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39화
81장 피의 추수(1)
“회주님!”
황대원은 뒤돌아선 진백천의 눈빛을 보고 흠칫했다.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싸늘했다.
그는 황대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정도회 무사들을 둘러봤다.
어느샌가 그의 주변에 검왕을 비롯해 유일환과 무당팔검도 함께였다.
“수고했어. 이제 우리가 몰아붙인다.”
“반격입니까?”
“반격은 무슨. 버러지 같은 놈들 그냥 다 쓸어버리는 거지.”
진백천은 독고구검을 뽑아 들며 달려드는 흑렬마전대 마인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나를 따라와라!”
“네. 회주님!”
황대원은 큰 소리로 대답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황충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는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전투에 집중할 때였다.
진백천은 거침없이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스걱!
“회주를 죽여라!”
“놈이 감히 회주님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
지금까지 버티기만 하던 정도회 무사들과 마인들이 한데 섞이며 혼전이 벌어졌다.
단 20명 남짓한 무인들이 참여했을 뿐이지만 전투의 양상은 극도로 달라졌다.
진백천은 물론이고 검왕을 포함해 전부 다 하나같이 초절정을 뛰어넘은 자들이었다.
아수검마대의 비수나 암수 따위는 모조리 검왕의 절단검에 잘리며 토막이 나버렸다.
“놈들이 공격할 틈을 주지 마!”
“계속해서 몰아붙여!”
처음으로 마인들이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나는 지경이 되었다.
진백천은 만족 없이 그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두 명의 대주뿐이었다.
“말대가리 새끼랑 얍삽하게 생긴 놈 당장 쳐 와!”
진백천의 외침에 사마혈창과 은살비검 두 명의 대주가 이를 갈았다.
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 반대편에서 진백천을 노렸다.
아무리 소문이 대단한 정도회 회주라고 해도 전력을 다한 그들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암분쇄격(暗雰碎擊).
탈백투관창(奪魄投貫槍).
가공할 마기에 휩싸인 무기가 양측에서 진백천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방금까지 천마 껍데기의 마공을 겪고 왔던 진백천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진백천은 태천검을 사용할 것도 없이 검을 땅에 꽂으며 양팔을 벌렸다.
‘내 몸속에 들은 게 정말 천마의 심장이라면 이깟 마기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의 의지를 받은 천마신공의 마기가 사마혈창과 음살비검의 마기를 휘감았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공격을 뻗던 둘이었다.
“허억! 뭐, 뭐냐!”
“물러서!”
둘의 선택은 극명하게 갈렸다.
말을 탄 사마혈창은 그대로 힘을 더욱 주며 진백천을 꿰뚫어 버리려고 했고, 음살비검은 미꾸라지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선택이 둘의 생사를 갈랐다.
끼이이이익-
진백천의 손에서 빠져나온 마기가 창을 파고들며 파쇄해 버렸다.
동시에 전마와 사마혈창 마저 집어삼키며 갈가리 찢어놨다.
두부를 으깨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역시. 천마신공이라 이건가.’
진백천은 하늘에서 세차게 비가 내려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검게 변한 두 눈뿐만 아니라 마인들을 집어삼킬 마기를 가려주기 때문이었다.
“오늘 너희들의 피로 다시 한번 강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겠다.”
싸늘한 두 눈이 마인들과 살아남은 은살비검을 향했다.
그들은 눈동자에 담긴 마기를 단번에 알아봤다.
하지만 진백천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은 여기서 전부 죽을 테니까.’
그가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신형이 희끗하며 마인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스걱!
진백천은 본격적으로 사냥꾼이 되어 먹이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독고구검이 바쁘게 허공을 갈랐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 개로는 부족해.’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등 뒤에서 진한 울림이 전해졌다.
종마검(從魔劒)이었다.
검은 마치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이 계속해서 아우성을 쳤다.
잠시 고민하던 진백천은 종마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특한 기운을 내뿜어댔다.
“시끄러워.”
진백천은 종마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조각조각을 내서 파묻어주지. 그래도 괜찮다면 멋대로 굴어봐.”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었다.
진득한 마기와 태허무극진결의 파사의 기운이 양손에서 피어올랐다.
두 가지 기운 모두 종마검으로써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우우웅-
울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종마검은 진백천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하나의 검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후우. 가보자.”
진백천의 시선이 빗속을 뚫고 마인들에게 향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독고구검을 쥔 오른눈은 푸른 서기가 종마검을 쥔 왼쪽 눈은 검게 일렁였다.
그 기이한 모습에 살아남은 은살비검이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어서 회주를 공격해라! 저자만 죽인다면 이번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마인들은 위축된 속마음과 달리 앞으로 달려나갔다.
뼛속 깊숙이 박힌 훈련과 세뇌 덕분이었다.
뒤에서 진백천을 따라오던 황대원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회주님의 등 뒤를 보호하라! 늘어지지 마라!”
무리로 타들어 갈 것 같은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진백천의 뒤로 따라붙었다.
이미 전신은 검게 물들어간 상처로 가득이었다.
자신의 옆을 지키던 천군지사대 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자들로 차 있었다.
굳이 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촤아아악-
진백천은 양손에 검을 든 채 마인들의 한복판에서 칼춤을 추었다.
파강식의 강기와 흩날리는 마기가 섞이며 그의 모습의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된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외쳐왔던 말이었지만 그 말대로였다.
진백천은 마인들을 베어내며 마침내 은살비검의 앞까지 다가왔다.
“괴물 같은 놈이로군. 이 마기는 도대체…….”
“네놈이 알 것 없어.”
스걱!
종마검이 은살비검의 손목을 가르며 지나갔다.
말하는 척 철살을 쏘아내려 했다.
“크윽!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기를 보이다니.”
“내가? 언제?”
진백천의 종마검에서 일렁이며 마기가 피어올랐다.
“전부 네놈들 거잖아. 난 그저 그 안에 파고들어 네놈들을 쳐죽인 죄밖에 없어.”
마기로 가득 찬 왼쪽 눈이 안개처럼 일렁였다.
은살비검이 입매를 비틀이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더 들어줄 생각 따위 없었다.
이번엔 오른손에 들린 독고구검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순간 빛줄기가 갈라지며 그 자리를 푸른 강기가 차지했다.
“커헉!”
강기는 정확히 은살비검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놈은 제대로 된 유언도 없이 숨을 들썩이다 쓰러졌다.
진백천은 머리가 잘린 놈의 사체를 다시 한번 베어냈다.
딱히 감정적인 이유는 아니었고 혹시나 괴이한 마공 따위로 다시 일어날까…….
콰아아앙!
……한 이유였지만 그런 것보다는 단순한 폭발이었다.
미리 몸을 잘라내지 않았으면 제법이었을 위력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죽인 놈들의 시체에서 멀리 떨어져.”
“……네! 회주님!”
진백천이 피와 살점에 범벅이 된 채로 말하자 정도회 무사들이 대답했다.
머리 둘이 죽었지만 마교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다음 위치의 마인이 자리를 이어받아 명령을 이어갔다.
“후우. 황대원. 이제 뒤쪽으로 가서 쉬어.”
“아닙니다. 저는 회주님 옆에 서겠습니다.”
진백천은 충성스럽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자꾸 황충이 떠올라서 체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애써 그런 티를 감추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빨리 끝내고 다 같이 쉬자고.”
“물론입니다!”
마인들의 끈질김은 기세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밀리는 형세가 되자 더욱 독하게 달려들었다.
그동안 쓰지 않던 모래 독뿐만 아니라 자폭도 개의치 않았다.
그나마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덕에 그 효과가 덜했다.
“부상이 있으면 뒤로 물러나! 폭발을 견딜 수 있는 자만 앞으로 나서!”
괜히 오기만 부리다 목숨을 잃고 아군에게 피해만 끼칠 뿐이었다.
진백천의 외침에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진백천이 옆에는 검왕을 비롯해 유일환과 무당팔검이 따라붙었다.
“이제 조금 숨을 돌려도 되지 않을까?”
“회주. 무인들의 피해가 계속해서 늘고 있습니다!”
유일환과 현강이 그를 만류하듯 말했지만 진백천은 단호했다.
“안 돼. 저들이 이곳을 살아서 벗어나면 다른 전장에서 누군가의 목을 벨 놈들이야. 이곳에서 최대한 하나라도 더 처치해야 돼.”
“흐음. 자네는 역시 이 이후의 일을 보고 있었군.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른 이들이 상대하는 적은 몰라도 이 두 놈만큼은 살아 돌아가는 놈들이 없게 한다.”
진백천은 재차 쌍검을 펼치며 마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후우. 회주가 제법 무리하는군.”
“……그럴 만하지 않습니까.”
눈앞에서 황충이 죽었다.
지금도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진백천의 검에서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확실했다.
지금만 해도 마치 그들로부터 떨어지 듯 마인 사이로 스스로 파고 들어가니까.
물론, 그것은 마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들 회주를 따른다! 마인들을 전부 없애!”
“정도회와 강호의 힘을 보여준다!”
깃대를 들고 누구 하나가 먼저 앞장서 나서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지금만 해도 진백천의 거침없는 행보에 지친 이들이 힘을 얻으며 환호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런 승전의 기운 옆에서 구악정과 화산신검의 결투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궤도로 향했다.
“크크큭. 화산신검! 오늘로 그 위명을 달리하겠군!”
구악정의 대장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화산신검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처음의 단정한 모습과 다르게 백발이 흩날리며 몹시나 지쳤다.
그런 화산신검을 바라보는 화산파 무인들의 눈빛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 *
화산신검과 구악정.
수년의 세월을 훌쩍 지나 다시 맞부딪친 그들은 과거와 달랐다.
두부 으깨지듯 박살 났던 과거와 달리 구악정은 화산신검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지독히 소모적인 차륜전으로 끌어들여 화산신검의 가장 큰 약점인 체력을 노렸다.
낙매성우(落梅成雨).
화산신검의 검에서 분분히 흩날린 매화가 악귀들의 목을 베어내며 흩어졌다.
그 위력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일인의 검(劒)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세상을 할퀴었으니까.
다만 구악정은 변방에 처박혀 있는 동안 단 한시도 화산신검을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도 그동안 쓸데없이 휴식을 취하던 것만은 아니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끊임없이 연구했으니까.”
붉은 악귀 가면의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그들이 강해진 동안 화산신검은 제자리였다.
과거의 자신들을 베어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좋은 사냥감이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수백, 수천 번 사냥했던 그대로니까!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대장님!”
“이제 제법 호랑이가 지쳤으니 저희도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모전으로 버려지는 마인들이 아닌 과거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9마리의 악귀.
구악정을 상징하는 9개의 가면이 대장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노인 한 명의 피로 목을 전부 적시겠어.”
“대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억지로라도 비틀어 짜내겠습니다!”
“정 안 되면 뒤에 있는 화산파 무인들도 충분합니다!”
대장은 비로써 무기를 집어 들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악귀들이 출렁이듯 따랐다.
“이제 늙은이를 고꾸라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