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71화
91장 요화귀(妖火鬼)와 고유빈(5)
요화귀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났음을 알고 나서 곧바로 주변에 미리 설치해놓았던 진법을 발동했다.
성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워졌다.
“놈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얼굴을 기억해놨으니 괜찮다! 실력이 제법이니 분명 이름 없는 놈은 아닐 터!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필코 찾아내 복수해 주지!”
씹어먹듯 말하는 그의 말투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공을 들였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방금 진백천의 단 한 수로 인해 내부는 진탕이 되어 버렸다.
독 기운이 얼마나 지독한지 억지로 한곳에 모아놨음에도 불구하고 내력마저 녹이며 야금야금 퍼져 나갔다.
그가 서둘러 성내를 벗어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으드득!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전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악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악의 탓에 자신을 쫓는 신형을 차마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막 두 번째 문을 지나치고 나서부터였다.
“뭐지? 이곳에 문이 세 개였던가?”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지금쯤이면 바깥으로 향하는 후문이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어딘지 방금 자신이 지나친 곳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었다.
마치 제자리를 도는 듯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담벼락을 지나 똑같은 곳에 서자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진법이다! 누가 감히?!”
기척을 넓히자 그제서야 주변에 뿌려져 있는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체계적인 술법이었다.
진법은 성의 안쪽뿐만 아니라 바깥에까지 여러 겹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체 언제?!”
요화귀는 진언을 외우며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종염삭(從炎索).
그러자 손끝에서 피어난 화염의 밧줄이 진법의 시전자를 향해 뻗어갔다.
밧줄이 향한 곳은 멀지 않았다.
“허억!”
도홍경은 자신에게 꿈틀거리며 뻗어오는 화염의 밧줄을 보며 다급하게 성령목검(聖領木劍)를 휘둘렀다.
사특한 기운을 사그라뜨리는 목검은 그대로 밧줄을 잘라냈다.
스스슥-
“네놈이구나! 어린놈이 감히!”
“술법 쓰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늙은놈아!”
요화귀가 참지 못하고 화염을 흩뿌리며 달려들었지만 그를 막은 것은 중혁이었다.
검게 물든 양손이 그대로 화염을 흩뜨리며 가슴을 두드렸다.
퍼억!
“커헉! 이, 이놈들이!”
요화귀가 아무리 술법사라 해도 이렇게까지 밀릴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습으로 인해 당한 독 기운으로 인해 내부가 제대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검게 물든 양손을 휘두르는 중혁의 기운도 심상치 않으니 지금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네놈들도 가짜 악살신괴와 한패렸다! 언젠가 반드시……!”
요화귀는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바닥에 고꾸라졌다.
뒤편에서 나타난 진백천이 그대로 그의 등을 후려 차버린 것이다.
“이놈은 공수표 날리는 게 버릇인가?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복수하겠다는 거야?”
요화귀는 이를 갈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곧 진백천의 얼굴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역용을 푼 그는 어느새 본래의 얼굴로 돌아간 상태였다.
“……네놈은 뭐냐? 왜 내 얼굴을…….”
“한동안 내 흉내를 내더니 정신 상태까지도 이상해졌냐? 내 얼굴이 어떻게 네 얼굴이야?”
요화귀는 입을 벙긋거리며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부, 분명 폐관에 들어갔다고……·.”
“그렇게 하고 마음 편히 돌아다니려 했는데 네놈이 망가뜨렸잖아. 어디서 건방지게 남의 흉내야?”
진백천은 놈의 손가락이 뒤에서 몰래 수인을 맺는 것을 보고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독고구검은 그대로 손가락뿐만 아니라 손목까지 끊어냈다.
“끄아아악!”
화요귀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고통 섞인 몸부림을 쳤다.
겉으로는 힘없는 늙은이의 모습이었지만 진백천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화요귀에게서 들려오는 속마음은 전혀 아니었다.
-설마 진짜 진백천이 나타날 줄이야! 저 도사가 있는 한 진법을 뚫고 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땅길을 통해 도망가는 수밖에!
‘땅길?’
혹시 비밀 통로라도 파놨나 싶었지만 그런 것은 아닌 듯싶었다.
진백천은 도홍경에게 바로 땅길이라는 것에 물었다.
-아무래도 지둔술(地遁術)을 말하는가 본데요?
-지둔술?
말 그대로 땅을 파고 도망가는 술법을 말했다.
-만약 저 늙은이가 지둔술을 사용할 줄 안다면 바로 붙잡아야 돼요. 진법으로는 쫓을 수 없어요.
도홍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요귀는 다시 한번 검은 구슬을 터뜨렸다.
단순한 연막탄은 아닌 듯 화염에 휩싸이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화염 사이로 얼핏 놈이 땅 밑으로 손을 쑤셔 넣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두더지처럼 순식간에 허리까지 쑤욱 하고 밀려 들어갔다.
‘저게 놈이 어디에서나 도망치는 능력이란 말이지?’
더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기 전에 빼내야 했다.
진백천은 호무살의 기운으로 화염을 밀어냈다.
동시에 발끝으로 내력을 끌어모으며 그대로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바닥이 움푹 파이며 주변 일대가 잘게 떨렸다.
땅속을 뻗어 나간 내력은 파고들던 요화귀를 쳐내며 땅 바깥으로 튕겨냈다.
“크아아악! 전부 죽여 버리겠다아!”
놈은 자꾸 도망가는 데 실패하자 참지 못하고 울분을 내질렀다.
하지만 진백천의 공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술법을 못 쓰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
“수인을 못 맺게 양손을 잘라내고 혀를 잘라내면 돼요! 혹시 모르니까 두 눈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목을 잘라내는 편이 더 간편했다.
“……아니면 제가 봉인해도 되고요!”
“짜식아. 그러면 진즉에 그렇게 말하던가!”
진백천은 적절히 타협해서 양손을 잘라내는 것과 단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황제에게 끌려가서 대화를 나누려면 혀는 필요했다.
놈이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떨어지자 도홍경이 재빨리 부적을 꼬아 넣은 밧줄로 팔다리를 묶었다.
고통 탓인지 요화귀는 감히 반항할 생각을 못 했다.
“내, 내 팔이…… 단전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놈은 절망에 찬 눈으로 진백천을 노려봤다.
“어허. 눈깔에 힘 안 풀지?”
몇 차례 두들겨 팬 효과가 있는지 요화귀는 이를 악다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진백천은 그대로 놈의 마혈을 짚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술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몸까지 제압당했으니 이제 걱정할 것은 없었다.
“후우. 아침부터 뛰어다녔더니 배고프네.”
“형님. 저희는 밥도 못 먹었어요.”
“수고했어. 뒷일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가서 얼른 쉬어라.”
도홍경과 중혁이 화염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꿈뻑였다.
쉬려고 해도 이미 그들의 숙소는 불에 전부 타버린 상태였다.
“……객잔에 가 있어. 먹고 싶은 만큼 시켜 먹고.”
진백천이 제법 묵직한 은자 주머니를 던져주자 도홍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흐흐. 중혁아 우리 술값이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가능한 일 많이 보시고 늦게 오세요!”
중혁마저 입맛을 다시며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남은 것은 불타는 성내와 옅게 신음을 내뱉는 요화귀뿐이었다.
* * *
성내의 불길을 잠재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요화귀가 피운 불길은 평범하게 물을 끼얹는다고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이 닿으면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물 말고 모래를 끼얹어!”
뒤늦게 방법을 바꿔 불을 꺼드렸지만 이미 성내의 건물은 대부분 소실된 상태였다.
덕분에 성주인 고참언은 분노로 방방 뛰는 모습을 보여줬다.
만약 진백천이 요화귀를 끌고 가지 않았다면 화병으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끄으으. 저 개 같은 놈을 내 손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니 참으로 원통하군!”
“참으세요. 어차피 저자는 황궁으로 끌려가면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받을 거예요.”
고유빈이 차가운 눈으로 요화귀를 내려보며 말했다.
감히 황제를 죽이려 한 것뿐만 아니라 진백천인 척 자신에게 접근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에게 속아 황궁으로 놈을 데려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저놈은 내 눈앞에서 치워라. 황궁에 갈 때까지 절대 죽지 못하게 관리하고.”
“네. 성주님!”
금의위들이 요화귀를 끌고 빠져나가자 자리에 남은 것은 그들과 진백천뿐이었다.
사람을 물린 이유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크흠. 자네가 누군지는 굳이 묻지 않지. 감추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고유빈의 태도를 보며 그가 진짜 진백천임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이번 일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렇지. 표기장군이라면 황실을 위협하는 자를 가만두어선 안 될 테니까!”
고참언은 굳이 그런 말을 언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라도 정식으로 다시 봤으면 좋겠군. 그깟 못생긴 가짜 얼굴 말일세.”
“물론입니다.”
고참언은 고유빈을 슬쩍 보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전음이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들려왔다.
-공주를 잘 부탁하지. 생각보다 외로운 아이야.
그가 나가자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진백천이었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아봤어?”
“눈이 다르니까.”
고유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더니 곧 손을 들어서 눈을 제외하고 전부 가렸다.
“얼굴은 아직도 이상한데 눈은 괜찮아.”
“다음에는 눈도 바꿔야 하나?”
장난스러운 말투에 고유빈이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뒤쪽에 미리 준비했는지 다기를 꺼냈다.
“할 이야기도 많은 나랑 차 한잔해. 이번에는 그래도 되지?”
“내가 언제 도망가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하네.”
“저번에 황실에서는 그랬잖아?”
“그거야…… 바빴으니까. 크흠.”
진백천은 자리에 앉으면서 역용술을 풀었다.
원래의 얼굴로 돌아가자 그녀도 한층 편하게 여기는 게 느껴졌다.
“그 얼굴은 누구야?”
“무명악인 권진.”
“이립전(而立戰)의 우승자? 하필이면 왜 그런 나쁜 자로 변장했어?”
고유빈은 이미 무림대회에 대해서도 전부 들었는지 조잘대며 이야기했다.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무명악인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형산파의 고당춘이라는 자는 기절시키고 옷까지 전부 벗겼다니까. 아. 백천은 그 자리에서 직접 봤지?”
“……봤지.”
차마 그것이 전부 자신이 한 짓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대충 나쁜 놈이라는 것에 동의하며 맞장구쳐주는 게 전부였다.
고유빈은 끓인 차를 찻잔에 따르며 그에게 건넸다.
“자, 마셔. 그나저나 왜 정도회에서 빠져나온 거야?”
“몰래 움직여야 하는 일이 있거든. 한동안은 더 이렇게 움직여야 돼.”
“위험하지 않을까?”
“누가 감히 나를 건들겠어.”
진백천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고유빈이 피식 웃었다.
“너야말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머리도 상하고 너무 말랐잖아. 고생한 게 한눈에 보여.”
“칫. 내가 아니면 상단을 운영할 사람이 없어.”
개인적인 수익을 목표로 하는 일반 상단과 달리 황실상단은 군수 물자도 책임져야 했다.
몸이 한두 개라도 부족했다.
“나처럼 적당히 아랫사람한테 시켜가면서 해.”
진백천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유빈이 움찔하며 굳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진백천이 손을 멈췄지만 왠지 상황이 더 어색해졌다.
“백천?”
고유빈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진백천을 올려다봤다.
그녀답지 않게 두 볼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