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73화
93장 수상한 녹림채(1)
진백천은 일행과 떠나기 전 황보세가에 다시 한번 들러 인사를 나눴다.
이미 성내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는지 분기를 터뜨렸다.
“성내에 있던 자가 가짜였다니.”
“그래도 지금이나마 잡아낸 게 다행이죠.”
정도회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황보풍과 황표라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은 뒤 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요녕까지는 배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편이 육지로 가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거리가 단축되었다.
항구에 도착하자 도홍경과 중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가 바다라고요?”
“정말 큽니다.”
“둘 다 바다는 처음이야?”
둘은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넓은 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설명은 전혀 맞지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바닷물은 강물과 다르게 소금기가 많아서 마시면 안 돼. 알지?”
“……그 정도는 저희도 압니다. 크흠.”
배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다니는 배가 많았고 요녕까지는 거리도 가까웠다.
진백천은 배 중에 가장 큰 것을 골라 삯을 지불했다.
강에 떠다니는 배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형님. 큰 배면 오히려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왜?”
“그거야 당연히 크기가 크면 그만큼 느리고 쉽게 부서지잖아요.”
“그건 강이나 그렇지 바다 배는 또 달라.”
강이야 배가 부서져도 헤엄을 치면 그만이지만 바다는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죽거나 익사하는 게 대다수였다.
아직 제대로 된 파도조차 본 적 없는 이들이었기에 큰 배를 타려는 진백천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들이 멀미를 겪어봐야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쯧.”
“멀미? 그게 뭡니까?”
“배가 출렁이니까 속이 뒤집히는 거야.”
도홍경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늘을 날아들듯 다녀도 그런 적 없던 자신이었다.
겨우 배가 출렁이는 정도로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쯧쯧. 혹시 모르니까 가능한 속 비워둬.”
“하하. 문제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정확히 1시진 뒤.
도홍경은 출렁이는 망망대해에 열심히 물고기 밥을 뿌려댔다.
토해내는 음식은 정확히 1시진 전에 꾸역꾸역 먹던 것들이었다.
중혁의 얼굴로 샛노랬지만 그나마 도홍경과 다르게 멀쩡했다.
“웨에에에엑! 형, 형님…… 저 죽을…… 웨에엑!”
아직 요녕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하루는 더 가야 했다.
‘원래 이 정도까지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진백천의 생각은 정확했다.
배를 모는 선원들도 다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맘때만 되면 바다가 미쳐 날뛰니 원!”
“이놈의 용풍(龍風) 때문에 죽을 맛이라니까! 어서 용이 승천을 끝내야 하는데 말이야!”
용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호기심을 끌 만했다.
진백천은 그나마 한가해 보이는 선원에게 용풍에 대해 물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선원은 던져주는 은자에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험험. 용풍은 말 그대로 용이 승천할 때 일어나는 태풍을 말합니다. 진짜 용이 보이는 것은 아니고 저희 뱃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용풍은 마른하늘에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용이 하늘에 승천하듯 소용돌이가 생겨나는데 그 모습이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같다고 해서 용풍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주변은 유난히 용풍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나마 이 배가 커서 망정이지 작은 배들은 잘못 휘말리면 바로 바닷속으로 박힙니다.”
도홍경과 중혁은 그 말을 듣고 헬쓱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이곳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도홍경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속을 게우다 나중에는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 있었다.
울렁이는 하늘을 지긋지긋해질 때쯤 마침내 배는 요녕의 항궁에 도착했다.
“후우.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모두 짐을 챙겨주시길 바랍니다!”
불과 하루만 도홍경과 중혁은 강시처럼 변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유일하게 진백천만이 기지개를 켜며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우. 상쾌한 아침이네.”
“……형님은 어떻게 그 흔들리는 배 안에서 그렇게 편하게 쉬세요?”
“글쎄. 나는 원래 뱃멀미 같은 거 안 했는데?”
무공의 수위와 상관없이 단순히 체질의 문제였다.
“자자. 내려서 배부터 채워야지. 배고프지?”
“……죽을 것 같습니다.”
진백천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다가 잘 보이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항구가 있는 이곳에서는 내륙과 달리 새로운 음식들을 먹어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소금에 절이지 않은 신선한 물고기였다.
내륙에서 먹는 생선요리는 보존상 어쩔 수 없이 소금으로 절여놓는 게 대부분이었다.
한참을 물에 불려놓는다 해도 갓 잡은 생선의 촉촉함과 맛을 따라올 수 없었다.
“와아. 이렇게 큰 생선은 처음 봅니다!”
“마음껏 먹어. 여기서밖에 못 먹는 거니까.”
외형을 보고 꺼리던 중혁도 막상 입에 넣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먹어댔다.
요녕은 항구가 있는 성이었지만 매우 복합적인 지형을 가진 곳이었다.
중앙으로 산맥이 지나가는 곳답게 평원보다 고원과 구릉이 많았다.
또한 어업과 광업, 과수와 같은 농업도 잘되는 덩달아 사람들의 유동량도 많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만큼 산적들이 많기도 하고 말이야.’
용풍으로 인해 배로 이동하는 것에 무리가 있으니 상단들은 주로 산맥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요녕에서 나는 물건이 많은 만큼 다양한 상단이 다녔으니 그런 금맥 같은 자리를 산적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금맥 자리인 만큼 그곳을 차지한 자들이 녹림(綠林)의 형제들이란 사실이었다.
‘통행비만 적절히 내면 별일 없이 보내주니까.’
더구나 진백천과 같은 여행자라면 굳이 통행세를 받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상단은 요녕에 자리 잡은 모용세가보다 산속의 녹림의 눈치를 더 살피기도 했다.
“모용세가면 무척이나 유명한 곳 아닙니까?”
“유명한 곳은 맞지.”
무림 5대세가를 말할 때 꼭 빼놓지 않는 곳이니 유명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유명한 만큼 인식이 좋냐고 물으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모용(慕容)이라는 성이 선비족에서 온 만큼 오랑캐라는 선입견이 컸다.
실제로 그들은 몇 차례나 중원 가까이 진출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실력만으로 따지고 본다면 제갈세가나 남궁세가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아.”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니 안타깝습니다.”
“딱히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 그들도 나름 간사한 쪽에 기운 자들이니까.”
실력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는 강호의 도리나 의협(義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간사한 면을 보였다.
그런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때가 바로 정마대전이었다.
그들은 앞에서는 마교의 척살을 부르짖었지만, 뒤로는 그들과 내통하며 양다리를 걸쳤다.
‘결국 모든 게 다 들통나서 둘 다 에게 팽 당하고 말았지만 말이야.’
이번 미래에서도 그렇게 될지는 몰라도 진백천이 그들에게 가지는 감정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적당히 배를 채운 진백천은 곧바로 마차부터 구했다.
상단이 많아서 마차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슬슬 떠날 준비를 마친 그때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표협(慓俠)이라고 적힌 두건을 이마에 멘 자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표협 표국의 표두인 표청이라고 합니다.”
마치 표자 말 돌림의 말장난을 하는 듯한 소개였다.
스스로를 표두라 소개한 그는 경계 어린 도홍경의 시선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라도 산맥을 건너실 거라면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많지는 않아도 수고비는 넉넉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표국이라면 표사들이나 쟁자수가 있을 텐데?”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리는 소문이 심상치 않아서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려는 겁니다.”
표청이 말하는 소문은 최근 들어 산적들이 통행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물건을 모두 빼앗고 사람들을 전부 죽이니 더 문제였다.
‘흐음. 녹림이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는데.’
소문에 민감한 표국이니 과민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진백천은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그들을 물렀다.
표청도 딱히 급한 문제는 아닌지 포권을 취하고 다른 이들에게 향했다.
“형님. 세상이 흉흉해지니 산적들도 미쳐 날뛰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그들은 산에서 노숙하며 먹을 음식마저 전부 마차에 싣자 곧바로 길 위로 나섰다.
상단이 많이 다니는 만큼 산이라고 해도 비교적 길이 깔끔했다.
늦은 오후라 그럴까.
지금 출발하는 마차는 진백천을 제외하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여유롭게 산길을 독차지하며 나아갔다.
마차는 곧 산으로 들어서며 주변 세상이 녹음으로 물들었다.
‘산속인데도 제법 소란스러운데?’
진백천이 소란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나뭇잎이 사락- 거리거나 동물의 울음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쉬지 않고 퍼드득거리며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쯧. 웬만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이러면 너무 궁금해지잖아.’
진백천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전서구가 퍼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평범해 보이는 새였지만 잘 관리된 털과 수북한 털 사이에 묶인 작은 서신은 명백히 전서구였다.
호무살(虎武殺).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의념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전서구의 심장이 틀어박혔다.
힘차게 날갯짓을 하던 놈은 그대로 고꾸라지며 떨어졌다.
진백천은 내력으로 놈은 마차 안으로 끌고 왔다.
“흐음. 무슨 이야기려나.”
서신을 풀어 확인해 보니 역시나 마차에 대한 이야기였다.
[표협(慓俠) 표국 물자를 싣고 이동 중. 표사들이 제법 많기에 주의 요망. 그 뒤를 새로운 마차가 따라가는 중. 연관성은 없어 보이지만 계속해서 주시하겠음.]
‘과연 산적들의 성지인 요녕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정보도 계속해서 주고받는다 이거지?’
진백천은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보이는 족족 전서구들을 잡아챘다.
서신에 적힌 것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열 단위가 넘어가자 서신의 내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서구를 띄우는 족족 누군가 잡아채고 있음. 더는 전서구를 보내지 말 것.]
‘멍청한 놈들. 전서구를 잡아내는데 서신을 보낸다고 받을 수 있겠냐?’
놈들은 비둘기 사체가 마차 안에 수북이 쌓일 때쯤이 되어서야 더는 전서구를 날려 보내지 않았다.
슬슬 해가 산 너머로 기웃거리자 마차는 적당한 자리에 멈춰섰다.
“오늘 저녁은 비둘기 고기나 먹을까?”
“비둘기요?”
비둘기 고기는 제법 맛이 좋았다.
야생의 새들과 달리 잘 먹고 관리를 잘 받아서 육질도 부드럽고 잡내도 나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전서구를 날려주면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식사를 마친 진백천을 비롯해 일행은 곧바로 무공 수련을 시작했다.
한동안은 중혁의 무공을 봐주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동안 소홀했던 태천검(台千劍)을 중점적으로 수련했다.
현재 진백천이 익힌 태천검은 48가지 동작 중 36번째였다.
‘후반부에 들어선 후부터는 조금이라도 동작이나 내력의 운용이 틀리면 그 반발력이 너무 커.’
오죽하면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져서 실수라도 하면 그날 하루는 태천검을 수련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검에서 손을 놓지 않고 수련한 결과 태천검의 3번째 초식까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실전에서 사용할 만큼 능숙하지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지.’
태천검의 3번째 초식의 이름은 파류식(破流式).
한 자루의 검으로 사방 어디에서 뻗어오는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며, 상대의 힘을 빌려 공격을 되돌려보낼 수 있는 초식이었다.
만약 능숙해지기만 한다면 그동안의 진백천의 약점인 다수의 대결에서 능히 효과적인 전투가 가능했다.
‘후우. 한번 해볼까?’
진백천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검을 들어 올렸다.
파류식은 누군가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는 기술.
다행이라면 이곳은 산속이었고 공격을 대신할 것 들은 충분했다.
아름드리 소나무 앞에 멈춰선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