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42화
82장 너네 여기서 뭐 하냐?(1)
‘수련동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니까.’
계속해서 정도회에 남아 회의만 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역마살에 낀 사람처럼 돌아다니기만 하더니 그것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더구나 정도회는 혈사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그 하나 없어도 충분히 잘 굴러갔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너무 많아.’
마기자의 비동이 그러했고, 연왕부도 그랬으며 북해빙궁과 황금마전도 그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천마의 심장.’
진백천이 정도회를 벗어나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천마 껍데기의 말대로라면 심장을 부술 수 있는 것은 심장을 지닌 이뿐.
그렇다면 남은 심장을 전부 제거하면 천마의 부활 따윈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정도회를 나설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정말 별일 없으신 거죠?”
당소예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마 황충의 일로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정말 별거 아니니까.”
마음 같아선 강호를 함께 떠돌 때처럼 당소예나 황대원을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조차도 천마의 심장은 비밀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초창기와 달리 너무 많이 알려졌다.
충부대군(忠斧大軍)과 쌍수미랑(雙手美狼)이라는 멋들어진 별호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둘을 보면 충분히 나를 짐작할 테니까.’
진백천은 그대로 자신의 폐관을 밀어붙이고 회의를 파했다.
방으로 돌아온 진백천은 곧바로 침상에 누웠다.
안개가 가득 찬 것처럼 머릿속이 어딘가 몽롱했다.
전투의 후유증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진 탓 같기도 했다.
“후우. 이럴 때는 잠이나 푹 자는 게 정답이지.”
그는 애써 머릿속으로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머릿속의 안개는 뭉글거리며 점차 누군가를 만들어냈다.
어울리지 않게 온몸에 붕대를 감은 백발의 노인.
화산신검이었다.
상념이 깊어지니 이런 식으로 꿈도 꾸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혼자 나가보겠다는 건가?
환상 속의 화산신검은 며칠 전 나눴던 대화를 되짚듯이 반복되었다.
정도회 밖으로 나갈 것이란 말은 화산신검와의 독대 중에 나왔던 것이었다.
천마의 신체와 심장들에 관한 것들도 그에게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래야죠. 저 말고는 부술 수 없다니 말입니다.
황충의 몸으로 스며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거짓은 아니었다.
온몸이 잘게 찢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재생될뿐더러 끝내 되살아났다.
정도회 지하에서 구금쇄(拘禁鎖)에 휩싸여 음식도 없이 살아왔던 것을 보면 적어도 불사에 가까운 존재는 확실했다.
-천마라.
화산신검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전설처럼 흘러나오는 그 존재가 아니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남은 심장은 1개인 건가?
-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악인곡에 있는 것이 마지막이에요.
-나는 어떻게 도우면 되겠나?
진백천이 아무런 이유 없이 화산신검에게 이렇게 털어놓는 것은 아니었다.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다지만 그는 마교의 악귀인 구악정(九惡井)을 단신으로 쓸어버렸다.
과거의 그도 못해냈던 것을 이번에 해낸 것이다.
-당분간만이라도 강호의 거름막이 되어주시죠.
-거름막?
이번 혈사로 크게 이름을 떨친 존재는 크게 3명이었다.
화산파의 화산신검.
사패천의 사자혁.
마지막으로 죽어버린 마교의 소교주인 마화린.
사자혁이야 진백천이 뭐라 하든 자신만의 길을 갈 것이다.
‘죽이지 말라고 해도 죽일 테고, 죽이라고 하면 더 신나서 죽일 테지.’
-마교 놈들의 수법이야 뻔하잖아요. 쓸데없는 소문이나 만들면서 끊임없이 뒤흔들려고 할 거예요. 제가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동안에 순진한 이들이 넘어가지 않게만 해주세요.
진백천이 개인적으로 행동할 동안 놈들의 쓸데없는 수를 막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놈들의 간교한 백 마디보다 화산신검의 말 한마디가 더 가치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저 그들의 말에 반대만 하면 된다는 건가?
-네. 튀는 놈은 쳐내버리시고 까부는 놈은 더 까버리시고요.
-크흠.
어차피 이렇게만 말해놔도 화산파의 머리 좋은 자들이 많으니 알아서 움직여줄 터였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대화는 그다음부터였다.
실제에서는 나누지 않았던 대화였다.
-회주. 무엇하나 물어보지. 그 가슴안에 들어 있는 게 천마의 심장이라면 자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제가 어떻게 되냐니요?
-다른 심장을 파괴하면 유일하게 남는 건 그것뿐이지 않나. 그렇다면 자네가 천마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 있지?
화산신검의 눈이 하얗게 점점 빛이 났다.
-쯧.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자네를 베어봐야겠군.
-……네?
그 후에는 회상 따위가 아닌 악몽으로 흘러갔다.
화산신검의 일검은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몸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자네도 마화린이란 자와 똑같군! 설마 마교의 첩자였던 건가?!
-그게 무슨 개똥 같은……!
베고 재생되기를 수십 번 그는 강한 충격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을 때는 침대 아래였다.
“……젠장.”
아침부터 오지게 기분이 더러웠다.
* * *
폐관수련을 들어가기로 하고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진백천은 아침부터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다.
그 첫 번째 목적지는 약왕당이었다.
“회주님! 오셨습니까!”
약왕당주와 그의 제자들이 버선발로 그를 맞이했다.
“네. 환자들은 어때요?”
“몇몇 중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회복 중에 있습니다.”
진백천은 혈사가 있던 바로 다음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약왕당에 들렸다.
마인의 무기에 묻어 있던 독에 중독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의 독정은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독기만 빼내도 약왕당주에게 상처 회복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정도회 무사들은 그가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힘을 냈다.
덕분일지는 몰라도 부상자들 중에서는 죽은 이 없이 전부 호전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신경 써주세요.”
“네. 물론입니다!”
보통은 이 정도로만 둘러보고 돌아갔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진백천은 모두를 둘러보고 약왕당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그 아이는 그대로예요?”
“네. 그렇습니다.”
“상처는요?”
약왕당주는 진백천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부 다 회복되었습니다. 단순히 외상용 약을 발랐을 뿐인데도 엄청난 신체 능력입니다.”
“그럴 거예요. 마교의 소교주가 실험하던 아이니까 더더욱이요.”
진백천이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중혁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힘없이 올려다보는 눈에는 생기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몸은 괜찮냐?”
“…….”
침상 옆에 놓인 그릇에는 손도 안 댄 음식이 그대로였다.
“다른 아이들 걱정돼서 밥도 안 넘어가냐?”
진백천의 말에 중혁의 눈이 잘게 떨리며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방주님께서 살려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방주? 마화린?”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중혁이 흠칫 놀랐다.
몸에 자연스럽게 밴 두려움이었다.
“마화린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이미 내 손에 죽었으니까.”
“정, 정말입니까?”
“맞아. 마교의 소교주 따위를 내가 살려둘 리 없잖아.”
중혁은 진백천이 내뱉는 말마다 깜짝 놀랐다.
죽었다는 것도 모자라 마교의 소교주였다니.
하지만 이내 그의 잔악한 행동거지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흐음. 무공의 부작용으로 죽었어. 너도 어차피 그들이 살지 못할 거란 것쯤은 잘 알았지?”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달리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행동했다.
이 기이한 무공을 익히던 이들은 그런 모습이 보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무저갱 같은 그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진백천은 그가 궁금해하던 것들을 말해주었다.
차마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사혈방에 있던 아이들도 전부 죽었어.”
“……역시 제가 졌기 때문에…….”
“아니. 네가 사혈방을 떠났던 날. 바로 그날 마화린의 명령에 아이들은 전부 죽었어. 애초에 네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 하던 애들은 없었던 거야.”
“……아아.”
중혁은 고개를 떨구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감정이 보인다는 것.
이것은 다른 구촉무인들에게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정말 부작용 없이 무공을 익혀낸 건가?’
그를 내려다보는 진백천의 눈동자는 복잡했다.
이대로 중혁을 정도회에 계속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쫓아내 버리기에는 마음이 걸렸다.
‘결국 이 아이도 평생을 이용만 당했던 거니까.’
진백천은 그릇을 들어 중혁에게 건넸다.
“언제까지 기죽어 있을 거냐? 슬퍼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본인이 일으키는 거야. 억지로라도 집어먹고 힘을 비축해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향해 전력 질주해라. 그래도 변할까 말까한 세상이야.”
“……원하는 것?”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아이들과 함께 살아남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고개를 저으려던 중혁의 뇌리에 문득 무엇인가가 스치듯 지나갔다.
진백천은 그의 표정 변화에서부터 이미 뭔가를 눈치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이제 폐관수련 들어간다. 더는 찾아오지 않을 거다.”
“……네.”
“정확히 일주일 주마. 그동안 최대한 먹을 거 먹고 힘내서 최상의 몸을 만들어서 나가라.”
축객령이었지만 조언을 해주어서 그런지 딱히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를 신경 써준 어른이었다.
“……감사합니다.”
진백천은 별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순찰당이었다.
진백천은 그들을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었다.
농담 따먹기나 어렵지 않은 대화가 전부였지만 조금이나마 웃으며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정도회를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일주일이 지나았다.
진백천은 수련동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당소예를 비롯해 최소의 인원만이 나와서 그를 배웅했다.
“회주님. 석 달 동안 드실 거랑 이불 같은 것들 좀 싸놨어요. 괜히 벽곡단만 드시지 마세요.”
“알았어.”
“폐관하시는 동안 정도회는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황대원이라면 잘해낼 거야.”
진백천은 하나하나 인사를 나눴다.
약왕당주는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이 만든 단약을 가지고 왔다.
“특별히 약재를 많이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고마워요. 아, 집성의가에 관한 건…… 석 달 뒤에 같이 가보죠.”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때쯤이면 얼음도 다 녹을 테고 홍호에도 연꽃이 흐드러지게 필 터였다.
진백천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산책이라도 가듯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기관진식을 작동하자 입구가 닫히며 퀘퀘한 지하만 드러났다.
“……후우. 아직 으슬으슬하네.”
진백천은 짐도 풀지 않고 수련동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졸졸- 흐르는 암벽수를 지나 반대편에는 입구와 달리 또 다른 출구가 존재했다.
혹시나 입구가 막힐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비상통로였다.
벽을 더듬자 움푹 파인 공간이 존재했다.
그곳에 손가락을 넣어 옆으로 돌리자 겨우 한 사람 정도 지나갈 통로가 생겨났다.
“이제 또다시 시작인가?”
진백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번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어차피 인생 혼자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