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50화
85장 옥무기가 시켰어(2)
진백천은 기절한 옥무기를 들고 전각에서 빠져나갔다.
그를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겨두고 친히 은형비단으로 가려주기까지 했다.
앞으로 진백천이 하는 모든 행동은 그의 명대로 하는 것이었다.
“우선 꼬리부터 쫓아볼까?”
전각을 빠져나간 마차의 흔적을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백면질주(百面疾走).
전력으로 유령신법을 펼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산어귀로 도망치는 마차가 보였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미끼를 던지고 다른 곳에 숨었다 이거지?’
아마도 일화는 흑미령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백천은 자리에서 멈춰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상단전을 활짝 열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 지긋지긋한 철은 언제 대체…….
-후우…… 어서 집으로 가서 쉬고 싶…….
-……루주께 이 사실을 최대한 빨리…….
‘저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화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진백천은 재빨리 기척을 숨기며 그녀의 뒤를 귀신처럼 쫓아갔다.
흑미령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어미 쥐가 있는 곳까지 안내할 테니까.’
일화는 철마방의 외곽에 있는 건물 앞에 멈춰섰다.
지독한 쇠 냄새 사이로 분 향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주변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여기인가 보군.’
특정한 진법이 펼쳐져 있는지 일화는 복잡한 순서대로 땅을 밟으며 들어갔다.
진백천은 마치 그녀의 그림자처럼 뒤를 쫓았다.
“후우. 금비옥진(金扉獄陣)까지 뚫고 여기까지는 쉽게 들어오지 못하겠지.”
안심한 그녀는 그제서야 이를 악다물며 옥무기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감히 그런 식으로 우리를 배신하다니. 간댕이가 부어 미친 게 틀림없는 놈이야!”
그녀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지 계속해서 옥무기에 대한 욕을 해대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창고였지만 그 안은 화려했다.
마치 또 다른 건물이 하나 더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화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옥무기 공자가 배신했다. 야화가 죽었어!”
마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안쪽으로 모셨다.
진백천은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몸을 숨기며 그들을 뒤따랐다.
길게 늘어진 복도에는 족히 수십 명의 마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금비옥진과 같은 진법이나 기관진식 또한 여러 개를 거쳐야 했다.
흑미령이 얼마나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억지로 뚫으려 했다면 무조건 놓쳤을 거야.’
진백천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기척을 죽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도중에 사나운 개들이 입구를 지켜섰지만 진백천을 알아채지 못했다.
도홍경이 준 은형부(隱形符)와 은신부(隱身符) 덕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곳은 지하의 공동이었다.
수십 명의 마인과 함께 옥좌에는 흑미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떠날 채비를 마친 후였다.
‘저 여자가 환야루의 루주라 이거지?’
진백천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또 다른 대역일 수도 있으니 정체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추이를 지켜봤다.
“일화? 갑자기 무슨 일이지?”
“……루주님!”
일화는 흑미령 앞에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옥무기가 그들을 배신하고 환야루의 기생들을 죽였다는 말에 흑미령의 아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감히 그 버러지 같은 놈이! 루주님 지금 당장에라도 그놈을 찢어 죽여야 합니다!”
“성내에 있는 마인들이라면 그들을 전부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흑미령은 확실히 달랐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시끄럽던 장내의 소란이 뚝 그쳤다.
“야화를 죽인 자에 대해 설명해라.”
“……네. 루주님.”
일화는 진백천의 외모에 대해 소상히 말했다.
“눈이 좁고 편협하게 생긴 외모에 눈빛이 독사 같은 자였습니다. 손속도 거침없었으며 두 자루의 검을 메고 있었습니다.”
두 자루의 검이야 여비로 하나 더 들고 다닌다고 하면 된다고 하니 그다지 특이한 점은 아니었다.
흑미령은 단순히 외모에 대해 들은 것만으로도 여러 장의 용모파기를 그려 내보였다.
일화가 가장 닮은 얼굴을 짚자 점점 권진의 얼굴에 가까운 그림이 되어갔다.
“맞습니다! 이 자입니다! 더는 고칠 것 없이 확실합니다!”
흑미령은 완성된 그림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단순히 용모파기의 그림만으로도 무명악인 권진을 알아차렸다.
과연 밤을 지배하는 환야루의 루주다운 정보력이었다.
“이자라고? 정도회의 이립전의 우승자인 무명악인이 뭐 때문에 옥무기와 함께한다는 거지? 원래부터 옥무기와 관련이 있는 자였나?”
더구나 무명악인 권진은 아무리 뒤를 파도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런 루주에게 잘 보이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뒤편에 서 있던 마인들이 하나둘씩 소리쳤다.
“루주님. 그깟 놈이 날뛰어봤자 단숨에 쳐 죽일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바로 옥무기 그놈과 함께 없애 버리겠습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우리의 목표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지.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 아니니까.”
‘흐음. 겉모습만 보면 아무리 봐도 흑미령이 확실한데.’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전혀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진백천은 조심스럽게 천장 위로 올라갔다.
겹겹이 쌓인 마인들을 피해 기습하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박쥐처럼 매달린 진백천은 곧 유령처럼 떨어져 내리며 검을 휘둘렀다.
스으윽-
“허억!”
놀랍게도 진백천의 검은 흑미령의 목을 베어내지 못했다.
검을 채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흑미령이 기겁하며 몸을 비튼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나를 보지도 않고 피했어.’
단순히 기감만으로 피했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침입자다! 루주님을 보호해!”
“막아라!”
마인들은 재빨리 흑미령을 뒤로 물리며 진백천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날카롭게 뻗어가는 검로에 모두 목이 베이며 쓰러졌다.
“……무명악인 권진! 네놈이 어떻게 여기를?!”
흑미령은 단숨에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도 그런 것이 방금까지 열심히 그려대던 얼굴이 바로 앞에 떡하니 있었다.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일화를 가리켰다.
“저 여자가 길 안내를 자처하던데?”
“웃기지 마라!”
일화가 얼굴을 붉히며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 따위로는 진백천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하며 피를 토해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흑미령은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
“……나를 죽이려 하다니. 왜지?”
“왜긴. 옥무기 공자와의 계약이니까 그렇지. 다른 이유는 없다.”
-거짓말. 옥무기는 우리를 죽일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함께 손을 잡아야 성주에 가까워지지.
‘호오. 역시 이 정도로는 납득하지 않는다 이거지?’
흑미령의 동공이 크게 일렁이며 기묘한 내력을 내뿜었다.
정신을 포획하는 섭혼술의 일종으로 빠져들게 되면 한동안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순간 진백천의 뇌리가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술법이었다.
‘쯧. 누가 사특한 것들 아니랄까 봐.’
진백천이 상단전에 힘을 불어넣자 머리를 어지럽히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솔직히 말해라. 너의 정체가 뭐지? 배후에 누가 있는 것이냐? 정도회냐?”
“어차피 오늘 다 뒈질 텐데. 뭐가 그렇게 궁금하다고 알려 그래?”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흑미령은 흠칫하며 놀랐다.
자신의 섭혼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자는 강호에 몇 존재하지 않았다.
“……꽤나 오만한 놈이군. 아무리 실력에 자신 있다고 해도 혼자 온 것을 후회할 것이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변은 마인들로 인해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중에는 제법 위협적인 자들도 존재했다.
“저자의 두 팔과 근골을 자르고 굽혀라. 물어볼 것이 있으니.”
“네. 루주님!”
마인들은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유난히 마기를 강하게 뿜어내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래 봤자지.’
진백천은 한쪽 발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콰아앙!
혈홍각출 시산육혼 (血紅脚出 尸山肉魂).
붉은 피가 치솟니 시체와 영혼이 떠돈다!
오랜만에 펼치는 혈강옥불상의 무공이었다.
진백천일 때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감히 시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구나 여러 명을 한 번에 상대하기에 이것만큼 좋은 무공도 없었다.
‘지금은 무명악인이니까 그에 맞게 싸워줘야지.’
진백천의 내력에 의해 갈라진 바닥 틈으로 검붉은 색의 가시가 치솟았다.
가시는 순간 시야를 가릴 정도로 허공을 빽빽이 채우며 마인들을 휩쓸었다.
끔찍한 살기가 사방을 휩쓸며 그에 맞는 피의 안개를 피어올랐다.
“커헉! 무, 물러서!”
“가, 가시가 계속 뻗어온다!”
엉망이 된 마인들 사이로 마기를 내뿜는 자들이 비집고 쏘아졌다.
하나같이 무표정에 살기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그들이 펼치는 무공이 어딘지 남달랐다.
‘마공이 아니야.’
검신에 일렁이는 마기와 달리 지극히 정파에 가까운 우직한 검로였다.
더구나 그 현묘함이 얼핏 드러나기까지 했으니 마공은 더더욱 아니었다.
속마음을 읽어보려 했지만 들리는 것은 비명과 같은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뿐이었다.
“……죽인다!”
그때 마인 중 하나가 몸을 비틀며 초식을 쏟아냈다.
세 번의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검로가 진백천의 목덜미를 향했다.
‘삼격성태검(三擊星台劍)?’
진백천이 알아보는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이 동작을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무림대회에서 만났던 청성파의 벽호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인들이 들고 있는 검이 어딘가 익숙했다.
‘복마검(伏魔劍). 이런 식으로 마인들을 부리고 있었나?’
아마도 무림대회가 끝나고 청성파로 돌아가야 하던 이들을 흑미령이 섭혼술로 세뇌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지가 흔들리던 이들이었고 더더욱 쉽게 빠져들었을 터였다.
오로지 진백천이 마검을 부러뜨렸던 벽호일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쯧. 결국 이렇게 되었군.’
벽호일 때와 다르게 이미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완전히 마인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어떻게든 정신이 돌아온다 해도 흑미령의 섭혼술과 비슷한 수라면 다시금 이지를 상실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확실히 끝내는 게 좋겠지.’
추후 청성파의 제자들이 마교의 주구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 따위는 이들도 원하지 않을 터였다.
진백천은 마음을 무겁게 먹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독고구검 대신 종마검이 옅은 살기를 흩뿌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카앙-
마인들과 복마검이 내뿜는 마기는 진백천과 종마검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지 검이 닿는 것만으로도 마기가 사그라들며 전신을 떨어댔다.
진백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인들의 목을 베어냈다.
스걱-
청성파의 마인들이 쓰러지기까지 불과 한 호흡에 불과했다.
그 모습을 보며 흑미령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누구길래 마인들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베어내는 거지?!”
“누구냐고? 궁금해?”
눈을 부릅뜨는 흑미령을 쳐다보며 진백천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원래의 얼굴과 다르게 무척이나 살소(殺笑)에 어울렸다.
“그렇다면 우선 살아남아 봐. 그럼 혹시 알아? 내가 누군지 알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