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58화
88장 흑점(黑店)(3)
“대가…… 말씀이십니까.”
사람을 돕는 데는 아무런 이유와 대가도 필요 없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동등하게 선 입장이라면 몰라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은 당장 내일보다 오늘이 급했다.
씨앗을 주면 땅에 심어 곡식을 가꾸기보다 당장의 배고픔을 잊기 위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줄 테니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얼핏 보면 참으로 잔인했다.
하지만 중혁은 진백천이 묻고자 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망가지지 않게 만드는 대가.
씨앗을 입이 아닌 땅에 심어 곡식으로 만들 대가였다.
“……소속감이면 충분합니다. 비를 피할 곳에 구정물 대신 우물물이라도 있으면 됩니다. 그런 소속감이라면 아이들을 충분히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겁니다. 물론 저 또한 말입니다.”
“소속감이라.”
진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혁을 얻는데 그만한 노력은 결코 큰 것도 아니었다.
그날 아침.
해가 뜨고 진백천은 일행과 함께 곧바로 동월루로 향했다.
일천루와 다르게 정문이 존재하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이건 세가라고 봐도 무방하겠는데?”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벼락이 높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만큼 구리다는 게 많다는 거지.”
당당히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중혁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쳐내려던 그는 꾀죄죄한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어제 그가 구해줬던 어린 여자애였다.
아이는 한참을 돌아다녔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송강 오라버니랑…… 다른 아이들이…… 전부…… 잡혀갔어요!”
“뭐?”
“동파육이…… 잡아갔어요!”
“어디로?”
아이는 손을 들어 동월루를 가리켰다.
* * *
동파육이 다시 나타난 것은 중혁이 가고 난 직후였다.
작정했는지 여러 사람과 함께 나타나서 닥치는 대로 아이들을 납치해갔다.
반항하는 아이들을 패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우선 안전한데 숨어 있어.”
“……저도 같이 갈래요.”
“위험해.”
중혁의 말에도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보며 진백천이 나섰다.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덩달아 우리까지 위험해질 거야. 그러니 말을 들어.”
아이는 단호한 말에 그제서야 울먹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꼬, 꼭 구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라.”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골목길로 사라졌다.
“흐음. 전부 다 강제로 끌고 가다니 흑점 놈들이 뭐가 이렇게 노골적이지?”
“단순히 흑점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어휴.”
도홍경은 소름 끼친다는 듯이 팔을 쓸어내렸다.
진백천은 그의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마기는 아니었지만 사기가 잔뜩 벤 곳이다.
보통 피를 많이 흘린 전쟁터에서 느껴질 것들이 한낱 음식점에서 전해졌다.
“들어가자.”
진백천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동월루는 높은 담으로 쳐진 만큼 안쪽도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분위기였다.
처음 보는 듯한 이국적인 나무들이 머리 높이까지 심어져 있었고 곳곳에서 무인들이 삼엄하게 경계했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안내인이 꾸벅 인사했다.
“세 분이십니까?”
“맞아.”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진백천은 그를 따라가며 장원을 구경했다.
나무가 워낙 많이 심어져서 한눈에 장원 내부의 구조를 알 수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보통의 음식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웠다.
“식당은 이쪽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다른 이들은 반대편으로 가길래.”
“곳곳에 별채가 존재합니다. 빈자리가 나는 순서대로 안내해 드리니 전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안내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들이 안내받은 곳은 대나무가 즐비하게 꽂혀 있는 곳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곳에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흐음. 사람이 너무 많은데? 조용한 곳은 없나?”
진백천은 품속에서 은자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안내인은 진즉에 말하지라는 표정으로 더 깊숙이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방 구조로 된 곳이었다.
일천루와 비교해 별다른 바가 없었지만 조금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나무 탓인가?’
“주문은 어떻게……?”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던데.”
“흐음. 태호의 잉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훌륭하신 선택이십니다.”
“그런 거 말고 조금 더 특별한 것 없나?”
진백천의 물음에도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단전을 열어 속마음을 살펴도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잉어를 비롯해 술을 시키고 그를 물렀다.
“후우. 아무래도 여기는 정말 음식과 술이나 파는 곳인가 보네.”
“제가 주변을 살펴볼까요?”
“지금은 말고.”
괜히 바로 움직였다가 인원수가 줄어든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진백천은 식사가 들어올 때까지 상단전을 더욱 활짝 열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후우. 주변에 막힌 나무가 문제라면 뚫고 보면 그만이야.’
점점 시야가 옅게 흐려지며 그 뒤편도 보이기 시작했다.
진백천의 뇌리로 동월루 전각의 주요 모습이 그려졌다.
‘크다. 하지만 딱히 납치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지상을 살펴보던 진백천은 문득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곧 드러나는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여기군.’
지하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감옥이요?”
“응. 그것도 규모가 꽤나 커.”
만들어진 지는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발견되는 시체로 인해 문제가 되니 아예 처리장까지 따로 만든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어제 봤던 아이들이 갇혀 있었다.
“대체 이곳의 주인이 누구길래 이딴 짓을…… 허허.”
분명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도홍경은 진백천이 이곳에서 앉아서 지하까지 내려다본 사실을 깨닫고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형님. 정말 천리안이 있으셨던 겁니까?”
“흐음. 천리안까지는 아니고 비슷한 거야.”
도홍경이 더 뭐라 하려던 찰나에 음식들이 들어오며 식탁 위가 가득 찼다.
“부족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종을 흔들어주십시오.”
“그러지.”
점소이가 방을 나갔지만 진백천을 비롯해 그 누구도 산해진미를 건들지 않았다.
왠지 흑점의 음식이라고 생각하자 식욕이 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지하에 있을 아이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십대악인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 저계춘이라는 놈도 찾아야 돼.”
“이름만 들어보면 무척이나 뚱뚱할 것 같은데요?”
도홍경의 말에 진백천과 중혁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동파육이라 물리던 남자였다.
중혁은 그자가 인육귀(人肉鬼)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 주먹에도 당할 만큼 약했습니다. 그런 자가 십대악인일 리는 없습니다.”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었어. 실력도 감췄고. 혹시라도 그자를 마주치면 절대 방심하지 마.”
“……알겠습니다.”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아이들을 구하러 내려가는 중혁과 도홍경.
그리고 위에서 시선을 끌 진백천이었다.
“그래도 한번 봤던 중혁의 말이니 잘 따르겠지.”
“흐음. 형님. 다 함께 움직이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인육귀가 있다면 놈의 시선을 끌어야 하잖아. 왜? 지하에서 다 같이 죽도록 싸워보게?”
그것은 싫은 듯 도홍경이 고개를 저었다.
“둘이라면 조용히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소란은 걱정 말고. 아주 대차게 피워줄 테니.”
“…….”
진백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무명악인(無名惡人) 권진스러운 싸늘한 미소였다.
* * *
중혁과 도홍경이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 진백천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항상 예의만 차리고 깍듯하게 살아왔더니 막 나가는 것도 괜스레 떨리네.”
당소예나 황대원이 들었다면 두 눈을 부릅뜰 말이었지만 진백천은 진지했다.
스르릉-
종마검을 뽑아 들자 손끝이 찌릿하며 마기가 피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검신에 살의가 피어올랐지만, 이번만큼은 딱히 억누르지 않았다.
종마검의 살의가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대나무 사이에 쉬고 있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퍼드드득-
그리고 놀란 것은 새들뿐만이 아니었다.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이나 동월루의 무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손을 덜덜 떨며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이런 살기를……?”
진백천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이때다 싶어 종마검을 크게 휘둘렀다.
스으윽-
주변의 대나무들이 사선으로 잘려나가며 순식간에 시야가 넓어졌다.
“어휴. 이제야 조금 답답한 게 사라지네. 안 그래?”
그의 질문에 사람들은 그제서야 도망치기 시작했다.
“검, 검을 들었잖아!”
“동월루의 무인들은 뭐 하는 거야! 당장 막으라고!”
사람들의 외침에 동월루의 무인들이 무기를 뽑아 들며 진백천에게 다가갔다.
“손님. 취하신 것 같은데…….”
“안 취했는데? 한잔도 안 마셨어.”
“……그러면 왜 대체?”
“대나무가 답답하잖아. 안 그래?”
진백천의 말에 동월루의 무인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자들은 있었어도 이렇게 답답하다며 대나무를 자르는 미친놈은 없었다.
“……대나무 값은…….”
“배상할게. 그러니까 비켜볼래? 안 그럼 너도 베인다.”
진백천은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살의와 함께 뻗어 나간 검기가 뒤편의 대나무를 우수수 베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을 잃지 않은 검기는 담벼락마저 무너뜨렸다.
“허허. 힘 조절 잘못했네. 저것도 물어줄게.”
“…….”
장난스럽게 웃는 보며 무인들은 그제서야 진백천이 그들을 가지고서 장난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며 진백천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단순히 돈만으로는 배상하기 힘들겠습니다.”
“그러면 뭐? 나보고 몸이라도 바치라고?”
“팔 하나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글쎄. 마음대로 해봐. 나는 나대로…… 답답한 것들을 베어낼 테니.”
무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단숨에 진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법 호흡이 잘 맞는 합격(合擊)이었지만 문제는 상대였다.
진백천은 물 흐르듯 공격을 피해내며 검을 휘둘렀다.
“막아…… 라?”
검을 막으려던 무인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검로는 그에게서 멀찍이 벗어났다.
대신 잘려나간 것은 전각 앞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적송(赤松)이었다.
쩌저적-
족히 수백 년 이상 자란 나무는 몸통이 잘려나가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허억! 주, 주인님이 아끼시는 나무를!”
“미, 미친! 저게 얼마짜린 줄이나 알고서 베는 것이냐!”
발작하듯 소리치는 이들과 달리 진백천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이 웃어댔다.
“하하하. 봐봐. 이제야 조금씩 달빛이 보이잖아? 가지치기를 얼마나 안 했으면 저렇게 하늘을 가려?”
몸통을 자른 것과 가지치기는 엄연히 달랐지만 진백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시선만 끌고 저들이 주인이라고 부른 자만 불러내면 그만이었다.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 이건가?’
그때 진백천의 눈에 쓰러진 적송 뒤로 또 다른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도 아닌 것이 꽤나 진귀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눈을 빛내며 그곳으로 걸어가자 무인들이 기겁하며 달려들었다.
“……저 나무들은 죽어도 안 된다!”
“당장 막아라!”
오죽하면 방금까지 진백천의 팔을 베어내겠다고 하던 무인은 진백천을 설득하려고 까지 했다.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전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쓰읍. 그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왜?”
진백천은 종마검을 재차 머리 위로 휘두르며 대답했다.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들거든.”
쩌저적!
나무들이 단숨에 베어져 나가며 거친 광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