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62화
89장 뒤쫓는 자들
악인회(惡人會).
소악마라 불리는 남자는 과연 그 별명답게 몸이 작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서늘하게 풍기는 눈빛은 칼날 같았고, 익살스러움과 반쯤 섞인 분노는 충동적인 그의 성격을 잘 드러냈다.
“각다귀(角多鬼). 동월루가 무너졌다고?”
“……네. 그렇습니다.”
“인육귀가 멍청이 같아도 쉽게 죽을 놈은 아닌데. 누구 짓이야?”
소악마의 시선이 유난히 큰 남자에게로 향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우뚝 솟은 키와 기다란 팔다리가 기괴하게 느껴지는 자였다.
각다귀는 뭐라 대답할지 눈을 빠르게 굴렸다.
아직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하니 누구라도 이름을 꺼내놔야 했다.
어차피 지금 소악마가 원하는 것은 분풀이였으니까.
“……악살신괴(惡殺神魁)입니다.”
“뭐? 식괴를 죽인 그놈? 또 우리 일을 방해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얼마 전 안휘성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면서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쯧. 그놈은 까다로운데…….”
마음 같아선 악인들로 하여금 놈을 죽여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의 수하들 중에서는 악살신괴를 상대할 만한 자들이 많지 않았다.
“남녀쌍귀(男女雙鬼)도 아직 안 되고, 음양노귀(淫羊老鬼)는 갔다가 괜히 피만 보고 말겠지. 각다귀. 네가 한번 상대해 볼래?”
각다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자신이 없는지 헛기침만 내뱉었다.
그 모습에 소악마가 얼굴을 찌푸리며 상을 내리쳤다.
콰앙!
“쓸모없는 놈들! 동월루도 잃고! 자존심도 상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너희들은 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 정도회의 충부대군(忠斧大軍)이나 쌍수미랑(雙手美狼)의 반 정도만이라도 하란 말이야!”
소악마는 의외로 정도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렇기에 악인회라는 단체도 만들고 떠도는 놈들을 규합해서 제법 자리도 잡았다.
문제는 그 태생이 어딜 가지 않는지 문제만 일으키고 만족감이란 전혀 없었다.
“멍청한 놈들! 비천귀(飛天鬼)!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구악정을 살펴보고 악인회로 끌어들일 수 있으면 하라는 말씀 말이시죠?”
간신처럼 난 수염을 가진 남자가 대답했다.
생긴 것뿐만 아니라 고개를 넙죽 숙이며 행동하는 것이 간신배와 비슷했다.
오죽하면 소악마도 처음 이름을 지어줄 때 비천귀가 아니라 간신귀라고 지어주려 했으니.
비천귀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크흠! 그럼 위대하신 악인회의 회주님이신 소악마님께 월례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흐음. 좋아.”
소악마는 그런 공손한 자세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구악정의 잔당들은 정도회의 혈사(血史) 이후 꽁지 빠지게 십만대산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저 비천귀가 누굽니까? 이 강철같은 다리로 그들을 직접 쫓아 대화를 나눴습니다!”
“내가 하라는 말은 전했어?”
“물론입니다! 비루하고 저물어가는 마교 따위 져버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악인회의 종자가 되어 한 몸 바치라고 똑똑히 전했습니다.”
어딘가 그가 원한 방향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니 점점 기대감이 생겨났다.
“호오. 그랬더니? 내게 충성을 바친다던?”
“거절했습니다.”
“……뭐?”
소악마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간신배가 같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 건방진 놈들이 마교를 무시했다면서 감히 악인회를 욕하며 저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친히 놈들의 눈알을 뽑고 다리를 분질러서…….”
“야. 쟤 잡아.”
소악마는 더는 참지 못하고 소매를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악인들이 비천귀를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어엇. 소, 소악마님?”
“이 새끼들이 내가 길거리 거렁뱅이들 거둬들여서 먹이고 재우고 했더니 막 나가자는 거지?”
“……악인곡에 있던 저희를 억지로 끄집어낸 게…….”
소악마는 비천귀의 명치를 세게 때리며 더는 말하지 못하게 했다.
비위를 잘 맞추다가도 어느 때 보면 제일 얄미워지는 놈이었다.
“내가 너희들한테 큰 거 바라는 거냐? 그냥 적당히 정도회만큼만 하자는 거잖아! 그게 어려워?”
“……어렵습…… 크헙!”
비천귀는 이번에도 말대꾸를 하려다 각다귀에게 입이 막혔다.
“쯧쯧. 애초에 너희들한테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다들 흩어져!”
소악마는 탁상을 큰 소리 나게 발로 차고 나가버렸다.
남아 있는 악인들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어휴. 성질머리 더럽기는.”
“저번처럼 또 듣고 있을 수도 있으니 입조심 해라.”
“아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갔다.”
여기 모인 악인들은 하나같이 전부 얼마 전까지 악인곡에 있던 자들이었다.
그에게 하나둘씩 은혜를 받으며 전부 소악마를 따르게 되었다.
물론 악인들 따위에게 은혜야 물 버리듯 쏟아낼 수 있지만, 소악마는 조금 달랐다.
악인곡에서 태어나 그들의 무공을 이어받았으며 애지중지 키운 자식과 다름없었다.
“……자식이 애비 명치를 때리다니.”
“비천귀 네놈이 왜 애비냐? 동네 바보형이면 몰라도.”
“그건 그렇지.”
소악마는 악인곡에서도 놀란 만큼 대단한 기재였다.
어린 나이에 독공(毒功)을 비롯해 검법(劍法), 도법(刀法), 지법(指法), 기관진식(機關陣式)과 같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흡수했다.
그 후에는 오히려 악인들에게 무공을 훈수 둘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소악마가 한 차례 더 변한 것은 식귀 때문이었다.
“그놈이 개 버릇 못 주고 기괴한 심장으로 요리한 마두 말하는 거지?”
그 만두를 소악마가 먹었고 한동안은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족족 죽여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게 꼬박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래도 그 만두를 먹고 나서 무공이 급격하게 늘긴 했지.”
단순히 늘었다고 말하기에는 환골탈태와 비슷했다.
악살신괴가 만들어놓은 진법을 가볍게 파훼했을 뿐만 아니라 악인들을 이끌고 강호로 나왔다.
아직까지도 강호는 그들이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소악마는 웬일인지 정도회에 관심을 가지며 진백천처럼 되고 싶어 했다.
“으휴. 언제쯤이면 이런 소꿉놀이가 끝날지.”
“내 살다 살다 악인곡이 편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그들이 작은 목소리로 궁시렁궁시렁대자 저 멀리서 내력이 담긴 웅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장 안 흩어지지?!”
“……봐봐! 소악마가 듣고 있을 거라 했지?”
그들은 발에 불이 난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동월루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꽤나 오랜 시간 회자되었다.
그곳이 원래 무엇을 하던 곳인지 아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덕분에 바빠진 것은 악살신괴였다.
“흐음. 인육귀가 하던 곳이었단 말이지?”
황노가 잔해물에서 가져온 것은 인육귀가 사용하던 기형창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따로 조사한 것들을 합치니 여러 굵직한 줄기가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무명악인 권진을 추적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혹시 관련 있는 건가?”
“끌끌. 아닙니다. 동월루의 아이들을 구한 것도, 인육귀를 죽인 것도 도홍경이라는 자입니다.”
“도홍경?”
“현재는 멸문(滅門)한 모산파의 도사로 진백천 회주의 친한 동생이라고 합니다.”
악살신괴는 진백천의 이름이 나오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감흥이 별로 없는 그조차도 진백천이나 정도회의 이름이 나오면 크게 반응했다.
“역시 진백천이라 이건가. 폐관수련을 하는 도중에도 강호를 위해 자신의 사람들을 움직일 줄이야. 참으로 본받을 점이 많아.”
“맞습니다. 귀인(貴人)입니다.”
칭찬에 인색한 황노마저 진백천은 인정했다.
그의 선행에는 도저히 따로 의심을 품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때로는 아둔해 보일 정도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이번의 유접원(留接院)의 경우처럼.
“후우. 그렇다면 이곳에서 식인을 즐겼던 놈들은 악살신괴의 이름으로 처리할까 하는데 황노 생각은?”
“그러실 줄 알고 그들의 신상도 전부 파악해놨습니다.”
“역시 황노야.”
다음 날.
가뜩이나 동월루의 매몰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던 강소성은 또 한 번 시끄러워졌다.
강소성의 고관대작들뿐만 아니라 꽤나 이름값 있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목이 베인 채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피로 적힌 서신이 덮여 있었다.
[인육을 한 죄.]
관군들은 그 사실을 무마하려 했지만 인육이라는 단어는 호사가들 사이로 흘러들었고 결국 강호는 또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 건은 힘든 인간성을 상실한 사건임만큼 황실에서도 대대적으로 조사를 명했다.
안휘성을 덮쳤던 금의위들이 복귀할 것도 없이 곧바로 강소성으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하옥되고 처형당하는 등,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 * *
그 시간.
그 모든 것의 단초가 된 진백천은 한가로이 마차에 앉아 풍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당소예가 보따리에 넣어준 육포가 들려 있었다.
“하아. 날씨 한 번 좋네. 슬슬 따듯한 바람이 부는 것 같지 않아?”
“그렇다고 하기에는 물이 너무 쉽게 어는데요?”
도홍경은 자신의 수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동월루를 무너뜨린 그들은 즉시 마차를 빌려 강소성을 빠져나갔다.
괜히 그곳에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아이들도 이미 정도회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도홍경 너는 어째 낭만이 없냐?”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을 살폈다.
눈이 제법 녹고 곳곳에서 새싹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왠지 눈을 떼기 힘들었다.
추위를 뚫고 자라나는 새싹들을 자기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고 눈시울이 자연스럽게…….
“그거 갱년기예요.”
“…….”
“해가 뜨는 것만 봐도 막 가슴이 뭉클해지고. 맞죠? 그거 나이 꽤나 먹은 사람들이나 겪는 건데 형님은 왜 벌써부터…….”
“시끄러워.”
사실 회귀할 때의 나이까지 생각해 보면 그의 나이는 손가락, 발가락을 다 더해도 세기 어려웠다.
갱년기는 물론 갱년기 할아버지가 왔다고 해도 당연할 나이였다.
‘쯧. 그래서 요즘에 쓸데없이 감상적으로 변한 건가?’
진백천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쳐다봤다.
길게 뻗은 도로는 파도처럼 굽이치며 산속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현재 통하고 있는 곳은 장청(長淸)이라는 지역으로 강소성을 지나 산동성으로 진입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형님. 산동에서 배를 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
“그런데 왜 내륙 쪽으로 가시는 거예요?”
“산동에 온 김에 꼭 들려야 할 곳이 있거든.”
그들이 지나는 이 길을 쭉 앞으로 나아가면 산동성의 중심인 제남(齊南)이었다.
성도를 구경하겠다거나 하는 실없는 생각은 결코 아니고 그곳에 위치한 황보세가 때문이었다.
‘이곳까지 왔는데 황충의 묘는 가봐야지.’
황충이 죽고 장례는 정도회에서 치렀지만 유골은 황보세가에 안치했다.
그 후로 한 번도 와보지 못했으나 기회가 된다면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여기 와봤었지?”
“네.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요.”
도홍경은 진백천의 명을 받아 황보세가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도복편왕(逃蝠翩王)을 만나 끈질기게 쫓겼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밤새 자지도 않고 피를 빨겠다면서 쫓아오던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 선명하다니까요.”
“그자의 경공이 제법 대단하긴 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마차는 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드디어 멀지 않은 곳에 황보세가의 곧게 솟은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