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47화
83장 꼬리를 밟다(3)
“흑미령을 만났나?”
진백천의 물음에 옥무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묻지? 혹시 그 여자도 당신의 살생부에 있는 사람인가?”
-흑미령은 아직 나한테 꼭 필요한 여자다. 그냥 죽어버려서는 곤란해.
“그건 아니고 단순한 호기심이다. 워낙 비밀에 감싸져 있는 인물이라. 웬만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던데?”
흑미령이 악살신괴에 목표가 아니라는 사신에 옥무기는 안도했다.
그러면서 천성적으로 잘난 체를 하는 성격인지 그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와는 얼굴을 보기로 했다.”
야화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윽박과 회유를 통해 겨우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장소에서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런 것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진백천은 환야루의 루주를 처리할 절호의 기회임을 눈치채며 일부로 말을 줄었다.
굳이 그녀에 더 관심을 보였다가는 옥무기의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그렇군. 그나저나 이제는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물론이지.”
옥무기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서신을 꺼내 그의 앞에 펼쳐놨다.
그곳에 적힌 것은 이름들이었다.
“악살신괴의 살생부에 어울리는 이름들이지.”
전부다 마교와 관련된 혹은 쓰러진 성주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진백천은 무심하게 옥무기를 올려다봤다.
“크흠. 이건 물론 나의 의뢰이고 당신이 말한 것도 준비해두었지.”
이번에 꺼낸 것은 제법 두꺼운 봉투였다.
그것을 건네려던 옥무기는 중간쯤에 손을 멈추며 진백천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흐음. 그런데 이걸 정말 할 생각인가? 당신으로서도 힘들 텐데?”
-악인이라고 지명한 자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南宮天)이라니. 아무리 악살신괴라고 해도 힘들어. 괜히 먼저 나섰다가 죽어버리면 나만 곤란해진다.
‘남궁천이라고?’
진백천은 속으로 제법 놀랐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서신을 뺏었다.
그리고 바로 읽어보지 않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주제넘은 말은 하지 말지? 할 수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 테니까.”
“뭐. 알아서 하라고. 대신 뒈져 버리면 당신만 억울한 거 아니겠나?”
그는 일부로 탁 소리가 나게 의자 손잡이를 내리쳤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무사 몇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진백천을 보고 무기를 뽑아 들며 다가왔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네놈은 뭐냐?!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무사들의 위협에도 옥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봤다.
그의 입가가 스리슬쩍 올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귀신같이 나타났다고 해도 실력을 확인해 봐야지. 괜히 소문만 무성한 놈일 수도 있으니.
옥무기의 수수방관한 태도에 무사들도 더는 기다리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다.
제법 날카로운 검로였지만 진백천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검을 뽑아 들 것도 없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차례대로 목덜미를 내리쳤다.
“커헉!”
둘은 검을 휘두르던 자세로 고꾸라졌다.
“호오. 역시 악살신괴. 대단하…… 허억!”
진백천은 오만하게 앉아서 쳐다보면 옥무기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호무살의 살기를 놈에게 쏟아부었다.
옥무기는 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발버둥 쳤다.
점점 조여지는 손아귀에 얼굴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내가 감히 누구라고 이딴 짓을 하는 거지? 내가 우습게 보이나?”
“아, 아니……!”
“네놈 따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목을 베어내고 사라지면 그만이야.”
“죄, 죄송…… 합니다!”
놈의 마음속에 공포가 스며들자 곧바로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옥무기의 가랑이 사이가 점점 축축해졌다.
살기에 버티지 못하고 지려 버린 것이다.
“다음에도 또 건방지게 굴면 그때부터 손과 발을 잘라내겠다.
옥무기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진백천이 그대로 돌아가려 하는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멈춰 세웠다.
“잠, 잠시만…… 이것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놈이 펼친 서신은 황당하게도 계약서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남궁세가에 대한 정보의 값으로 악살신괴는 살생부에 그가 말하는 자들의 이름을 더한다.]
계약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놈은 단순히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악살신괴를 억제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가 죽이라고 한 자들 중에는 악인이 아닌 자도 있었으니.
그들이 악살신괴에 의해 죽었다는 게 밝혀지면 그의 신뢰도나 명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쯧. 제법 머리를 썼는데?’
하지만 이것은 진짜 악살신괴에게나 통할 방법이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해줄 수 있지.’
대신 공짜로는 아니었다.
진백천은 수결을 할 듯 말듯 애간장을 태우다 옥무기를 내려다봤다.
“이걸 해주는 것은 문제가 없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는데?”
“무슨 조건……?”
“흑미령을 만나는 날 나도 함께 가지.”
“……악살신괴 당신이?”
여전히 떨면서도 의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 만약에 동의한다면 이곳에 수결을 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너를 지켜주겠다.”
“나의 호위로 동승하겠다는 말…… 입니까?”
“그렇지. 이깟 약한 놈들하고 있는 것보단 그편이 낫지 않나?”
옥무기의 시선이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호위 무사들을 향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미령이 살생부에 올라가지 않은 자라 단언했으니 죽일 리가 없다. 단순히 호위라면 오히려 나야 좋은 거겠지.
그가 받아들이자 진백천은 대충 수결을 하고 그에게 건넸다.
각각 두 장으로 한 장은 진백천이 챙겼다.
“흑미령을 만나는 건 하루 뒤…… 입니다. 그때 오시(亥時)에 이곳에서 뵙는 걸로…… 하죠.”
“그러지.”
진백천은 짧게 대답하며 곧바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곧 신형이 희끗해지며 공중에 녹아들었다.
내력을 머금은 은형비단(隱形緋緞)의 효과였지만 옥무기는 흠칫 놀라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이내 일각 정도 흐르자 진백천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지 쓰러진 호위 무사들을 발로 후려 찼다.
“일어나 쓸모없는 놈들아!”
“……공, 공자님.”
“당장 나가서 순찰이나 돌아라!”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옥무기는 방금 진백천에게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분노했다.
역시나 제멋대로 살아온 놈이라 그런지 참을성이 부족했다.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악살신괴.”
말과 다르게 덜덜 떨리는 손은 여전히 멈추지 못했다.
그런 옥무기를 진백천은 여전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가는 척하며 천장에 숨어 남아 있었다.
‘이런 놈들일수록 뒤가 구리니까.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남궁세가 측에는 이미 악살신괴가 그들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놨다. 그곳으로 가는 순간 죽는 것은 남궁천이 아니라 악살신괴 네놈일 것이다!
진백천은 놈의 속마음을 들을수록 품속에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의 속마음까지 전부 들은 그는 곧바로 전각에서 빠져나와 중혁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도홍경은 이미 돌아온 상태였다.
-형님. 여기 대박입니다.
-그래? 우선은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자.
도홍경은 이제 와서 나가자는 진백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순순히 따랐다.
다시 객잔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철마방을 돌아본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가 둘러본 쪽에 소형 용광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금속이란 금속은 다 녹여대는지 철괴가 수북합니다. 특이한 것은 원래 있던 철괴도 다시 녹여서 새롭게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뭣 하러?”
도홍경은 그렇게 물어볼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철괴 두 개를 품속에서 꺼냈다.
얼핏 보면 똑같았지만 두 개를 놓고 보면 그 차이점이 드러났다.
중혁이 뭔가를 알아차린 듯 오른쪽의 철괴를 가리키며 말했다.
“……문양이 없습니다!”
“맞아. 이놈들 대담하게도 군용 물자인 철괴마저도 전부 녹여서 마교측으로 보내는 모양입니다.”
중부에 자리 잡은 안휘성은 군사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그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사 물자의 보급이었다.
황실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물자 중 하나가 바로 철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옥무기는 이러한 보급을 빼돌리기까지 하는 중이었다.
“이거 들키면 완전 사형감 아닙니까?”
“사형뿐이겠어? 황제 성격에 싹 다 갈아엎으려고 할 거야.”
더구나 지금은 마교에 진 상황. 희생양이 필요할 때였다.
황제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질 터였다.
‘알아서 무덤을 파주니 내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진백천은 익명의 이름으로 서신을 작성했다.
[안휘성 성주 빈사 상태. 마인들이 점거했으며 그의 아들 옥무기는 마교와 결탁해 서장으로 군사 물자를 보내는 중. 모든 증거는 철마방(鐵劘房)에 있으며 그곳에서 철괴가 녹여지고 있음.]
서신의 수신인은 황제가 아니었다.
황실의 상단을 운영하는 고유빈이었다.
황제에게 직접 보내는 서신은 여러 차례 검열이 들어가며 언제 닿을지 몰랐다.
상대적으로 고유빈에게 보내는 서신은 빠르게 닿을 터였다.
‘고유빈이라면 곧바로 필요한 조치를 하겠지.’
그리고 서신과 동봉한 것은 도홍경이 가져온 두 개의 철괴였다.
“서신이 닿고 바로 움직인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거야. 그동안 할 일을 하고 빠지면 되겠지.”
물론 그 할 일은 환야루 루주 흑미령을 없애는 것과 안휘성에서 마교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그 전에 이 봉투부터 확인해 볼까?’
진백천은 옥무기가 전해준 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에 대한 정보를 읽어봤다.
무엇 때문에 그림자처럼 살아가던 악살신괴가 먼저 연락을 했을지 궁금했다.
‘흐음.’
그것은 아주 오래전 남궁천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려 40년 전 그가 외딴 시골에서 한 여자를 겁탈하고 임신시킨 사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묻히며 사라졌다.
그때 당시 남궁천은 한창 이름을 알리는 후기지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된 연유가 누군가 타 놓은 미혼약을 먹고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남궁가의 가주가 이런 과거가 있었단 말이지?’
남궁천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오의인 제왕검형(帝王劍形)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그에게 더러운 오점 따위는 없어야 했고 그 여자와 아이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완벽한 범죄는 없는 법이지.’
옥무기가 전해준 서신은 그때 당시 마을의 이장이 증언했던 내용과 젊은 적은 남궁천이 직접 수결까지 한 증언서였다.
[나 남궁세가 무인 남궁천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연유화를 책임지겠다.]
증언서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반쯤 물든 상태였다.
‘혹시 남궁세가에서 활동을 중단하고 가만히 있는 게 전부 이것 때문인가?’
악살신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로서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그의 안전 때문이 아닌 남궁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니까.
진백천은 막상 이것을 손에 넣자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은 이것은 남궁세가에 그대로 넘기고 다시금 활동하게 만드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연유화라는 여자와 그 아이의 억울함을 무시하는 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품속에 서신을 집어넣었다.
‘우선은 환야루의 루주부터 잡아내는 것에 몰두하자. 이것은 그 후에 차근차근 물어 나가도 돼.’
진백천은 그 뒤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침상 위에 누웠다.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 한숨 늘어지게 쉴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자마자 전신이 나른해지며 점점 기묘한 환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