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43화
82장 너네 여기서 뭐 하냐?(2)
진백천은 어두운 통로에서 한참을 걸어나갔다.
통로의 끝은 정도회 외곽의 동굴과 이어져 있었다.
사실 어른 한 몸이 겨우 통과할 만큼 좁은 곳이라 동굴이라 부르는 것도 우스웠다.
진백천은 그곳으로 나가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흑의였다.
“후우. 이제 여기를 나가면…….”
기어서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자 바싹 마른 덩굴이 가장 먼저 눈 앞을 가렸다.
억지로 뜯어내니 한창 짓고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인적없는 산어귀여야 했지만 그만큼 정도회의 발전이 빠르다는 뜻이었다.
몸을 털고 일어나자 제법 따뜻한 훈풍이 그에게 불어왔다.
슬슬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고 있단 뜻이었다.
“치고받기 좋은 계절이라는 거지. 쯧.”
진백천은 자신의 오른팔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약왕당주의 실력이 늘긴 늘었는지 거친 흉터를 제외하면 상처는 깔끔하게 나은 상태였다.
피에 젖어 불그스름하던 붕대가 툭 하고 떨어졌다.
“후우. 상처도 이제 다 나았고.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은 북해빙궁이겠지?”
북해는 결코 가볍게 마음을 먹고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사시사철 눈으로 가득 쌓여 있는 그곳은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북해빙궁의 무인보다 먼저 저승사자를 만날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칼바람은 쏟아지는 물을 얼릴 만큼 매서웠다.
“어설프게 준비해서 가보려다 큰코다친 적이 있었지.”
회귀 전의 진백천은 마교의 근거지가 된 북해빙궁을 공격하기 위해 공격대를 만들었다.
나름 단단히 동여매고 눈밭을 걸었지만, 빙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손발이 얼어 동상으로 잘라낼 뻔했었다.
“북해 출신의 안내인이 필요해.”
돈을 받고 길을 안내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가볼 생각이었다.
“그전에 먼저…… 배부터 채워볼까?”
진백천은 멀찍이 세워져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어차피 마을로 가서 말도 한 마리 구해야 했고, 앞으로 돌아다니며 쓸 이런저런 물건도 구해야 했다.
진백천은 혹시나 마주치는 이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피풍의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마침내 객잔에 도착해서 들어서려는데 그보다 먼저 문을 부수며 밖으로 굴러나오는 이가 있었다.
“크허억! 적…… 적이다……!”
코피를 흘리는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었다.
“……적이라고?”
깜짝 놀란 진백천이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중혁?’
그리고 그와 대척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의외의 인물이었다.
‘……도홍경?’
* * *
중혁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자 정도회를 벗어났다.
진백천이 배려해 준 시간이었고 그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배를 채우며 체력을 회복했다.
다행히 약왕당주를 비롯해 약왕당의 의원들은 그에게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전부 개인적으로 말을 하고 간 진백천의 덕분이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중혁의 인사에 약왕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져가거라.”
약왕당주가 내민 것은 미리 싸놓은 것으로 보이는 보따리였다.
그 안에는 보존식품부터 급할 때 쓰라고 돈도 들어 있었다.
“너의 딱한 사정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너의 소속이 소속이다 보니 정도회에서 품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지 말아라.”
“……아닙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가능한 너의 그 무공을 좋은 곳에 썼으면 좋겠구나. 그것도 폐관수련에 들어간 회주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일 테니.”
가벼운 대화를 끝으로 중혁은 약왕당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정말로 정도회를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약왕당의 의원 중 하나의 안내를 받으며 정문으로 걸어갔다.
처음 왔을 때와 다르게 기분이 제법 오묘했다.
‘……이게 아쉬움이라는 건가.’
그리고 정문에 다가갈 때 의외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자신의 또래인 두 명의 남녀였다.
“내가 정문에서 자꾸 시시덕거리지 말랬지?”
“사저. 시시덕거린 게 아니라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뿐입니다.”
“그게 시시덕거린 거지 뭐야! 스승님도 폐관수련 하시는데 이렇게 놀기만 할 거야?”
‘저 둘은? 상장과 아영?’
둘 다 중혁과 비무를 했던 이들이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비무장 위에서와 지금 풍기는 분위기는 퍽이나 달랐다.
벼락같은 검을 휘두르던 그가 아영에게 연신 혼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꽤나 새로웠다.
“아주 우승했다고 이제 막 놀겠다는 거지? 그렇지?”
“사저. 노는 것이 아니라…….”
상장과 아영은 곧 중혁을 알아보고 멈춰섰다.
서서히 가늘어지는 두 눈에 담긴 것이 호의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영의 갈비뼈를 부러뜨렸고, 중혁에게는 살수를 뿌리기까지 했다.
그것이 비록 마화린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해도 잘못은 잘못이었다.
중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야, 너. 지금 나가는 거야?”
아영의 질문에 중혁은 잠시 멈춰섰다.
“저번에는 내가 아무것도 못 보여줘서 졌지만 실전에서는 다르거든? 5년 뒤에는 아주 박살 내줄 테니까 각오해.”
“……5년 뒤.”
중혁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한번 이긴 상대라 비웃냐?”
아영이 화를 내자 품속에서 자고 있던 청서생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중혁은 푸른빛의 쥐를 보고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비웃는 게 아닙니다. 단지 5년 뒤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에게는 당장 내일, 아니, 오늘 하루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망망대해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5년 뒤라는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아영이 대단하다 여겨졌다.
“아 뭐래.”
아영은 중혁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진한 무기력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이렇게까지 쳐져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영이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상장이 자세를 곧추세우며 그녀의 옆에 섰다.
바보같이 웃기만 하던 그는 어느새 날카로운 검으로 변했다.
‘……역시 대단한…….’
중혁이 상장에 놀라려던 것도 잠시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는 아영의 손길에 깜짝 놀랐다.
“기운 좀 내. 어차피 이미 사혈방인지 뭔지도 아니라면서? 스승님이 직접 그렇게 말까지 해줬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아영은 직접 그의 어깨를 잡고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그에게 당했던 갈비뼈는 어느 정도 치유가 된 모양이었다.
“어깨에 힘 좀 주고. 5년 뒤에 꼭 정도회로 찾아와. 그때는 진짜 사제가 아니라 내가 박살 내줄 테니까!”
아영은 그 말을 끝으로 씨익 웃고는 홱하고 뒤돌아서 갔다.
“사제 빨리 와! 수련 가야지! 검왕 어르신이 기다린다고!”
“네. 사저.”
칼 같은 그의 기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중혁은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부러웠다.
진백천을 스승으로 둔 것부터 자신감이 넘치고 미래를 생각하는 모습까지 전부다.
‘나도 바뀔 수 있을까?’
그는 정도회를 빠져나가며 회주전의 방향으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회주님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 * *
중혁은 막상 정도회를 빠져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 넓은 강호 전역에 일가친척이란 단 한 명도 없었고 연고지조차도 없었다.
사혈방에 잡혀가기 전에는 고아로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까.
그나마 사혈방이 있던 광동으로 돌아가려 해도 죽은 아이들의 생각만 자꾸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이럴 때 회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가볍게 숨을 내뱉던 그의 시야에 객잔이 들어왔다.
마침 배도 고프고 잠시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으니 자연스레 그의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지은 지 얼마 안 된 나무 냄새와 음식 냄새가 그를 반겼다.
중혁이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음식? 술? 아니면 둘 다?”
“요깃거리로 부탁합니다.”
그는 적당히 옆자리에 먹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면과 야채 볶음 정도였다.
곧 점소이는 빠르게 음식을 내왔고 거기에는 죽엽청(竹葉酒)도 함께였다.
알고 보니 옆자리에 반주도 즐기고 있던 모양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점소이는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서둘러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중혁은 차마 그를 다시 붙잡지 못하고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정도회에서 먹던 것과는 달리 밍밍했다.
하지만 따듯한 것이 속으로 들어가자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술도 한잔 마셔볼까?’
평생을 한잔 마셔본 적 없던 그였다.
결단을 내리자 행동은 빨랐다.
중혁은 죽엽청의 뚜껑을 열어 입가에 가져갔다.
싸구려 주정의 향이 훅하고 코로 올라왔다.
벌컥벌컥-
그는 냅다 술 마시듯이 들이켜다 술병을 내려놓았다.
가슴 속에서부터 불길이 이는 것 같은 게 제법 기분이 좋았다.
‘후우.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거였군.’
그는 다시 한번 술병을 기울였다.
하지만 몇 번 마시다 보니 금세 병이 비어버렸다.
“어라? 어린 공자님 벌써 다 드셨네요. 한 병 더 드릴까요?”
중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는 그럴 줄 알았다며 죽엽청을 올려놨다.
그가 그렇게 3병을 비웠을 때 2층에서 부산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내려오는 것은 두 명의 남녀였다.
“호호. 공자님. 벌써 이렇게 가시면 너무 섭섭해요.”
“하하하. 공사가 다망해서 말이지!”
산적 같은 얼굴의 남자에 기생은 퍽이나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신경 쓰지 않고 재차 술을 들이켜려던 중혁이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다시 기생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과거의 기억이 편린처럼 스쳐 지나갔다.
‘……방주의 침실을 지키던 시녀 중 하나다!’
술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자신의 기억은 확실했다.
환야루의 루주가 데리고 다니던 기생 중 하나로 유난히 눈웃음이 진하던 여자였다.
‘저 여자가 대체 왜 여기에……?’
중혁은 본능적으로 몸 안에 타고 흐르던 주정을 모아 밖으로 배출했다.
또렷해지는 시야만큼이나 아이들을 비웃고 괴롭히던 사혈방의 마인들이 선명히 떠올랐다.
마화린의 옆에서 보좌하던 루주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이유에서 저 여자가 여기 남았는지 몰라도 루주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 여자를 붙잡아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왜 그렇게 악독했는지.
한심하게 패배하고 도망칠 거 뭣 하러 아이들을 죽였는지 말이다.
중혁의 두 눈에 붉게 핏발이 서며 단숨에 기생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가 작정하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허허. 네놈은 뭐냐?”
……기생의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산적 같은 자였다.
그자는 어느 틈엔가 중혁을 막아서며 물었다.
얼핏 풀어진 옷 사이로 누런색의 도사복이 보였다.
‘고수다!’
“가뜩이나 형님을 못 만나서 기분도 안 좋은데 쪼꼬만 게 살기를 흘려? 혼 좀 나볼래?”
그의 말과 달리 기생은 중혁을 알아봤는지 흠칫 놀라며 도망가려 했다.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남자의 손에 막히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누런색의 부적이 보였다.
“내 탄력부의 맛이 어떠냐? 손이 저릿저릿하지?”
“……당신도 저 여자와 한패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뒤편에서 다가오는 남자들이 먼저였다.
“뭐냐 네놈은! 왜 남의 밥 먹던 상을 뒤엎어!”
“어린놈의 새끼가 죽고 싶냐?!”
중혁이 뒤로 밀려나며 뒤엎은 탁자의 주인들이었다.
불콰하게 취한 이들은 당장 중혁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단순히 중혁이 몸을 비트는 동작만으로도 그들은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재수 없게 얼굴을 맞은 이는 코피를 흘리며 문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도 저 여자와 한패입니까?”
중혁의 전신에서 풍겨 나온 기운이 주변을 무겁게 내리찍었다.
유일하게 남자만이 씨익 웃으며 호기심에 찬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당신도……!”
중혁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부서진 문으로 들어선 자가 너무나도 의외의 사람이었으니까.
“어쭈? 너네 여기서 뭐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