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70화
91장 요화귀(妖火鬼)와 고유빈(4)
고유빈은 기뻤다.
우연히 이곳에서 진백천을 만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폐관했다고 들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과도 같은 느낌에 그녀는 모처럼 얼음장 같던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지?’
분명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미소인데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은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반갑던 그의 손길도 점점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심지어 어제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손을 쳐낼 뻔했으니까.
‘후우. 만약 저 악살신괴라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을 테지.’
지금의 아침 식사 자리에 성주와 그가 와 있는 것도 그녀가 진백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백천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는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에 고유빈이 알던 것과는 조금 많이.
성격이 달라진 듯했다.
성주의 선 넘은 듯한 말과 행동도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참아냈다.
전이었다면 두 번 볼 것도 없이 으깨 놨어야 했었다.
‘몰래 정도회에서 빠져나온 상태라 그럴 거야.’
하지만 전부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에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점점 그에 대해 심드렁해질 때.
아침 식사에 초대한 악살신괴가 도착했다.
‘홍적란이 제법 괜찮은 자니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했지?’
특별히 황제인 오라버니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붙여준 그림자였다.
그런 홍적란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어제 마주쳤을 때 나쁜 느낌도 아니었고 말이다.
곧 시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악살신괴는 당당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뒤로 비치는 햇살과 함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나는 듯했다.
“저자가 소문의 악살신괴?”
성주인 고참언의 입에서 감탄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소 무림인을 무시하던 그가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흔치 않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고유빈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뭐지?’
당당한 눈빛때문일까.
분명 완전히 다른 얼굴임에도 진백천을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당당한 것은 태도뿐만이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악살신괴라고 합니다.”
“호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생각보다 훨씬 여리여리한데?”
회주인 진백천을 가볍게 무시하며 성주와 인사를 나눴다.
“흐음. 자리가…… 저기 어떤가?”
고참언 가리키는 자리는 외딴곳.
일반적인 자라면 불쾌해하거나 아무 말 없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악살신괴는 달랐다.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곧바로 자신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저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들어서.”
어딘가 반 토막 잘라먹은 말투였지만 고참언은 그를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크하하하하! 악인들만 베는 자라고 하더니 과연 특이한 자로구나! 좋다. 마음대로 해라!”
악살신괴는 당당히 자신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차갑게 식었던 자신의 심장이 다시금 뛰는 듯한 기분이었다.
쿵쾅.
‘이상하다. 왜 이러지?’
고유빈은 자기도 모르게 슬쩍 악살신괴를 올려다봤다.
마침 그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그 눈과 보고 나서야 고유빈은 왜 그런 것인지 깨달았다.
‘……눈! 다른 것은 다 달라도 백천의 눈이야!’
반면에 멀찍이 떨어진 자의 눈은 정반대였다.
외모부터 행동과 목소리.
모든 것이 진백천과 같았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전혀 달랐다.
‘……진짜 백천은 이자야!’
다른 누구도 몰라도 고유빈은 확실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 * *
진백천의 웃음이 더더욱 짙어졌다.
어딘가 당혹감이 어리면서도 기쁜 듯 보이는 미소였다.
-……진짜 백천은 이자야!
설마 했더니 자신과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역용술을 꿰뚫어 봤다.
정도회를 몰래 빠져나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역용이 되는 곳은 근육이 있는 부위였고, 눈동자까지 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만약 상대를 아주 잘 알고 유심히 관찰했다면 의심 정도는 할 만했다.
‘이렇게까지 확신을 갖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야.’
진백천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고유빈이 환하게 웃었다.
바람 빠지듯 가볍게 실소하는 것은 진백천이 습관처럼 하던 모습이니까.
“악살신괴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지금까지 잠잠하던 것과 달리 그녀는 활기를 띠며 물었다.
그런 변화를 눈치챈 것은 고참언뿐만 아니라 요화귀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강호를 주유할 이유가 악인을 잡는 것을 제외하고는 뭐가 있겠습니까.”
“악인이요? 혹시 얼마 전 황실에서 날뛰던 그자를 말 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요화귀(妖火鬼)라는 자로 상대를 똑같이 흉내 내는 악인 중에서도 지독하고 벌레 같은 놈입니다.”
“네. 저도 봤는데 정말 감쪽같더라고요.”
벌레라는 말에도 요화귀는 아무런 내색조차 없었다.
평생 남을 흉내 내며 살아온 만큼 무척이나 뻔뻔한 태도였다.
“그렇다면 회주도 요화귀인지 뭔지 하는 놈의 정체를 잘 알겠군.”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악살신괴에게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유난히 악살신괴라는 단어에 힘이 들어갔다.
나름 그가 하는 협박이었지만 진백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눈앞에 음식을 집어 먹었다.
“맛있어요?”
“네. 그동안 부족하게 먹고 다녔더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하면 더 드릴 테니까 천천히 먹어요.”
고유빈은 직접 차에 물을 따라주는 호의까지 보였다.
그러자 고참언의 눈에 맺힌 짓궂음이 점점 진해졌다.
물론 그 짓궂음이 향하는 대상은 요화귀였다.
슬슬 요화귀와 진백천을 번갈아 보며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둘은 수하관계일 텐데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군.”
“설마요. 회주님은 제 한 몸과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회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진백천의 얼굴을 한 요화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가끔은 도를 넘게 장난치려 들어서 문제긴 하지만 말입니다.”
“호오. 그렇군. 아랫사람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건가?”
“……그런 뜻이 아니라.”
“장난이야! 장난! 내 하는 말 하나하나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참언이 진백천을 괴롭히든 말든 고유빈의 시선은 오로지 악살신괴에게 향했다.
형식적으로나마 장난이 과하다 말하던 것도 없어졌다.
요화귀는 요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자신에게 푹 빠져 있던 고유빈이 갑자기 가짜 악살신괴 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놈이 고유빈의 옆자리에서 사술을 부리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술법을 써서라도 다시 마음을 되돌려놔야 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황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는 그녀는 자신만 바라봐야 했다.
탁상 밑에 넣은 요화귀의 손가락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미리 고유빈에게 걸어놓은 술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곧 튕겨 나오는 술법에 내부가 진탕이 되며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허억! 뭐냐! 술법이 통하지 않아?!
도홍경이 몰래 넣어놓은 호신부와 함께 진백천의 호무살이 그녀를 지키는 중이었다.
요화귀는 술법을 연마한 자답게 진백천이 그녀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알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곧바로 분노 섞인 전음을 보내왔다.
-놈! 뭐 하는 짓이냐!
“뭐가 말입니까?”
하지만 진백천은 당당하게 육성으로 되물었다.
고참언과 고유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대답했다.
“아아. 회주께서 공주님께 보내는 술법을 왜 막냐고 전음으로 물어보셔서 말입니다.”
“뭐라? 술법? 그게 무슨 말이지?”
“아아. 오해입니다. 술법이라뇨. 제가 어떻게 술법을 사용하겠습니까.”
“자네는 가만히 있게!”
화요귀가 다급하게 말을 막으려 했지만 진백천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이미 배는 채웠고 운기조식을 끝낸 도홍경도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제 자신이 신호탄만 터뜨리면 되는 상황에 더 간을 볼 필요는 없었다.
“아아. 상대를 미혹해 자신의 말을 따르게 만드는 저질스러운 술법입니다.”
“뭐라?!”
“상황을 지켜보려 했건만 더는 안 되겠군! 어디 가짜주제에 거짓말로 성주님과 공주를 현혹시키려 드느냐!”
화요귀는 화제를 돌릴 생각인지 고참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진백천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가짜?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의 외침에 사방에서 대기 중이던 금의위들이 뛰쳐나왔다.
그중에는 쌍적검을 뽑아 든 홍적란도 보였다.
금의위들은 고참언과 고유빈을 뒤쪽으로 호위하며 진백천과 화요귀를 포위했다.
“어차피 피차일반이잖아? 이렇게 된 거 서로 깔끔하게 공개할까?”
“닥쳐라!”
화요귀는 탁상을 밀며 단숨에 장을 흩뿌렸다.
기습으로 그를 제압하려 한 것이지만 상대를 잘못짚었다.
진백천은 한손으로 탁상을 붙잡아 장기를 그대로 가슴으로 받았다.
화요귀의 내력 따위 호연보위에 막혀 사방으로 흩날렸다.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며 놈이 제법 놀랐다.
“이게 전부야? 너무 약하잖아. 적어도 흉내를 낼 거라면…….”
이번에는 반대로 진백천이 탁상을 밀며 장을 흩뿌렸다.
천지만독수(天支萬毒手).
퍼엉!
“커헉!”
독 기운이 가득한 장기에 적중당한 화요귀는 그대로 옷이 타들어 가며 뒤로 튕겨갔다.
그리고 타들어 간 것은 옷뿐만이 아니었다.
인피면구와 가짜 모발 등이 녹아 들어가며 그 안에 진짜 얼굴이 일부 드러났다.
도저히 진백천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주름진 피부의 노인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당장 저자를 포위해!”
이때다 싶어 홍적란이 명령하자 금의위들이 그를 겹겹이 에워쌌다.
다잡은 기회라 생각한 것을 놓친 요화귀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몸에 붙은 가짜 피부를 찢어내듯 벗겨냈다.
찌이익-
“네노오옴! 감히 내 일을 방해해?! 어서 정체를 드러내라!”
“왜? 알면 감당은 가능하고?”
마침내 원래의 노인 모습으로 돌아간 요화귀는 진백천을 비웃었다.
“황제라 해도 두렵지 않은 나다! 나를 방해한 대가로 네놈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 것이다! 언제 내가 변장해서 네놈의 목을 노릴지 모르니까 말이다!”
“늙으면서 추하게 입만 살았군.”
“닥쳐라!”
요화귀는 품속에서 둥그런 연막탄을 꺼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순간 방 안이 검은 연기로 가득 찼지만 진백천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연기는 검파에 휩쓸리며 반으로 갈라지며 사그라들었다.
요화귀는 그 짧은 틈에 밖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백천!”
진백천이 그를 쫓으려 하자 지켜보고 있던 고유빈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걱정 마. 저 새끼만 붙잡고 다시 돌아올 테니까.
-무리하지마!
고유빈은 고개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 오래 안 걸릴 거야.
-응!
진백천은 그 말을 뒤로 사라진 요화귀의 뒤를 쫓았다.
이미 도홍경이 놈을 쫓는 중이라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