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51화
85장 옥무기가 시켰어(3)
“살아남아 보라고?”
흑미령은 진백천이 오만하다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그 누구도 자신 앞에서 이런 식으로 도발하지 못했다.
더구나 마인들에게 휩싸여 있는 동안에는 더더욱.
“겨우 마인 몇 없앤 것치고 꽤나 건방지군!”
“누가 건방진 건지는 두고 봐야지.”
진백천은 담담하게 말하며 검 끝을 창처럼 들어 올렸다.
제법 거리가 있었음에도 흑미령은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역시나 이번에도 자신이 죽을 위기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는 것과 막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내력을 끌어올리자 전신에서 솟구친 붉은 기운이 검 끝으로 전해졌다.
진백천은 그대로 검을 흑미령에게 찔러넣었다.
만들어진 강기는 피의 뿔처럼 공간을 가르며 나아갔다.
제2초.
혈각시 시즉산(血角矢 屍卽散).
피의 뿔이 쏘아지니 시체가 흩어진다!
강기는 그대로 공간 자체를 찢어발기며 마인들을 집어삼켰다.
붉은 강기 만큼이나 붉은 피가 사방에 피어올랐다.
산산조각 나는 마인들 사이로 도망치는 흑미령의 모습이 보였다.
“막아라! 몸으로라도 막아!”
그녀의 외침에 섭혼술에 사로잡힌 마인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위험하다! 우선 도망쳐야 돼! 적어도 살왕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만이라도……!
‘살왕?’
진백천은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적당히 상대해 줬다면 이제는 아니었다.
살왕이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어떻게든 정보를 들어야 했다.
“흐음.”
진백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나며 쌍검을 휘둘렀다.
당황한 마인들은 그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흑미령은 그사이에 뒤편으로 난 통로로 도망치려 했다.
“……무명악인 권진! 네놈을 기억하마. 이제부터 잠을 자지도 못하고 잠시도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기대해라!”
“허어. 그런 말은 완벽히 도망가고 나서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진백천이 재차 검을 휘두르려 하자 흑미령의 앞으로 마인들이 인해의 벽을 세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공격이 아니었다.
호무살(虎武殺).
의념으로 만들어낸 비수가 허공을 갈랐다.
목표는 뒤돌아선 흑미령의 등이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마인들 사이를 비집고 날아갔다.
이번에도 흑미령은 움찔하며 몸을 비틀었다.
“허억!”
놀랍게도 붉은 피가 치솟으며 흑미령이 쓰러졌다.
평소보다 내력을 더 많이 쏟아부었지만 살점을 찢을 물리력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진백천은 단지 충격을 주고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어느 틈인가 마인들을 뿌리친 그는 통로 앞까지 도달했다.
“후우. 다행히 죽지는 않았네.”
흑미령은 그 짧은 틈에도 몸을 비틀어 심장이 꿰뚫리는 것을 피했다.
진백천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루주님!”
일화가 피를 토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작을 멈췄다.
“루주의 목이 꺾여서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다들 물러서라.”
“…….”
그들이 잠시 멈칫한 사이 진백천은 그녀를 통로 안쪽으로 집어 던지며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뒤쪽으로 물러나며 입구에 무너뜨렸다.
쿠구궁-
반대편에서 당황한 놈들의 아우성이 들려왔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한동안은 들어오지 못하겠지.”
그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시간이었으니까.
진백천은 손을 탁탁 털며 흑미령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통로의 벽에 몸을 걸치고 앉아 있었다.
치명상을 입어서인지 축 늘어진 상태였다.
“네놈은…… 대체 누구지?”
“무명악인 권진이잖아. 환야루의 루주 정도 되는 자치고는 너무 모르는 거 아니야?”
“웃기는군. 그자는 가면이겠지.”
진백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어렵게 만든 시간에 이딴 잡담을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질문을 하면 대답하면 돼. 간단하지?”
흑미령은 대답 따위 할거라 믿는 진백천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였다.
진백천은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빠르게 질문했다.
“안휘성의 성주를 쓰러뜨린 것도 네놈들 짓인 건 알겠는데. 목적이 뭐지? 단순히 거점 따위로 이렇게 귀찮게 할 이유는 없잖아?”
“손가락을 하나 자르면 알려주지.”
-겨우 거점 따위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 안휘성은 황실의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서 갖고 있는 패로 충분하다.
잔악한 말과 다르게 속마음은 순수한 아이처럼 성실히 대답했다.
‘결국 추후의 일까지 내다본 거라 이거군?’
역시나 마교는 옥무기를 성주에 앉히며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고독(蠱纛)을 사용하든 세뇌를 하든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운명이었다.
마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100만의 관군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는 없었다.
그런 관군을 막을 방법으로 가장 간단한 것이 바로 반역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황제는 서장의 반역세력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여기에 북경에 가까운 안휘성마저 반역에 동참한다면 꽤나 머리가 복잡해질 터였다.
“역시 입이 무겁네. 두 번째 질문. 마화린이 죽은 것에 대해 마교의 반응은?”
“질문이 우스워서 비웃음도 안 나오는군.”
-무능한 소교주 따위 몇 번을 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버려지는 패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단지 흑미령의 생각뿐이었고, 마뇌는 달랐다.
그녀는 마화린의 시체라도 어떻게든 빼내려 했다.
-소교주에게 뭔가 중요한 것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지.
흑미령은 정도회에서 혼자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뇌와 달리 그녀는 멍청한 소교주 따위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진백천에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마뇌는 소교주에게 천마의 심장이 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나 보군.’
다름 아닌 천마의 심장인데 마교에서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마지막이야. 살왕은 언제 오지?”
진백천의 담담한 질문에 흑미령조차 표정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
그의 입에서 살왕에 대한 것이 나오리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멍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진백천은 고소를 삼켰다.
“멍 때리지 말고 집중하지? 살왕은 언제 오냐니까?”
“……네놈이 어떻게 살왕에 대해 아는 거냐? 혹시 마교의 첩자……?”
하지만 흑미령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왕과의 연락은 루주인 그녀가 비밀리에 진행하던 것이었다.
이 사실은 아는 자라곤 자신과 살왕 둘뿐이었다.
-중간에 정보가 흘러나갔나? 그렇다면 더더욱 큰일이다. 환야루의 정보에 구멍이 있다는 것이니까!
“살왕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해주기로 했지?”
진백천은 흑미령을 살기로 짓누르며 물었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악다물었다.
-살왕이야말로 옥무기를 앞에 세우고 뒤로 움직일 흑막이 될 자. 새로운 혈막은 이곳에 자리 잡게 될 것이야. 정도회는 물론 황실까지 자신의 턱밑에서 비수가 날아와 꽂힐 거라 생각 못 하겠지!
이것은 흑미령의 말대로였다.
와해된 혈막이 다시 이곳에 자리 잡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백천은 이로써 알고 싶은 것들은 전부 알아냈다.
‘흑미령은 확실하게 치워야겠지.’
살려둔다면 꽤나 골치 아픈 적이 될 테니까.
손속에 내력을 싣자 이번에도 흑미령은 화들짝 놀라며 진백천을 올려다봤다.
눈빛에는 경계심이 잔뜩 깃들었다.
“……나를 죽인다 해도 환야루는 무너지지 않는다. 두 번째 루주가 나오고 또 세 번째. 네 번째가 이어지겠지!”
“알아. 원래 네놈들은 그러잖아.”
강호에 기루와 객잔이 존재하는 한 환야루의 뿌리는 뽑을 수 없었다.
하지만 흑미령을 죽이면 한동안은 혼란스러울 터였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잠깐! 무명악인 권진. 이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와 손을 잡는 게 어떻지?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마교와 함께라면…….”
“아쉽게도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단호한 거절이라 그럴까.
흑미령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봤다.
“내 목표가 마교라서 말이지.”
진백천의 얼굴이 잘게 떨리며 역용술로 바뀌어 있던 근육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러자 아주 잠시 그의 본 얼굴이 드러났다.
“……다, 당신은!”
“정도회에 멋대로 왔다 갔다며? 인사라도 하지. 그랬으면 이렇게 직접 찾아올 필요까진 없었잖아?”
스걱!
진백천은 흑미령이 흔들린 틈을 타 재빨리 그녀의 목을 베어냈다.
머리가 아래로 뚝 떨어질 동안 흑미령은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회주가 여기 왜……?
그는 혹시 몰라 떨어진 머리를 으깨고 몸을 토막 냈다.
마화린이 눈앞에서 부활하던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생긴 습관이었다.
‘살왕이라니. 제법 좋은 정보를 얻었어.’
진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루주의 사체에서 뭔가가 반짝이며 빛을 냈다.
‘뭐지?’
빛을 내는 것의 정체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였다.
각각 손가락에 끼워진 열 개의 반지들 사이에서 유난히 진백천의 시선을 끄는 것이 보였다.
은은히 빛나는 녹색의 옥 반지는 내력이 깃든 것이 한눈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경각옥(警覺獄)?’
피로 젖은 반지의 표면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풀어쓰자면 경계하는 옥- 이라는 뜻이었다.
‘혹시 내 공격을 미리 알고 피하던데 이것 때문인가?’
만약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진백천은 반지를 빼내 품속에 챙겼다.
그리고 곧 그의 신형이 어둠 속에 묻어나며 통로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어서 서둘러라! 루주께서 위험하시다!”
“기관진식 따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
반대편에서는 마인들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퍽이나 고맙게도 설치된 기관진식을 친히 몸으로 해체까지 해주었다.
다른 길이 없는 통로다 보니 진백천을 막다른 길에 쥐새끼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쯧. 아까 그렇게 당해놓고도 모르다니.’
진백천은 그들을 기습하려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손바닥을 검으로 긋고 흘러나오는 피를 통로 천정에 묻히며 나아갔다.
잔뜩 경계하며 내려오는 마인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은 진백천의 은형술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흑미령의 사체를 발견하기 전까지 거침없이 움직였다.
“루, 루주님께서 당하셨다!”
“무명악인을 찾아라!”
하지만 이미 그때쯤에는 진백천은 통로 밖까지 도달한 후였다.
유일하게 남은 그의 흔적은 길게 이어진 천장의 핏자국뿐이었다.
“거기까지 내려가는데 고생했다. 쯧.”
혈호폭 사천즉시(血湖爆 赦天卽尸).
피의 호수가 터지니 하늘마저 시체 앞에 엎드린다!
내력이 섞인 피는 곧 거품이 일며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이내 피할 새도 없이 격렬하게 폭발하며 천장을 무너뜨렸다.
콰아아아아앙!
“허억! 다, 다들 피해라!”
“통로에서 빠져나가!”
그들이 외치는 것은 단지 비명과 유언이 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퍼진 핏방울들과 낙석이 마인들을 집어삼켰다.
기다란 통로는 단 한 명의 탈출자도 없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통로 밖을 지키던 마인들 몇이 유일하게 남은 이들이었다.
진백천은 그들마저 제압하고 주변을 살폈다.
“……그나저나 여기는 또 어디냐?”
빽빽한 나무와 칠흑 같은 어둠이 그를 반겼다.
그 흔한 횃불마저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철마방(鐵劘房)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