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69화
91장 요화귀(妖火鬼)와 고유빈(3)
과연 은영사검(隱影四劍)이라고 해야 할까.
홍적란은 은형비단을 뒤집어쓰고 있는 진백천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누구냐!”
그녀는 허리춤의 쌍적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쌍검 중 다른 하나는 겉모습이 비슷한 가품이었다.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쌍적검 중 하나는 내기에 지고 진백천에게 빼앗긴 탓이었다.
홍적란은 진백천이 대답이 없자 기세를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검신에서 그녀의 적발을 닮은 아지렁이가 피어올랐다.
“잠깐. 나는 싸우려고 온 게 아닌데?”
“이 밤에 말이지?”
“원래 성 안은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곳 아닌가. 그치?”
어딘가 익숙한 대화 내용이었다.
진백천이 황궁에 머물렀을 때 그를 찾아왔던 홍적란이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백천을 자세히 살폈다.
“너는…… 누구지?”
아무리 봐도 자신을 이렇게 개인적으로 불러낼 정도로 기억이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의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자신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를 단순히 유인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대체 뭐지.
진백천은 그녀의 어리바리한 반응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기회를 줄 테니까 내가 누군지 맞춰봐.”
“뭐?”
“맞추면 그딴 가검 말고 좋은 걸로 하나 구해주지.”
홍적한은 흠칫 놀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제서야 이 모든 대화가 진백천과 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늘 찾아왔다는 악살신괴인가? 아무리 진백천 회주의 수하라고 하지만 지금 행동은 너무 건방진데?”
“쯧. 그때도 그렇게 눈치가 없더니 지금도 이래서야 되겠어?”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역용술을 풀었다.
황제만의 은영사검(隱影四劍)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알려도 상관없었다.
더구나 이미 이곳에 자신을 사칭하는 가짜가 있으니 알게 모르게 시선이 끌렸을 터였다.
그의 얼굴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갔다.
동시에 근골이 늘어나며 줄어들었던 키도 늘어났다.
“……어어?…… 어어!”
홍적란은 기괴한 감탄사 비슷한 소리를 내뱉으며 진백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회주……? 아니…… 왜 여기?”
그녀는 두 눈을 꿈뻑거리며 진백천이 머물고 있는 전각을 번갈아 봤다.
“분명 자러 간다고 했는데. 아니, 아직 저기 있는데?”
“당연히 저기 있는 놈은 가짜지.”
“……가짜? 그래서 나를 몰라본 건가?”
홍적란은 시녀인척 그의 앞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진백천은 그녀를 못 알아봤다.
그때는 당연히 황궁이 아니니 거리를 둔다고만 생각했다.
“아니, 겨우 그런 것이 당신이 진백천 회주라는 이유는 될 수 없지. 오히려 이쪽이 가짜일 수도…….”
“은영사검. 황제의 그림자. 아는 자라곤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과 표기장군인 나밖에 없지? 인원은 4명으로 말 짧고 도를 든 백창우, 섭선을 든 선비 같은 현일선 마지막으로 그쪽하고 알콩달콩하던 청월이라는 자였던가?”
“아, 알콩달콩 따위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게 얼마나 대외비적인 내용인데 이렇게 함부로 말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제야 믿는지 홍적란은 머리색만큼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여기 말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그래.”
진백천은 다시 피풍의를 푹 눌러쓰고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고유빈의 처소에서 멀지 않은 창고였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아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야말로 물어볼 말인데. 왜 가짜한테 유빈이 속고 있는 거야?”
“……가짜라고 하기에는 너무 똑같으니까요.”
“똑같다고?”
진백천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홍적란이 움찔하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래도 솜털 하나 못 건들게 막고 있었거든요? 저도 나름대로 의심 중이었으니까요.”
그건 말뿐만이 아니었다.
금의위를 시켜 정말 진백천이 폐관수련 중인지 그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려 했다.
지금까지는 전부 사실이었다고는 하나 어딘가 기묘하게 틀어진 부분이 있었다.
“어떤 부분이?”
“너무 착하달까요? 제가 아는 진백천 회주는 성격도 고약하고 틀어지면 바로 들이박고 보는 성격인데 산동성 성주에게 지나칠 정도로 낮은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요화귀는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어차피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목표일 테니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바로 가짜를 덮치시게요?”
홍적란이 바로 베어버릴 듯 검을 들고 싸늘한 기세를 보였다.
지금까지 가짜에게 놀아났다고 생각하자 분이 차올랐다.
“아직은 아니야. 놈의 술법이 꽤나 대단한 모양이더라고. 내 수하가 주변을 꽁꽁 막고 있으니 내일이면 붙잡을 기회나 날 거야.”
“그건 그렇죠. 황궁에서 도망가는 솜씨를 보면 보통이 아니었거든요.”
“어땠길래?”
홍적란은 그때를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관대작의 모습을 하고 황궁에 온 놈은 며칠 동안이나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밤중에 황제가 머무는 태화전으로 몰래 잠입해 암살을 시도했다.
물론 은영사검에 의해 실패했지만 도망가는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초월했다.
“몸이 번쩍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 이후에 몸이 허공에 녹아들며 완전히 자취를 감쳤다.
기척 없이 목소리만이 남아 저주를 내뱉듯 떠돌며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순간 유령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신법이라기보다는 도홍경과 같이 술법으로 자신의 기척을 가린 것이다.
아마도 늙은 요괴 같은 늙은이라 그런지 도홍경보다 조금 더 술법에 익숙한 듯했다.
“요괴 같은 늙은이요?”
“응. 적어도 100살은 훌쩍 넘어 보이던데?”
첫 만남에서 이미 그의 인피면구 안의 모습을 꿰뚫어 본 진백천이었다.
속마음도 걸걸대는 목소리니 다르지 않을 터였다.
“흐음. 그러면 내일 아침에 회주께서 식사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시도 때도 없이 고유빈 공주님의 머리를 쓰다듬던 놈이 가짜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아서요. 회주님이 옆에 있으면 그나마 나을 거예요.”
비단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고유빈은 이곳에서 진백천을 만나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더구나 평소와 다르게 다소 느끼하지만 애정 어린 모습도 보여주니 그녀는 정신을 못 차렸다.
물론 술법의 영향도 있겠지만 매일 바쁘게만 지내던 공주가 겨우 가짜에서 놀아났다고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진짜 회주가 신경 써주는 것을 알면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덜 상처를 입으시겠지.
진백천은 그런 홍적란의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식사 후에 곧바로 사냥을 시작하면 되겠네.”
“사냥이라. 좋은 표현이네요!”
“혹시 저 가짜 진백천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더 알고 있는 자들이 있나?”
“많이는 없어요. 성주를 비롯해 상단의 사람들과 금의위들 정도…….”
그렇다면 대부분은 전부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저 진백천은 바로 내일 처리되고 가짜였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야 돼.”
“왜요? 어차피 가짜잖아요.”
“정도회 사람들이나 나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니겠지. 혹시라도 누군가 확인하겠다고 수련동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그 이후에 벌어질 상황에 진백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개 같은 가짜가 진짜가 되고 자신이 옴팡지게 그 오물을 뒤집어쓸지도 몰랐다.
‘그것뿐만 아니라 북행빙궁에 몰래 다녀오려는 내 계획도 전부 망가지겠지.’
“알았어요. 놈을 잡는 순간 미리 퍼져 나갈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둘게요. 대신 저 쓰레기 같은 진백천은 제 손으로 끝장내게 해주세요.”
“……가짜를 붙이든 요화귀라 하든 둘 중에 하나는 하지?”
어딘가 듣기 거북한 진짜 진백천이었다.
“크흠. 요화귀놈이요.”
“알았어. 그나저나 황제는 요즘 어때?”
“힘들어요.”
홍적란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무리 변두리라지만 3개의 성을 빼앗기고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것을 보면 대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어 보였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요. 이대로 전쟁을 그만두자는 자들도 있고 강경파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 군을 일으켜도 자꾸 패배만 한다는 게 더 문제예요.”
돈이나 물자는 충분했다.
진백천이 발견한 전대 황조의 무덤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와 방어구가 나왔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 별게로 출전만 하면 죽어서 돌아오니 아무도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표기장군을 황궁으로 불러들이고 싶어하는 거고요.”
“그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이니 높은 사람은?”
“그분도 뛰어나긴 하지만. 상대는 단순히 군이 아니라 마인들도 섞여 있어요. 단순히 관군들로만은 힘들다는 게 황상의 판단이에요.”
그렇기에 표기장군과 용호대장군 둘 다를 함께 보내 일거에 쓸어버릴 작전이었다.
‘요즘 잠잠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
“시기는 언제로 잡고 있어?”
“눈이 완전히 녹고 파종이 끝날 때요.”
“앞으로 4달 정도 뒤쯤이군.”
정확히 진백천이 폐관에서 끝나고 나올 시기였다.
“알았어.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돌아가면 황제에게 잘 말해.”
“네. 표기장군!”
이제야 홍적란이 환하게 웃으며 안도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진백천에게 약속한 대로 아침 식사에 그를 초청했다.
그리고 그가 식사 자리로 가기 전에 도홍경이 돌아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혹시 몰라서 몇 겹으로 주변을 꽁꽁 감싸놨어요.”
“그래. 수고했어.”
도홍경에게 잠시 운기조식을 취하게 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2시진 뒤로 정했다.
“중혁하고 함께 움직여. 혹시 요화귀말고도 다른 놈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네. 형님.”
상대적으로 무공실력이 떨어지는 도홍경이라도 중혁과 함께라면 안심이었다.
진백천은 그를 데리러 온 시녀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왠지 걸어가는 내내 자꾸 고유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음. 역시나 나를 못 알아보겠지?’
아마도 다소 싸늘한 모습을 보일지도 몰랐다.
철혈상후(鐵血商后)란 별호가 붙을 정도로 진백천을 제외하고는 냉철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이내 장소에 도착하자 시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저자가 악살신괴(惡殺神怪)?”
식탁 앞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성주로 보이는 남자를 비롯해 진백천으로 변장한 요화귀.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유빈.’
그간 고생을 꽤나 했는지 피부가 살짝 푸석해 보였다.
머릿결도 거칠어진 것 같고 살도 빠졌다.
‘쯧. 상단의 운영에 신경 쓰느라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했나 보네.’
걱정이 어린 그의 눈과 고유빈의 눈이 마주쳤다.
진백천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다른 이들에게 인사했다.
그 때문에 아주 잠시였지만 고유빈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악살신괴라고 합니다.”
“호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생각보다 훨씬 여리여리한데?”
스스로를 성주인 고참언이라 소개한 자는 거침없이 진백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표정과 말투에서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 똑똑히 느껴졌다.
‘오만한 자군.’
요화귀는 그런 자 옆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어떻게든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느껴졌다.
“흐음. 자리가…… 저기 어떤가?”
성주는 빈자리 중 가장 먼 쪽을 가리켰다.
음식도 멀어서 손을 쭉 뻗어야 겨우 닿을 거리였다.
진백천은 반사적으로 씨익 웃었다.
“저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들어서.”
그가 성큼성큼 걸어간 자리는 고유빈의 바로 옆자리였다.
고유빈의 눈이 재차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