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48화
84장 죽은 자들의 기억
회귀를 한 이후 진백천에게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큰 것은 꿈이었다.
그는 잠을 자더라도 꿈을 꾸지 않았다.
그것이 딱히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멈췄던 꿈이 다시 시작된 것은 정도회의 혈사(血事) 이후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만큼 황충의 죽음이 충격적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밤마다 계속되는 장면들에 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그가 그렇게 확신하게 된 것은 지금 눈앞에서 이어지는 꿈속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대륙.
가히 산맥으로 물굽이 치는 곳은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十萬大山)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마교에서 살았을 리는 없으니까.’
그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너무 높아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자는 계속해서 진백천, 아니, 꿈속의 아이에게 말했다.
-이곳은 결국 네가 다스려야 한다. 그러려면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알았느냐?
-네. 아버지!
힘찬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아버지라 불린 남자는 아이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마천영!’
마교의 교주이자 최종적으로 베어 죽여야 할 자.
그자가 악마답지 않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진백천이 기억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인자한 모습이었다.
-화린아 표정이 왜 그러느냐? 설마 무서운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장난스럽게 들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마천영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뇌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이때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이 마화린의 기억이었다고?’
그리고 마화린은 금세 나이를 먹었다.
마천영의 기대를 받았던 것과 다르게 그는 그다지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가졌던 오만함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조금만 벽에 막히며 포기해 버리는 습관이 들어버린 것이다.
-교주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흐음. 마뇌가 각별히 신경을 써주게.
-네. 물론입니다. 그분의 심장을 받았으니 분명 곧 두각을 드러낼 겁니다.
-그렇겠지.
마뇌는 계속해서 마천영의 기분을 풀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마화린은 계속해서 나아지는 모습이 없었다.
그저 적당한 후기지수가 최대의 지원을 받은 그 정도였다.
마천영이나 다른 이들이 기대하는 제2의 천마가 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실패작인가.
그날부터 마천영은 마화린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대신 폐관수련에 들어가며 다시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화린은 완벽히 비뚤어졌다.
-나를 뛰어넘는 자가 어디 있다고! 기대만 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야!
자신에게 냉담해지는 이들을 느끼며 세력을 만들고 이후의 일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국 강호에 나온 그는 마천영이 말하던 실패작- 이라는 의미를 잘 알았다.
사자혁, 진백천, 유일환…….
자신과 동등하거나 뛰어넘는 이들이 강호에는 수없이 있었다.
구촉비전을 익혔지만 자신이 납치한 중혁보다도 못하는 것을 보며 절망감은 더 해갔다.
-하지만 나는 소교주다!
천마의 신체에 잡아먹히고 진백천에게 죽어가는 내내 그러한 자만과 오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기억이 도대체 왜 나한테 보이는 거지?’
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집어삼켰으니까.
‘뭐?’
-심장을 부수고 집어삼켰으니까. 그의 영혼과 기억도 흡수한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누구지?’
-웃긴 말을 하는군. 나는 너다.
진백천은 그 말을 끝으로 강한 심장의 진동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지만, 곧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억에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머릿속에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윽! 대체…… 이게 뭐야!’
그런 기이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통은 사라지고 다시 시야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기존에 없던 기억들로 가득했다.
전부 마화린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다.
‘미치겠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기억 속에는 그가 익히고 있던 혈수인(血髓印)을 비롯해 구촉비전(口燭非典)의 구결도 함께였다.
비단 무공 구결뿐만이 아니었다.
혈막을 이용해 전풍객을 죽인 것도 환야루의 루주의 작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 죽여야 될 이유가 생겼군.’
그는 무거워진 머리를 움켜쥐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우선은 이 지식이 실제인지 가짜인지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아는 마교라면 진백천에게 온갖 사특한 세뇌를 하려 할지도 몰랐다.
지금의 이런 환상이 그런 세뇌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단순한 세뇌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억이 또렷하지만 말이야.’
그는 곧바로 객잔 밖으로 나가 빈 공터를 찾았다.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의 시간이었다.
적막한 공터에는 이미 자신보다 먼저 찾아온 이가 보였다.
‘중혁?’
그는 빈 공터에서 홀로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구촉비전이군.’
그는 굳이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것을 열어볼 필요도 없이 그의 움직임과 대조해 봤다.
동작들은 전부 그의 기억과 일치했다.
‘정말 마화린의 기억이 나한테 들어온 건가.’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마화린이라니 어딘가 찝찝했다.
“으음? 회주님?”
“언제까지 회주님이라 부를 거냐. 그냥 형이라 불러.”
“……어떻게 그래도 제가 감히…….”
“도홍경 봐봐라. 그 얼굴로 잘만 형님형님 그러잖아. 오히려 네가 불러주면 고맙지.”
중혁은 도홍경의 산적 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기 힘든 모습이기는 했다.
“잠도 안 자고 수련 중이야?”
“……네. 습관이 되다 보니.”
중혁은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이 겨우 1시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혈방에서부터 그렇게 훈련을 받아 몸에 밴 것이다.
“구촉비전은 어디까지 익혔어?”
“아. 이 무공의 이름이 구촉비전이었습니까?”
“그것도 몰랐어?”
“그저 외우고 익히라고만 해서 몰랐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진백천은 그에게 구촉비전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을 처음으로 구촉비전이라 짓고 만든 이는 악의선사(惡意善篩).
그 후에 마교로 흘러 들어가 부작용을 지우기 위해 여러 개선된 구결로 나뉘었다.
“마교 교주의 검이라는 직속 무력단체서도 인정받은 자들만 익힐 수 있지. 하지만 여전히 부작용이 치명적이라 마교 측에서도 함부로 익히지는 않아.”
“……부작용이요……? 서서히 짐승처럼 변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중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의 부작용은 남성성이 사라지고 여자가 되는 것이었지, 그에 비하면 편집증적인 성격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여, 여자가 된다고요?”
“맞아. 하지만 중혁 네가 익힌 것은 그런 부작용은 없는 모양이니까 걱정 마.”
그는 정말 놀랐는지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여자가 된다니.
아무리 특이한 무공이 많다고 해도 그런 일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진백천은 가볍게 몸을 풀며 그의 앞에 섰다.
“이왕 나온 김에 실력 좀 확인해 볼까?”
“……저랑…… 회주님…….”
“형님.”
“네. 형님이랑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럼 누구랑 해? 도홍경이랑 할까? 그놈은 내가 붙자고 하면 바로 온몸에 부적부터 덕지덕지 붙이고 사라질걸?”
그것은 단순히 말뿐이 아니었다.
실제로 말만 꺼내봤다가 며칠 동안은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저야 영광입니다만…….”
“영광이면 최선을 다해.”
진백천은 호무살의 기운으로 주변에 기막을 쳤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마저 사라지자 중혁은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이참에 구촉비전에 대해 완벽히 파악해두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그가 중혁에게 비무를 하자고 한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마뇌의 호위들이나 일금영 같은 구촉비전을 익힌 마인을 만났을 때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머릿속으로는 그것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지만 실제로 몸으로 체험해 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럼 가겠습니다!”
중혁은 항상 실전처럼 훈련을 해온 탓인지 비무와 실전의 경계가 옅었다.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손을 곧추세우며 그의 급소를 노렸다.
진백천은 이미 예상한 듯 자연스럽게 몸을 비틀며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검을 꺼내지 않아도 물결 같은 움직임은 충분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최선을 다해봐. 설마 그게 끝은 아니지?”
“……물론입니다!”
중혁은 왠지 그 말에 더 열의가 솟구쳤다.
뜨거운 숨이 내뱉으며 지체 없이 구촉비전의 내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렸다.
두 눈이 붉게 핏발서며 전신의 피가 끓는 듯한 기분이었다.
휘이이익-
한층 더 빨라진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처럼 달라붙으며 손아귀를 뻗었다.
그 손끝이 진백천의 몸에 서서히 가까워져 갔다.
‘역시 평범한 수준이 아니야. 그 움직임으로만 보면 이미 웬만한 일류에 다다랐어.’
그런데도 진백천이 여유롭게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큰 단점도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기초가 부족해서 동작이 단순해. 단순히 빠르고 강하기만 하달까?’
더구나 진백천이 구촉비천의 구결을 알게 된 이상 움직임을 예측하는 게 더더욱 쉬워졌다.
가볍게 내지르듯 뻗은 손끝이 정확히 중혁의 지정혈(支正血)을 짚었다.
팔꿈치 아래 있는 지정혈은 요혈로 세게 눌리면 한쪽 팔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으윽!”
진백천은 단순히 혈도를 짚은 것만은 아니었다.
태허무극진결의 내력을 손끝에 실었다.
파사의 기운이 구촉비전의 기운을 잠재우는 것은 전에도 경험해 봤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의 내력은 중혁의 내부를 빠르게 퍼져 나갔다.
특이한 것은 내부를 꼬이게 만드는 것이 구촉비전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태허무극진결이었다.
“이제 그만할까?”
“더 할 수 있습니다.”
중혁은 마비된 왼손에 억지로 내력을 불어넣었다.
마비가 풀리며 손가락이 움직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
“무리 아닙니다.”
고집 피우는 중혁을 보자는 상장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렇게 어느 정도 똥고집이 있어야 무공 수련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재차 똑같은 경로로 손을 뻗어왔다.
다른 점이라곤 조금 더 빠르다는 것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초식 수준이잖아.’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파초식의 기운을 손가락에 실었다.
중혁은 엉겁결에 손을 뻗은 그 자세로 뚝- 하고 멈춰섰다.
모든 기운이 순식간에 찢겨나가듯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중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백천을 쳐다봤다.
“너무 움직임이 단순해. 기본적인 무공부터 다시 배울 필요가 있겠어.”
제법 각박한 표현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배웠던 것이 구촉비전뿐이 없으니 그런 움직임이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어울릴 만한 무공이 뭐가 있을까.’
기초 무공을 떠올리자 진백천의 머릿속의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기존의 자신이 기억하던 것을 포함해 마화린이 알고 있던 것들도 함께였다.
‘역시 처음 시작은 소림삼십육권(少林三十六拳)이겠지.’
아영의 기초를 쌓을 때도 배웠던 무공이었다.
그만큼 기본적인 토대를 쌓기에는 좋은 권법이었다.
‘그 이후가 문제란 말이지.’
마음 같아선 아는 것들을 알려주고 싶지만 대부분 검법이라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진백천의 뇌리에 주먹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 떠올랐다.
구촉비전과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