습이기도 했고 숫자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경망한 와중에도 쟁자수들을 지키려했던 것도 한몫했다.
진백천과 중혁은 이들을 도와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표물은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게 다행이라고 표현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녹림의 산적들은 말 그대로 사람들을 노렸지 표물을 약탈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산적을 가장한 암살자들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들은 산적이 맞았다.
놈들의 뒤를 쫓았던 도홍경이 정확히 산채를 알아내고 돌아왔으니 분명했다.
-사림채(蛇林埰)로 분명히 녹림의 소굴이었습니다.
‘녹림이 왜 이런 짓을?’
진백천은 상황이 정리되자 곧바로 표청에게 일의 전말을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대협.”
표청은 얼굴의 피를 닦아내며 한숨처럼 말을 뱉어냈다.
“처음에는 채주라는 저자가 단순히 표물을 전부 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통행비를 요구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갑작스럽게 뒤편에서 기습을 해왔습니다.”
산적들은 애초에 작정한 듯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위기를 벗어나자 슬슬 분노가 치솟는지 마혈이 짚인 채주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만약 대협과 그 일행분들이 아니라면 저희는 전부 이곳에서 죽었을 겁니다.”
진백천이 본 대로가 맞는 모양이었다.
표청은 채주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며 진백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협. 염치불구하지만 이 산맥을 지날 때까지만 저희와 함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걱정 말지. 적어도 이놈들에게 더 기습을 받지는 않게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대협의 성함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흐음. 악살신괴(惡殺神魁).”
이제는 제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편했다.
* * *
산동의 객잔.
악살신괴 연룡은 최근 들어 강호에 떠도는 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
비밀리에 움직이는 자신에 대한 소문은 언제나 있었지만, 요즘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적도 처음이었다.
처음 시작은 안휘성에서부터였다.
“단순히 어중간한 놈이 나를 흉내 낸다고 생각했지.”
자신인 척하며 옥무기를 만나 남궁천에 대한 자료를 받아갔다.
외모를 토대로 추적한 결과 놈이 무명악인 권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황노가 직접 파악한 것이기에 틀릴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놈만 베어내고 연가문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최근 돌아가는 강호의 상황이 안 좋은지 가문에서 복귀 재촉이 이어졌으니까.
“그런데 이놈. 보통 놈이 아니란 말이지?”
“맞습니다. 강소성에서는 동월루의 인육귀(人肉鬼)를 베어 죽였고, 산동성에는 남녀쌍귀(男女雙鬼), 그리고 천하의 요화귀(妖火鬼)마저 잡아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평범한 자는 아닐 겁니다.”
평소 장난기 넘치는 황노마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악인놈들은 전부 진짜 악살신괴인 자신이 나선다고 해도 함부로 상대할 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특히나 마지막의 요화귀는 술법사로서 단순히 무공이 뛰어나다고 죽일 수 없었다.
“분명 무공뿐만 아니라 이런 쪽에도 능하다는 거겠지.”
여기까지라면 그저 강한 놈이 설치는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가는 곳마다 자신을 악살신괴라고 말하며 정도회의 사람이라고 소개해댔다.
연룡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도회 사람이자 진백천의 수하가 되어 버렸다.
“……그것도 가짜 진백천을 잡아낸 충실한 수하 말이지.”
어딘가 복잡한 심경의 연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 무명악인의 멱살을 틀어잡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놈은 마치 미꾸라지, 아니, 미꾸라지의 할아버지 격으로 이리저리 잘 도망 다녔다.
쉬지 않고 도망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쫓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황노. 놈들은 어디 있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배를 올라탔습니다.”
“……젠장.”
악살신괴가 가볍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냥 이대로 놔줄까? 어차피 악살신괴 놀이도 이제 끝이니까.”
“끌끌.”
황노는 별말 없이 혀를 차며 웃기만 했다.
그 또한 무명악인 권진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탓이었다.
요화귀를 붙잡을 정도의 뛰어난 술법.
남녀쌍귀와 인육귀를 베어낼 초절정의 무공.
아무렇지 않게 정도회와 악살신괴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대담함.
“이런 자는 강호에 몇 되지 않습니다.”
악인만 노리는 것을 보면 분명 나쁜 자도 아닐 터.
그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연룡에게 경험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건 나도 잘 알지. 흐음. 하지만 왠지…… 위험하단 말이지.”
위험이란 단어를 말하는 연룡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얼핏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만큼이나 새하얀 손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조금도 고생해 보지 못했을 손이었지만 그자의 정체를 아는 자라면 얼마나 많은 피가 묻어 있음을 잘 알았다.
살왕(殺王).
놈은 언젠가부터 연룡과 황노의 뒤를 쫓았다.
아니, 놈뿐만 아니라 살왕은 지나가는 곳마다 살수집단을 수하로 끌어들이며 나아갔다.
처음에는 단신에 불과했던 그가 이제는 족히 수십 명의 살수를 끌고 다녔다.
“황노. 저자가 우리를 쫓아오는 건 아무래도 그자 때문이겠지?”
“그럴 겁니다.”
“아마도 이대로 사라지려 해도 저자에게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겠군.”
만약 연룡과 황노가 조금이라도 약했다가는 살왕은 가축처럼 이들을 이끌고 안내를 시켰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 보는 수밖에.”
연룡은 살왕을 쳐다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마침 살왕도 술잔을 들어 올리며 시선이 부딪쳤다.
“그자의 정체가 밝혀질 때 꽤나 많은 피가 흐를지도 모르겠어.”
술 맛이 무척이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