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40화
81장 피의 추수(2)
구악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공기의 떨림마저도 달라졌다.
모든 죄악과 상처를 영광으로 삼는 정신 나간 놈들의 집약체답게 그들은 싸우는 방식도 남달랐다.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옷이나 방어구 따위는 걸치지 않았다.
대신 팔뚝과 목덜미에 철갑을 두른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찔리면 죽는 것을! 그럴 바에는 조금 더 빨리 찌르는 편이 낫다!”
그런 생각을 가진 놈들이었기에 무기의 손잡이에도 작은 갈고리 모양의 침을 박아넣었다.
혹시라도 손에서 무기를 놓칠까 봐 전투에 앞서 억지로 손을 고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생각 없이 달려들기만 하는 놈들인 것도 아니었다.
짐승 같은 움직임은 그 어떤 무인들보다 기민했고, 임기응변에 능했다.
“사냥해라!”
9종류의 악귀들은 각각 빠르게 섞이며 진을 만들었다.
그 중앙에는 화산신검이 위치했다.
뒤늦게나마 화산파 무인들이 뛰어들려 했지만 구악정 무인들에게 막혔다.
“늙은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추면 살려주겠다!”
“전처럼 여전히 입이 방정맞군.”
“크크큭. 늙은이가 입을 찢어준 덕분에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대장의 입 옆으로 길게 찢어진 흉터는 화산신검의 일검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악정 대부분의 마인들은 화산신검이 만들어준 흉터를 한두 개씩을 간직했다.
“이번에는 내가 손가락을 잘라주지! 아니, 이자까지 쳐서 4개면 되려나?”
“나는 오른쪽 어깨다!”
화산신검은 자신이 만든 오래된 흉터들을 보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혹시 그 흉터들을 보며 내 검을 연구한 건가?”
“크하하하! 늙은이가 제법 똑똑하다니까!”
대장은 설마 그것까지 알아채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흉터를 새겨준 자들이 한둘이어야지! 그들을 전부 모으니 화산파의 비급이 한 권 만들어지더군! 크크큭!”
흉터가 새겨진 이만 무려 102명이었다.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합치면 500여 명에 가까웠으니 화산신검의 검에 대해 연구하기에는 충분했다.
구악정이 이렇게까지 화산신검과 화산파에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네놈들을 전부 죽였어야 하거늘.”
“업보라고 생각해라!”
“업보라.”
천하의 악적인 구악정의 대장이 할 소리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자신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악귀와 같은 움직임으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오늘 이 모든 것을 끝낸다.’
화산신검은 눈에 힘을 주며 지금까지 참아왔던 내력을 토해냈다.
자줏빛을 띠는 극양의 기운이 전신을 감싸며 검으로 뻗어 나갔다.
화산파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다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이었다.
지금은 곽철군을 제외하면 화산신검만 익힌 절기였다.
“네놈들이 발전한 만큼 나도 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
화산신검은 검을 크게 휘두르며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서 거품처럼 터져 나온 것은 피거품이었다.
토공을 익힌 마인이 어느 틈엔가 발밑까지 기어온 상태였다.
검을 미처 뽑아내기 전에 사방에서 각양각색의 무기가 뻗어왔다.
쐐애애액-
하나같이 무차별적으로 뻗어오는 듯했지만 전부 자로 맞춘 듯 계획적인 공격이었다.
화산신검이 무기를 쳐내며 뛰어오르려 하자 바닥을 뚫고 손이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방금 가슴을 꿰뚫렸던 마인이었다.
놈은 죽어가면서도 그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스걱-
손목이 잘려 나가며 벗어났지만 아주 찰나의 멈칫거림은 많은 결과로 다가왔다.
“흐음!”
지금까지 조금의 상처도 없었던 화산신검의 얼굴에 기다란 실금이 생겨났다.
한 치만 더 깊었어도 한쪽 얼굴이 엉망이 되었을 상처였다.
“크크큭. 아쉽군!”
그 상처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구악정의 대장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부위의 상처를 노리며 기이한 곡도를 휘둘렀다.
그 밖에도 구악정의 마인들은 자신들이 상처 입은 곳을 집요하게 노렸다.
악귀 가면에서 유일하게 뚫린 구멍에서 드러난 눈동자에서 그러한 집요함과 독기가 물씬 풍겼다.
“이놈들!”
화산신검이 상처 입은 것을 알자 화산파의 무인들이 격하게 당황했다.
특히나 그와 비슷한 세대를 살았던 평정진 장로가 검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억지로 구악정의 마인들을 베어내느라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났다.
“감히 그분이 누구라고오오!”
평정진은 장문인인 곽철군의 사형뻘 되는 배분이었다.
그만큼 나이도 있고 꼰대였으며 화산에 자부심이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진백천이 화산에 들렀을 때도 화산은 더 허리를 펴야 한다며 주장하던 대표적인 자였다.
그런 평정진이 자신감을 갖는 원천은 다름 아닌 화산신검이었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그런 화산신검이 홀로 싸운다 했을 때도 뒤로 물러났던 이유는 그를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나를 따르거라! 화산신검은 절대 쓰러져서는 안 된다!”
평정진은 상처를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섰다.
화산파의 무인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사제가 제법 무리하는군.”
“크크큭. 걱정하지 말아라. 저자도 곧 늙은이 뒤를 따르게 해줄 테니.”
화산신검은 웃음인지 씁쓸함인지 모를 표정으로 입가를 비틀었다.
“정진이 어릴 때부터 나를 곧잘 따르곤 했지.”
악귀들이 재차 그의 몸을 노리며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매화가 새겨진 무복이 무기에 베이며 여기저기가 뜯겨 나갔다.
평정진이 그 모습을 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가 이 자리에서 죽기라도 할 것처럼.
주름진 얼굴을 보며 화산신검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정진아. 그런 표정을 짓지 말거라. 내 항상 화산의 무인은 무게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거늘.”
“……사형! 됐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저희와 함께 싸웁시다!”
“걱정 말거라. 이것 또한 내가 업고 가야 할 것들이니.”
화산신검의 몸에서 뿜어진 자색의 강기가 악귀들을 덮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한차례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악귀들은 그것을 보고 비로소 기회가 왔음을 짐작했다.
“찢어라!”
“그동안 묵혀왔던 악의를 마음껏 풀어라!”
“늙은이로 풀지 못하면 뒤에 놈들을! 그마저도 안 된다면 화산파를 갈기갈기 찢으리라!”
곧 화산신검의 주변은 구악정의 악귀들로 가득 둘러싸였다.
그들은 약속한 듯이 자신의 흉터가 새겨진 곳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악의에 찬 수십 개의 검날이 화산신검의 몸을 갈랐다.
단지 옷만이 아니었다.
피륙이 갈리며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사, 사혀어어엉!”
평정진이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피의 복수 속에서도 화산신검은 여전히 검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을 가볍게 반개(半開)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쯧쯧. 악귀놈들아 나야말로 고맙구나.”
상처 입은 몸을 보고 놈들이 어떻게 공격해 올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쉰밥에 달라붙는 파리떼처럼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한수로 끝낼 수 있으니.”
입가로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구악정의 대장이 만들어낸 상처였다.
“아직까지도 허세라니. 지금 보니 입만 산 늙은이였군!”
“이번에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으마.”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소리다!”
진백천이 봤다면 ‘니놈들 이제 다 뒈졌다-’며 손뼉을 쳤을 상황이었다.
검신이 검을 휘둘렀다고 생각한 순간 하얀 섬광이 폭풍처럼 주변을 휘몰아쳤다.
뒤늦게 날파리들이 땅으로 하늘로 도망가려 했지만 그것보다 섬광이 더욱 빨랐다.
빛은 그것 자체로 검이 되어 악귀들을 집어삼켰다.
“크아아아아악!”
“이대로 죽지는 않는다!”
“같이 죽는 거다아아!”
구악정의 악귀들은 온몸이 뜯겨져 나가면서도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무기조차 빛무리를 이기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단 한 줌의 외침만이 유언처럼 남고 악귀들은 전부 절명했다.
눈부신 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숨 쉬고 있는 악귀들은 보이지 않았다.
단 일검(一劍).
그것에 승부가 끝이 나버렸다.
“……전부 사형, 아니, 화산신검을 모셔라! 어서!”
뒤늦게 평정진을 비롯해 화산파 무인들이 휘청거리며 화산신검을 부축했다.
전신에 새겨진 상처는 끔찍했다.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허허. 내가 남긴 업보가 이렇게 컸다니.”
“……아무 말씀 마시고 일단 쉬십시오.”
“걱정 마라. 아직은 죽지 않을 테니. 아직은…….”
화산신검은 그대로 두눈을 감으며 의식을 잃었다.
* * *
그 시간.
때마침 진백천 또한 마인들을 마무리했다.
몇몇 남은 마인들이 뒤로 빠지는 모습이 보였지만 도저히 따라갈 여력이 없었다.
진백천을 포함한 전부가 젖먹던 힘까지 더해 무기를 휘둘렀다.
“하아하아.”
숨을 몰아쉬며 놈들을 노려보는데 반대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빗줄기로 인해 정확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다른 마인들인가?”
누군가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도 꽤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정도회로써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새로 나타난 이들이 도망가는 마인들을 베어내기 시작하자 표정이 바뀌었다.
“지원군이다!”
“소림의 무인이다!”
“무당파도 있어!”
빗속을 뚫고 나타난 것은 소림의 원진 장문인을 비롯해 무당파의 장로들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하오문의 하갈후와 하오문의 무인들 또한 보였다.
전부 진백천의 지원 요청에 부리나케 도와주러 온 것이다.
“하아.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네.”
남아 있던 마인들은 전부 베어져 나갔다.
이윽고 원진이 도착하자 피에 젖은 언규를 비롯한 소림의 무인들이 그를 맞이했다.
소림파의 4대금강과 나한들이 아니었다면 벽을 타고 넘어가려는 아수검마대를 막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원진은 그들을 한차례 살펴보고는 진백천에게 다가왔다.
“회주 괜찮은가!”
“네. 덕분에요.”
“조금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마인들을 처리하느라 늦었네.”
놀랍게도 지원군이 있었던 것은 마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을에 남은 이들을 사냥하며 정도회로 향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함께 움직였기에 망정이지 따로였다면 당한 것은 우리였을 거야.”
황실에서 사이가 틀어졌던 무당파와 소림은 함께 싸우며 감정을 풀었다.
어차피 마교의 간계로 인한 것이었으니 따로 담아둘 것도 없었다.
뒤늦게 다가온 하갈후는 걱정 어린 눈으로 진백천을 살폈다.
“쯧. 너무 어리다고 몸을 굴리진 말아라. 늙어서 고생하니까. 오래 해 먹으려면 건강이 최우선이야.”
“오래 해먹을 생각도 없어요.”
하갈후는 피식 웃으며 하오문 문주답게 새로운 소식을 물어다 줬다.
“마교가 친 것이 정도회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작정한 듯이 황실을 비롯해 여러 곳을 동시 공격당했다. 이곳을 제외하면 처참히 당했어.”
놈들의 목표는 지역을 주름잡던 무가를 비롯해 황실과 상단들이었다.
그동안 당했던 것을 갚아 주기라도 하듯 타격은 일제히 벌어졌다.
마인들이 가장 앞장섰고, 그들과 동맹한 일부 흑도방파와 왕가들도 대놓고 드러냈다.
“황실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고요?”
아무리 마교가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특히나 황실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이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결코 없던 일이었다.
“연왕부가 반역을 일으켰어. 하지만 시점으로나 뭐로 보나 그 뒤에 마교가 있는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전에 황제가 연왕부를 조사해달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역시나 황제의 예상이 맞았는지 그들이 황실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상황은요?”
“황실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놈들이 만반의 준비를 해온 모양이야. 마교와 가까운 신강(新疆), 청해(靑海), 서장(西藏)이 완전히 연왕부의 손으로 떨어졌다.”
비록 서쪽 변방의 땅덩어리만 넓은 곳이었지만 황실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황제가 또 부르겠군.’
“우선은 이곳의 일부터 마무리하죠.”
진백천은 이곳의 남은 이들과 함께 2대가 있는 후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광기 어린 사자혁과 그 뒤편에 어이없어하는 당염이었다.
마인들은 그들이 정리할 것도 없이 전부 분쇄가 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