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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회귀백서-272화 (272/346)

무림회귀백서 272화

92장 약속과 헤어짐

진백천은 왜 갑작스레 이러한 분위기로 이어졌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단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을 뿐이고 고유빈은 고개를 틀어 쳐다봤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곤 고유빈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진백천은 손을 빼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입맞춤은 어떻게 하던 거였더라.’

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 언제 입을 맞췄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생각에 따라 고유빈의 입가로 향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붉게 달아오른 것은 착각이었을까.

“크흠. 진짜 몸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진백천은 애써 상황을 풀어보고자 손을 내려 볼을 쓰다듬었더니 이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보드라운 볼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으로 타고 전해졌다.

항상 단단한 금속만 쥐던 것과 너무 달라 자기도 모르게 그 감촉을 조금 더 느꼈다.

“…….”

고유빈은 여전히 말없이 그를 지긋이 올려다봤다.

진백천도 똑같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오히려 시끄럽게 속마음이 들리는 것은 어딘가 숨어 있는 홍적란이었다.

-까아아아악! 어서…… 어서요! 그만 애간장 태우고 확 들이받으라고요!

진백천은 가볍게 반대 손을 휘저어 둘 주변을 호무살의 기운으로 휘감았다.

홍적란의 호들갑 섞인 목소리가 곧 사라졌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마음은 한결같았을지도 몰라.’

또 반복되는 회귀로 그녀가 자신을 잊고 혼자 남겨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억지로 멀어지려 했지만 그것 또한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지금 이렇게 눈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금세 마음속이 따듯해지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진백천은 자신이 어떻게 입맞춤을 했었는지 떠올랐다.

‘내 상대는 오직 한 명이었지.’

처음에는 억지로.

그 후에는 정으로.

그리고 지금은.

“사랑해.”

진백천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었다.

순간 뒤편의 탁상이 덜컹거리는 게 보였지만 다행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고유빈은 그 말을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진 눈으로 진백천을 더욱더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대답이 없어?”

“잠깐만.”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상단전으로 그녀의 마음을 엿듣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그녀의 속마음은 그렇게 엿듣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의무에 얽힌 마음이라면…….”

진백천은 피식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먼저 정혼하지 말라고 했던 말 때문이지?”

“맞아.”

“걱정마. 추호도 그런 마음은 없으니까. 전적으로 지금 내 마음으로 하는 소리야.”

눈을 지긋이 바라보던 고유빈은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표시가 떨어지자마자 진백천은 참지 않고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숨이 부족할 때까지 한참을 입술을 나누고 나서야 둘은 다시 떨어졌다.

불과 일다경이 지난 후였지만 그 전과 후는 엄연히 세상이 달라졌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

고유빈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 * *

둘은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고도 밤이 깊도록 함께 있었다.

나름 격정적이었지만 그것을 가볍다고 표현한 것은 그 후로 이어진 입맞춤이 더더욱 진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배고프네. 입맞춤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체력이 소비될 줄이야.”

고유빈은 품에서 일어나더니 진백천을 찌릿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시녀를 시켜 간단한 상을 차려오게 했다.

“술은 마시지 마.”

“왜? 그게 내 유일한 낙인데.”

“이제 내가 백천의 유일한 낙이 될 거야.”

아직 제대로 혼약도 하지 않았지만 고유빈은 소유욕을 보였다.

그동안 애태우게 만들었으니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녀는 빠르게 음식이 차려진 상을 가지고 왔다.

진백천은 고유빈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알콩달콩 식사를 즐겼다.

“백천.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뭐든지 물어봐.”

“왜 처음 봤을때 나보고 혼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거야? 지금 와서 말하지만, 그때 진짜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어. 구해준 것만 아니었으면 확 목을 잘라 버리라고 했을걸?”

진백천이 뜨끔하며 먹던 것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크흠! 글쎄.”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사실은 자신이 회귀를 여러 차례 했으며 결국 우리 둘은 행복하지 못했고, 늙어서야 마교를 몰아냈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겠나.

그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마교와의 전쟁을 앞두었으니까? 생사가 불분명한데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순 없잖아.”

“하참. 내가 첫눈에 빠질 거라 예상했단 거지? 도끼병이시네!”

“도끼병은 또 뭐야?”

“있어. 눈으로 도끼 찍는 병.”

진백천은 진지하게 호무살과 비슷한 종류의 것인가 고민하다 말았다.

“하여튼. 지금은 서로의 마음이 이어졌잖아. 걱정 마. 마교놈들도 내가 다 처리해 버릴 테니까.”

다소 과장이 섞인 말투였지만 고유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본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진백천은 정도회의 수장.

정마대전의 전투에서 가장 앞에 나서야 하며 흘려야 할 피가 산더미처럼 예약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내가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서장을 비롯해 3개의 성을 내준다고 해도 마교는 멈추지 않겠지?”

“물론. 오히려 그것을 약점으로 삼고 더 집요하게 물어뜯겠지. 놈들은 한쪽이 파멸하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아.”

“얼마나 오래 갈까?”

“이 전쟁이?”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에 진백천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글쎄. 적어도 할머니 되기 전에는 내가 꼭 놈들을 끝장내고 모시러 갈게.”

“……너무 늦잖아!”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회귀 전에도 중년이 되기 전에 끝냈던 정마대전이었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더더욱 진백천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가능한 빠르게 정마대전을 마무리해야 돼.’

슬슬 강호 전역에서 마인들과 무인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핏물이 바닥을 짙게 적셔져 갔다.

하지만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관과 무림의 전력을 끌어내 단번에 십만대산을 으깨 버려야 돼.’

당금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강호 전역에 단 한 사람.

진백천밖에 없었다.

‘만약 내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1년.”

“1년?”

“그 안에 모든 게 판가름날 거야.”

고유빈은 진백천의 말이 다소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말해왔던 것을 전부 지켜냈다.

그러니 이번에도 지킬 게 분명했다.

“알았어. 그 정도는 나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마.”

“그러면?”

“준비한다고 생각해.”

고유빈은 순간 일 년 뒤를 상상했는지 입을 삐죽이며 진백천의 품에 안겼다.

그들은 애써 차린 상의 음식을 더 먹지도 않고 해가 뜰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헤어져야 하는 둘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황도에는 언제 들릴 거야?”

“석 달 뒤쯤?”

“알았어.”

둘 사이를 번갈아 보는 홍적란은 참을 수 없는지 자꾸 얼굴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는 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러면 오라버니한테는 내가 말할까……?”

“아니야. 내가 가서 말할게.”

둘은 마지막으로 진한 눈인사를 나누고 떨어졌다.

남은 것은 홍적란이었다.

“요화귀는?”

“흐흐. 잘 관리 중이죠.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게요.”

“혹시 모르니까 방심하지 말고 잘 봐. 손이 아닌 발로 땅을 파고 도망칠지도 몰라.”

“지금 상태를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 거예요. 부마.”

은근슬쩍 붙이는 부마 소리에 진백천보다 고유빈이 더 움찔하며 놀랐다.

“까불지말고. 황제한테는…… 그 뭐냐. 나 갈 때까지 괜히 마교랑 드잡이질하지 말라고 해. 복수의 기회는 내가 만들 테니까.”

“네. 그렇게 똑똑히 전하겠습니다. 부마.”

“크흠.”

피풍의를 눌러쓰는 그의 얼굴은 다시 역용술로 무명악인 권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그를 지켜보는 고유빈의 시선은 꿀이라도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을 확인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석 달이야.”

“응. 석 달.”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도홍경과 중혁이 머무는 객잔으로 향했다.

그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근처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객잔으로 가니 퀭한 얼굴로 오리탕을 먹는 중이었다.

“으으. 형님. 오셨어요?”

한눈에 봐도 숙취로 가득한 얼굴은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 입안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쯧쯧. 에휴. 이 주정뱅이 놈들 같으니라고. 작작 좀 마셔라.”

“흐흐. 그건 형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시잖아요?”

“나는 어제부로 술 끊었다.”

“에잉. 그게 무슨 소리 십니까. 차라리 애벌레가 뽕잎을 버렸다 하시지.”

진백천은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둘을 훑어봤다.

“짜식들아 세상에 술 말고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냐. 특히 중혁이 너는 어린놈이 벌써부터 술에 빠져 가지고. 나였으면 밤새도록 수련만 했어.”

“……죄송합니다.”

중혁은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면 요즘 들어 수련하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다.

여행을 하면서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였지만 호된 질책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도홍경 너는 삼촌뻘이나 되는 놈이 같이 술이나 먹고 이게 뭐냐?”

“……삼촌뻘이요? 중혁이랑 저랑 4살 차인데요.”

“…….”

산적 같은 얼굴에 가끔 까먹지만 도홍경은 아직 20살이었다.

* * *

황궁 태화전(太和殿).

진백천과 헤어진 고유빈은 요화귀라는 진상품을 들고 당당히 복귀했다.

이미 서신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를 비롯해 고관대작들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반신반의했다.

-황궁에서도 도망친 자를 어떻게 공주가 잡았단 말인가?

-그 요괴 같은 놈이 표기장군인 척하다가 들켜서 오히려 함정에 빠졌다더군!

-아무리 그렇다고 하나…….

하지만 막상 요화귀를 눈앞 대령해놓자 다들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의 품속에서는 이미 황제로 변장할 때를 대비해서 그의 얼굴 형태의 인피면구와 가발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관리들의 것도 함께였다.

“끄으으윽.”

요화귀는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전 파괴되었으며 양손이 잘리고 온몸이 묶인 상태였다.

그런데도 홍적란은 주요 근골을 잘라 제압했으니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은 주둥이와 두 눈알뿐이었다.

“도망칠 때는 그렇게 당당하더니 잡혀 온 꼴은 한심하기 짝이 없군. 안 그런가 사례감?”

“맞습니다. 황상!”

황제의 비웃음에 왕진포 사례감이 큰소리로 맞장구쳤다.

비운의 기류만 흐르던 태화전에 모처럼 기세가 솟구쳤다.

“다들 저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말해보시오!”

“전신을 도륙해 돼지의 먹이로 주고 머리는 효시해 황상의 지엄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 전에 관련된 자들을 알아내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처럼 하나같이 듣기 좋은 말들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끄으으윽! 주, 죽여줘!”

황제는 고통에 신음하며 끌려가는 놈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봤다.

고유빈과 단둘이 만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서신으로 읽었지만 진백천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 듣고 싶었다.

자연스레 서두르는 그에 고유빈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물론 둘 사이의 약속과 가벼운 접촉은 쏙 빼놓은 채였다.

“석 달 후라. 백천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파할 자리에 뜨거운 장작을 집어넣은 것은 홍적란이었다.

뒤로 몰래 진백천과 고유빈의 뜨거운 하루에 대해 샅샅이 고한 것이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황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아니다. 힘들었을 테니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네.”

고유빈은 평소와 다르게 희희낙락하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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