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67화
91장 요화귀(妖火鬼)와 고유빈(1)
정2품 표기장군(驃騎將軍).
100명의 관군을 징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반역도들을 소탕하고자 황제가 내려준 직위였다.
그리고 이러한 직위를 받은 것은 단연 진백천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장우량이 말하는 ‘공주님과 표기장군이 함께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 조금은 어려웠다.
‘…….’
자리를 떠나려던 진백천은 곧바로 생각을 바꿔서 장우량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경황 중에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흐음. 자네는 누구지?”
장우량의 시선에서 경계심이 보였다.
하지만 곧 황표가 앞으로 나서며 대신 그를 소개했다.
“이분들은 정도회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정도회에서?”
진백천에 대한 호의 탓인지 정도회라는 말에 두 눈에 담긴 경계심이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이 먼 곳까지 정도회에서 무슨 일로?”
“황보세가에 조의를 표하러 오셨답니다.”
“아아. 그렇군.”
황충을 떠올린 장우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회주께서도 그 일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지.
하지만 관심과 호의는 딱 거기까지였다.
진백천은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은근슬쩍 장우량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주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남진무사 장우량 금의위.”
“흐음? 나에 대해 회주께서 이야기하셨나?”
“물론이죠. 사천에서부터 신세를 지고 화산파와 황실에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장우량은 제법 놀란 듯 보였다.
화산과 황실은 그렇다 쳐도 사천에서의 일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일이었다.
“회주님과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장우량의 질문에 진백천은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오히려 황표가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악살신괴라는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그가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장우량은 더더욱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전부 진백천의 예상대로였다.
“폐관수련에 들어가시기 전에 잠깐 술잔을 주고받던 사이였습니다.”
“그렇군.”
-흐음. 각별하다고 하지만 폐관수련을 하고 밖을 주유하는 것을 모르면 정말 모두를 속이고 나오셨나 보군.
그의 속마음을 들은 진백천은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장우량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궁금하시다면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을? 내가 자네와 딱히 그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장우량 금의위께서는 그럴 이유가 없어도 저는 조금 있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지?”
-요화귀를 찾는 중 아니십니까?
그의 전음에 장우량이 눈에 띌 정도로 당황했다.
이 사실은 그를 포함해 몇 금의위들과 황실만 아는 극비사항이었다.
무인 중에서는 아는 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 그가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아무래도 자네 정체에 대해 들어야겠어. 그렇지 않는다면…….”
“다시 소개해 드리죠. 악살신괴(惡殺神魁)라고 합니다.”
이제 사칭에도 제법 뻔뻔해진 진백천이었다.
그에 반해 너무 쉽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서 그럴까?
황표와 도홍경은 놀란 눈치였다.
그런 주변의 반응을 살핀 장우량은 그것이 곧 사실임을 깨달았다.
“악살신괴라. 아무래도 술 한잔이 필요하겠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지금 바로 갈까?”
“그렇기에는 제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오늘 저녁에 제가 찾아뵙도록 하죠.”
장우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백천이 물러나자 남은 이야기는 황표와 하려는 것인지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우선은 남녀쌍귀의 은신처부터 살피자. 부골오백조(腐骨五白爪)의 비급을 획득하는 게 먼저야.’
혹시라도 모르는 이의 손에 흘러갔다가 또 다른 악인이 태어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은신처로 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홍경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뒤따르는 중혁과 도홍경은 어딘지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쳐다봐?”
“아니, 그게 조금 이상해서 말이죠.”
“뭐가?”
지금까지 신분을 속이고 감추려던 것과 다르게 먼저 악살신괴라 밝히며 장우량에게 다가간 것이 이상했다.
더구나 상대는 금의위였다.
“아아. 그거? 누가 사칭하는 놈이 있나 보더라고.”
“악살신괴를 말입니까? 아니면 무명악인?”
“아니. 그 둘 말고 진짜 진백천 말이야. 그것도 뻔뻔하게 금의위들까지 속이면서.”
“허허. 세상에 옛말 틀린 말 없다더니 역시.”
도홍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했다.
인과응보니 뭐니 중얼거리는 모습이 사칭을 하니 똑같이 사칭을 당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쯧. 헛소리 말고 비급부터 찾아.”
“네. 알겠습니다. 악살신괴님. 아니지. 무명악인 진백천 형님.”
진백천이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려 하자 도홍경이 놀란 날파리처럼 후욱- 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중혁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진백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는 저런 못된 놈한테 물들지 마라. 알았지?”
“……늦었습니다.”
그 말을 뒤로 중혁도 몸을 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 * *
남녀쌍귀의 동굴은 생각보다 깊숙이까지 이어졌다.
도홍경이 몰래 따라 들어왔을 때 본 것은 겨우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
“우선 비급부터 찾아. 괜히 이상한 거 있어도 건들지 말고.”
하지만 막상 동굴을 둘러보자 관과 그 안에 담긴 사체를 제외하면 별달리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가장 안쪽에 동굴과 어울리지 않는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남녀쌍귀 한 쌍이 얼마나 질펀하게 놀았는지 더러운 흔적만 가득했다.
“별거 없는데요? 음식도 해 먹지 않고 벽곡단 같은 걸로 해결했나 봅니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는 눅진한 향을 풍기는 벽곡단이 잔뜩 들어 있었다.
“흐음. 혹시 일부로 아무것도 없는 이곳으로 유인한 거 아닐까요?”
“반쯤 미친 상황에서 그럴 여유는 없었을 거야.”
진백천의 감에는 왠지 자꾸 이곳에 뭔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뭔가를 숨긴다고 하면…….’
그의 시선이 동굴을 빠르게 훑었다.
나무관들과 더럽혀진 침대.
둘 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건들고 싶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곳에 물건을 더 숨겨놓겠지.’
진백천은 나무 관으로 다가가 전부 옆으로 뒤집어엎었다.
콰득-
나무관이 충격과 흙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
그 안에 담겨있던 흙과 썩은 시체가 바닥에 퍼지며 역한 냄새를 풍겼다.
“전부 나무관을 뒤집어.”
하지만 진백천이 살피는 것은 그 안의 내용물이 아니었다.
나무관이 가리고 있던 바닥이었다.
바닥을 더듬거리던 그는 미세한 틈이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흡(吸)자결의 내력으로 땅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드드드득-
그러자 바닥 밑쪽에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금자를 비롯해 남녀쌍귀가 그동안 죽인 희생자들에게서 갈취한 것으로 보이는 보물이 쌓여 있었다.
“……와아. 형님. 이제 놀랍지도 않습니다.”
“뭐가?”
“……형님이 이렇게 바닥에서 돈을 줍는 것 말입니다. 누구는 평생을 노력해도 집 하나 사기 어려운데…….”
“헛소리 말고 다른 곳도 있는지 찾아봐.”
진백천은 하나도 남김없이 돈과 보물을 보따리에 옮겨 담았다.
품속에 넣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급은 보이지 않았다.
“회주님! 여기에도 공간이 있습니다!”
중혁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나무관의 밑을 살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를 밀어내고 바닥을 살폈더니 그곳에서 틈이 존재했다.
나무관 밑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고 있는 돌이 길고 넓었다.
“비켜봐.”
진백천은 독고구검을 꺼내 바닥을 네모로 그었다.
그러자 구멍이 뚫리며 아래로 향하는 구멍이 생겨났다.
얼핏 보이는 시야로 벽면에 붙어 있는 횃불을 보면 꽤나 넓은 공간인 듯 보였다.
“도홍경 안에 기관진식이라도 있나 살펴봐.”
“네.”
도홍경이 부적을 흩날리자 불이 붙으며 안쪽으로 날아갔다.
위쪽과 다르게 아래쪽으로 무척이나 깨끗했다.
굳이 말하자면 고급 객잔 같은 분위기였다.
“함정은 없어 보여요. 누가 이곳에 들어올 거라 생각 못 한 모양인데요.”
일행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벽면에 붙어 있는 횃불에 불을 밝히자 어둠이 물러나며 안쪽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득 쌓인 사람의 두개골이었다.
그 수가 족히 수백 개에 이를 정도였다.
“흐음. 누가 미친놈들 아니랄까 봐 미친 짓을 아주 단단히 했어.”
하나같이 머리에 다섯 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면 전부 부골오백조(腐骨五白爪)에 희생된 자들이었다.
마치 제단처럼 쌓인 해골 한 가운데 진백천이 찾던 비급이 보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부골오백조의 비급은 그 사특한 무공답게 비급조차도 평범하지 않았다.
“이거 사람 가죽으로 만들어졌군.”
방부제 처리를 한 사람의 가죽을 일일이 꿰매서 책자로 만들었다.
진백천은 훑어보듯이 무공을 살펴보고는 바로 덮어버렸다.
괜히 자세히 읽어봤다가 머리에 남을까 끔찍했다.
“더 챙길 거 있나 둘러봐.”
위쪽의 보물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아래쪽에는 별거 없었다.
옷 따위가 전부였다.
“끔찍한 곳이니 전부 불태워 버려야겠어.”
“동감입니다.”
진백천은 옷가지를 전부 모으고 거기에 내력을 일으켜 불을 지폈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부골오백조의 비급은 혹시 불길에 타지 않을지도 모르니 일일이 낱장으로 찢어서 불길에 던졌다.
살가죽이 비명을 지르듯 꿈틀거리며 타들어 갔다.
그렇게 한 장도 남김없이 태운 후에야 동굴을 빠져나왔다.
“후우. 이 불길로 희생자들의 넋이 조금은 위로가 될지.”
“남녀쌍귀도 죽었을 테니 조금은 만족하지 않을까요.”
“글쎄.”
진백천은 괜시리 씁쓸해짐을 느끼며 황보세가로 돌아갔다.
장우량과 대화를 나누던 황표는 이미 돌아온 후였다.
“오셨습니까!”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진백천을 맞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백천 덕분에 금지(禁地)를 정화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문젯거리였던 악인들도 붙잡았다.
“낭랑인지 하는 그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백천의 물음에 황보풍은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그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충분히 고통을 받다 죽었으니 말일세.”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황보세가를 도와준 값을 어떻게 치를지 모르겠군.”
“값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보풍은 진백천의 말에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금의위와 만나기로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금의위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네.”
황보세가에서 십대악인 중 하나라는 남녀쌍귀를 처치했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아무래도 자네가 그 금의위를 만나기로 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맞습니다.”
“그렇다면 황표와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붙여줄 테니 부디 꺼리지 말고 함께 손을 나누게.”
아마도 진백천이 대가를 바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미리 이렇게 조치를 취한 듯 보였다.
이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우리야말로 고맙지. 지금이 아니라도 문제가 생기면 찾아오게. 정도회라면, 아니,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진백천은 마지막까지 푸근함을 느끼며 황보세가를 벗어났다.
장우량이 머무는 성내로 향하는 일행은 황표를 비롯해 황보세가의 무인들로 제법 늘어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