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68화
91장 요화귀(妖火鬼)와 고유빈(2)
성내에 도착한 진백천은 혹시나 고유빈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허가된 것은 정확히 성의 외곽까지만이었다.
그곳에서 장우량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환영하네.”
그를 따라 객당으로 향하자 이미 술과 안주는 준비된 상태였다.
하지만 장우량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또 따로 준비된 별실로 향했다.
진백천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장소였다.
“앉지.”
둘은 가볍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목구멍을 적셨다.
얼굴을 자주 봤지만 이렇게 술을 마셔보는 게 처음인지라 기분이 생소했다.
“회주께서 나와 술 한잔했던 것도 이야기해 주셨었나?”
지나가는 듯이 툭하고 꺼낸 질문이었다.
그것이 함정인 것을 당연히 눈치챈 진백천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까지는 듣지 못하고 한잔하고 싶었다고는 말씀하셨죠. 매번 상황이 바빠서 술잔을 기울 시간도 없었다고요.”
“……그렇군.”
장우량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졌다.
떠보려고 했던 것이 들켜서라기보다 진백천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부끄러운 것이 더욱 컸다.
둘은 가벼운 사담을 늘어놓으며 술잔을 더 주고받았다.
주로 진백천과 혈사 이후의 정도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제법 취기가 돌기 시작할때쯤 장우량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크흠. 그렇다면 취하기 전에 이 요화귀라는 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누구한테 들은 거지?”
“당연히 진백천 회주님에게입니다.”
“거짓말을 하는군.”
-회주께서는 분명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 요화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니, 진백천뿐만 아니라 요화귀에 대해 아는 자들은 극히 드물었다.
사방에 묻고 물어서야 악인곡에 갇혀 있던 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낸 게 전부였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나 담담했다.
싸늘하게 굳는 장우량의 표정과 곳곳에 숨어 있는 무관들의 날카로운 기세에도 여유롭게 술잔을 집어 들 뿐이었다.
“거짓말이라뇨.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으십니까? 악살신괴에게 요화귀를 죽이라고 시켰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진백천 회주님은 지금 폐관수련 중…….”
진백천은 어색한 그의 표정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무당파 속가제자 출신이라 그런지 금의위답지 않게 거짓말을 하면 무척이나 티가 났다.
“왜 웃지?”
“뻔히 눈앞에 계신 분을 정도회로 날려 버리시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흐음.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죠.”
-……회주께서 분명히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고 했거늘…….
“지금 가서 당장 물어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진백천의 말에 장우량은 무관에게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요화귀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성으로 향했던 무관이 대답을 듣고 돌아왔다.
-표기장군께서 말씀하시길 맞다고 하십니다.
-그래? 분명하더냐?
-네. 똑똑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백천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척 입가를 가렸다.
아무래도 요화귀 이놈은 지금 무척이나 당황했을 터였다.
‘아무도 모르게 진백천인 척 온갖 호사를 다 누릴 텐데 갑자기 자신의 명령을 듣는다는 자가 나타났다니 무시하거나 죽이고 싶겠지.’
문제는 그자가 다름 아닌 악인 사냥꾼이라는 악살신괴라고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명목상 자신은 요화귀를 쫓는 입장이었으니까.
더구나 악살신괴의 말에 따르면 진짜 진백천이 요화귀를 죽이라 명한 것이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놀랄 일이었다.
“자네…… 이곳에 회주님이 머무르는 것을 알고 있었나?”
“정확한 장소는 몰랐습니다. 이곳에 오고 나서야 알았죠.”
“그렇군. 그래도 다행이야. 악살신괴가 도와준다면 요화귀라는 놈을 잡는 것도 시간문제겠군. 혹시 그자의 위치도 파악했나?”
“마찬가지로 이곳에 오고 나서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술잔을 내려놓으며 은은한 목소리로 물었다.
“……회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진백천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말아 올라갔다.
* * *
요화귀는 무척이나 심경이 복잡했다.
황실에서 황제를 죽이고 흉내 내려던 것이 실패하고 겨우 잡은 기회였다.
‘악살신괴라니! 그 괴물 같은 놈이 정도회의 명령을 듣고 있었나?’
그 또한 악살신괴에게 붙잡혀 죽을뻔한 기억이 있었다.
그것이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나 아직까지도 낙인처럼 그때의 공포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악살신괴라고 해도 나를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아주 잠깐 마주쳤던 악인일 뿐이고 지금의 변장은 완벽했다.
무림대회 내내 진백천을 보며 털 하나까지도 기억해서 똑같이 만들었다.
심지어 어딘가 살짝 무례해 보이는 말투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천 무슨 생각하고 있어?”
요화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빛의 살기를 지우고 따스함을 가장했다.
그의 시선에 곧 차를 따르는 고유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여자.
그리고 자신을 황제가 있는 곳까지 데려갈 여자였다.
“아아. 별거 아니야. 그냥 옛 생각이 나서.”
“옛 생각?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맞아. 참으로 감동적이었지?”
무심결에 한 말에 고유빈의 미간이 살짝 떨렸다.
눈치가 빠른 요화귀는 그런 변화를 파악하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만날 거라 예상이나 했겠어?”
“……그건 맞아.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를 꿈속에서 본다니까. 백천이 고루혈마를 물리치고 나를 구하던 때를 말이야.”
요화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듯 자연스레 화제를 넘어갔다.
‘쯧. 그나저나 이 진백천이라는 놈은 대체 얼마나 강한거냐. 고루혈마 뿐만 아니라 보이는 족족 박살 내다니.’
흉내 내기를 위해서는 그자에 대해 연구하고 알아내는 것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진백천은 가히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자였다.
가는 곳마다 폭풍을 끌고 다니듯 전부 박살 내며 상대를 뭉개 버렸다.
오죽하면 요화귀마저도 진백천과는 절대 마주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유빈. 이제 슬슬 북경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요화귀인지 뭔지 하는 놈이 있어서 위험하잖아.”
“아직은 괜찮아. 그리고 옆에 백천이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나는 이제 곧 정마대전을 준비하러 정도회로 돌아가야 돼. 그전에 황실로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
그 말에 유빈이 감동한 듯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서 알았다고 대답해라. 너와의 소꿉놀이도 이제 슬슬 지쳐 가려니까!’
또한 요화귀가 그녀 옆에 계속해서 붙어 있는 이유였다.
공주와 함께 황실로 들어가면 황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물론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지 않았다.
더구나 진짜 진백천은 폐관 중이니 걸릴 이유도 없었고.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하며 고유빈의 대답을 강요했다.
“흐음. 그것도 맞는 말이야. 알았어. 어차피 황실상단의 일도 슬슬 마무리 지었으니 돌아가 볼까?”
“그래. 잘 생각했어.”
요화귀가 진백천의 얼굴로 한없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회주님. 장우량입니다.”
“……들어와.”
장우량 교위는 원래 진백천과 친분이 있어서 상당히 까다로운 자였다.
더구나 요화귀로써는 제일 싫어하는 감이 있는 자로서 일부로 사이를 멀리 두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섰다.
한 명은 장우량,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진백천이었다.
요화귀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진백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는 누구…….”
하지만 그 질문보다 앞서 진백천의 자기소개가 더 빨랐다.
“회주님. 이곳에서 다시 뵙다니 의외군요.”
“……악살신괴?”
“네. 맞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능글맞은 그의 질문에 요화귀의 얼굴이 잘게 떨렸다.
이미 악살신괴과 마주쳤던 그였다.
놈은 황노라는 자와 항상 함께 다녔으며 전신이 칼처럼 생각될 정도로 날카로웠다.
‘……네놈은 누군데 악살신괴를 흉내 내는 거냐!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러한 질문은 차마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놈이 가짜든 진짜든 간에 괜히 파헤치다간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 위험도 있었으니까.
* * *
‘황노라. 악살신괴를 이미 만나봤단 말이지?’
놈의 속마음을 들은 진백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 요화귀라는 놈, 변장술은 그렇다 치고 꽤나 재밌는 놈이었다.
뻔뻔하게 자신을 흉내를 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고유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놈에게 호무살을 쏘아 보낼 뻔했다.
“흐음. 그나저나 자네가 여기 무슨 일이지? 분명 내가…….”
“요화귀를 붙잡으라 명령하셨죠. 놈이 여기 근처에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럴 리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십대악인 중 남녀쌍귀를 잡아 죽였는데 놈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요화귀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녀쌍귀의 부골오백조는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뻔뻔히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악살신괴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사실일까? 남녀쌍귀는 무공뿐만 아니라 신법 또한 무시 못 할 텐데?
하지만 곧 장우량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자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가짜 놈의 정체는 몰라도 실력은 확실하다. 아니, 어쩌면 진짜 진백천이 가짜로 만들어낸 악살신괴일지도 모르지. 우선은 그냥 그런 척 넘어가야 한다. 황실에 들어갈 때지만 안 들키면 돼.
역시 놈의 목표는 여전히 황제였다.
어떻게든 황제가 되어 살아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딱히 마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 특이한 악인에 지나지 않는 놈이었다.
진백천은 놈을 이 자리에서 곧바로 잡아채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는 물론이고 요화귀에 대해 확실히 알아낼 때까지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남녀쌍귀마저도 이자의 술법이 대단하다 했으니 혹시 뒤로 괴이한 짓을 해놨을지도 모르니까.’
술법에 관한 것은 자신보다 도홍경이 있으니 그가 알아볼 동안 잠시 지켜보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새벽 내 성내를 둘러본 도홍경은 흥분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형님 말대로 놈은 도사, 아니 술법사입니다.”
“술법사?”
“네. 그것도 꽤나 제대로 배운 놈이에요. 아무래도 좌도방문 쪽인 것 같은데 정확한 출신은 저도 모르겠어요.”
도홍경과 다른 점은 놈은 부적 대신 사물에 주술을 걸었다.
주로 주술이 걸려있는 곳은 고유빈이 머물고 있는 전각이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곳을 폭발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고유빈 공주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어요.”
“어땠는데?”
“심하지는 않지만 술법을 시도한 흔적이 보여요. 아무래도 그 술법사가 뭔 짓을 하려 한 것 같은데 제대로 통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혹시 몰라서 공주의 몸에 제 부적을 넣어놨으니 걸릴 일은 없을 거예요.”
“……잘했다.”
진백천은 이를 악다물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뛰쳐들어가 쥐잡듯 잡아내고 싶었지만 서둘렀다가 놓치기라도 한다면 더 큰 일이었다.
적어도 도홍경이 준비되고 확실히 놈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면 준비가 끝나?”
“놈이 술법을 펼친 곳보다 더 넓게 진법을 펼치고 준비한다고 하면…… 한나절이면 가능할 거예요.”
“그래. 돈은 아끼지 말고 팍팍 써.”
진백천은 품속에서 잡히는 대로 전표를 꺼내 건넸다.
도홍경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사랑합니다. 물주님!”
‘후우. 그러면 그동안 나는 나대로 준비를 해볼까?’
진백천은 은형비단(隱形緋緞)을 뒤집어쓰고 고유빈이 머무는 전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을 향해 자신의 기운을 쏘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은은한 적발에 허리춤에 쌍검을 찬 여자였다.
옷 안으로 드러난 갑옷은 역시나 금의위들이 입는 특유의 칼을 문 적룡(赤龍)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홍적란.’
황제를 지키는 은영사검(隱影四劍) 중 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