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31화
78장 무명악인(無名惡人) 권진(1)
손에서 시작한 떨림은 전신으로 번져갔다.
진가소도 사실 조금은 이상하다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진백천은 이렇다 할 범재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했고 그렇기에 자신이 사라지면서 남겨질 그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지.’
진백천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무공을 익히고 강해졌으며 매사 모든 것에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이 있을 때보다 정도회는 더 나날이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수없이 많은 업적을 이뤄내고 강호의 횃불이 되었다.
“그것이 전부…….”
-내 심장 덕분이다. 상단전이 열리고 내공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겠지. 그것뿐만 아니라 원래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적능력 또한 얻었을 것이다. 전부 나의 심. 장. 덕분에 말이야!
천마의 중얼거림은 나중에 커다란 외침이 되어 진가소를 덮쳤다.
그의 속마음을 읽으며 진백천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무림을 돌아다니며 무인들을 박살 낸 것보다 더 큰 업적처럼 보였다.
천마의 신체는 그것에 과민할 정도 화를 내며 분노했다.
원래의 그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상하다.’
그렇기에 진가소는 오히려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백천이가…… 한 업적에 왜 이리 분노하는 거지?’
진가소의 의문에도 천마의 신체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주변의 만년한철 쇠사슬이 통제를 잃고 거칠게 흔들렸다.
-감히! 내 심장으로오! 무공을 익히고 더 강해져?! 남은 심장 조각을 모아 새로운 천마가 될 생각이더냐아! 그런 것이냐아아아!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아! 내가 살아 있는 한! 위에 놈의 몸을 찢고 뼈를 부숴 내 심장을 다시 되찾겠다아아아!
새로운 천마.
남은 심장 조각.
진가소는 복잡하게 흘러드는 정보 중에 놈이 진백천을 죽이겠다는 귀기 어린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누구 마음대로……!”
진가소는 전력을 다해 천마의 머리를 내리쳤다.
카앙!
머리가 잘려 나가는 대신 검이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덕분에 쇠사슬의 흔들림이 더욱 커지며 틈이 벌어졌다.
진가소는 몸을 밀쳐내는 힘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놈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진백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안 이상 절대 이곳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없었다.
“……내 아들을 네놈 따위가 건들게 두지 않겠다!”
그는 재빨리 동굴의 기둥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기관진식이 존재했다.
기둥을 무너뜨리면 자신 또한 죽겠지만 천마의 신체 또한 이곳에 가둬둘 수 있었다.
“네놈이 아무리 불사신이라고 한들! 수백 장 아래의 깊은 땅속에서 기어나가지는 못하겠지!”
촤아아아아악!
뒤늦게 쇠사슬이 진가소를 노리고 뻗어왔지만 이미 그는 기둥 앞에 도착한 후였다.
“이곳에서 같이 죽는 거다!”
콰아아앙!
기둥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쇠사슬이 진가소를 덮쳤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그의 시야로 무너지는 천장이 보였다.
‘……미안…… 하다. 내 아들아.’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며 찾아온 것은 짙은 어둠이었다.
* * *
쿠구구궁-
권진으로 변장한 진백천은 땅 밑에서 전해진 진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동시에 두근거리는 심장은 덤이었다.
이런 적은 없었기에 진백천은 가슴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게 다 무명악인 따위의 별호를 얻어서 그래.’
잠시 쿵쾅대던 심장은 다시금 안정을 찾았는지 서서히 안정되었다.
진백천은 주변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오늘은 다름 아닌 이립전의 마지막 날.
약관전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던 이들은 오늘도 관중석에 빼곡히 모였다.
물론 그중에 진백천을 응원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간혹가다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손을 흔드는 자도 있었지만 한눈에도 정상적인 놈들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처음이었던가?’
진백천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연무장 위를 쳐다봤다.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 옆으로 검왕과 당염의 얼굴이 보였다.
때마침 둘은 권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중이었다.
진백천은 흠칫 놀라며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혹시라도 저 둘은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겠어.’
진백천은 최대한 존재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비무가 시작되었다.
“제갈세가의 제갈위영이오.”
섭선을 든 자는 한 마리 학처럼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멋드러진 겉모습과 다르게 권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불쾌함이 가득했다.
“크흠. 권진입니다. 좋은 비무 부탁…….”
진백천이 나름 좋은 인상을 만들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했지만 제갈위영은 큰 소리 나게 부채를 펼쳤다.
파앙-
“……드립니다.”
“흐음. 악인치고는 혀가 길군!”
제갈위영은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거침없이 몸을 움직였다.
권진과는 대화조차 나누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기신행(天機神行).
제갈세가 특유의 하늘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권진을 압박했다.
유령신법 앞에서는 이깟 신법 따위 잔재주에 속했지만 차마 펼칠 수 없었다.
예선과 달리 본선은 모두가 지켜보는 중이었다.
당소예나 황대원, 하다못해 검왕이라면 보법을 밟는 것만 봐도 권진이 진백천임을 알아볼 게 분명했다.
‘그냥 상대하려니 영…… 어색하네.’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 달리 진백천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제갈위영의 보법을 따라 밟으며 뒤를 잡히지 않았다.
“제법이군!”
철선회법(鐵扇回法).
제갈위영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섭선을 집어던졌다.
섭섭의 각각의 날에서 날카로운 철날이 나오며 한 마리 새처럼 진백천을 덮쳤다.
단순히 집어던진 것은 아닌 듯 섭선은 제갈위영의 손짓에 따라 방향을 이리저리 틀었다.
‘내력으로 조종하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내력이 깊어 보이지 않는데?’
안력에 집중해서 살펴보자 손끝에서 길게 이어진 얇은 실이 보였다.
철실을 여러 개 꼬아 약품 처리를 해 만든 특수한 실이었다.
제갈위영은 그것을 통해 섭선에 내력을 불어넣으며 방향을 조종했다.
후우우욱-
진백천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섭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얼핏 그가 몰리는 모양새가 되자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역시 제갈공자다! 그깟 악인 따위 당장 없애 버려라!”
“형산파의 복수를 하자!”
‘누가 보면 내가 죽이기라도 한 줄 알겠어.’
제갈위영은 주변의 응원 소리에 점점 흥분했다.
수백 명의 사람이 한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환호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제갈위영은 평소답지 않게 손속이 과해지기 시작했다.
“질질 끌 것 없이 서둘러 끝내주지!”
한 손으로는 섭선을 조종하면서 반대 손으로는 장기를 뿌려댔다.
대천성신장(大天星神掌).
동시에 두 가지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웬만한 고수들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었다.
관중들은 그런 모습에 또 한 번 환호하기 시작했다.
“역시 제갈세다아!”
“저 악인은 곧 곤죽이 되어버리겠군!”
하지만 제갈위영을 바라보는 진백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뽐내고 있는 자신감에 비해 섭선이 과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흐음. 내력의 운용이 너무 불안한데?’
그리고 진백천이 그런 생각하기 무섭게 섭선이 흔들리며 철날이 실을 끊어냈다.
섭선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제갈위영을 향해 날아갔다.
“허억!”
철날이 향하는 방향은 정확히 그의 목덜미였다.
이대로라면 끔찍한 부상, 혹은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쯧. 이럴 줄 알았지.’
진백천은 서둘러 땅을 박차며 섭선의 중간을 발로 쳐냈다.
방향이 틀어지며 그의 목이 아닌 바닥을 향했다.
푸욱-
섭선은 바로 그의 발 앞쪽에 틀어박혔다.
제갈위영은 제법 놀랐는지 흔들리는 눈으로 진백천을 쳐다봤다.
‘죽을 뻔한 걸 살려줬으니 이제 인상이 조금은 바뀌려나?’
하지만 그런 기대는 관중들의 경악 어린 손짓에 처참히 박살 났다.
“허억! 제갈공자를 봐!”
“저, 저런! 잔악한 무명악인(無名惡人) 권진이 또다시 일을 냈군!”
“……심지어 너무 작잖아!”
펄럭-
섭선의 철날 끝이 제갈위영의 아랫도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던 모양인지 가랑이 사이가 길게 찢겨 있었다.
제갈위영은 그곳은 손으로 움켜쥐며 진백천을 노려봤다.
“나 제갈위영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아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안 쳐냈으면…….”
“닥쳐라! 악인! 내 오늘 살계를 여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당장……!”
제갈위영은 한 손으로 가랑이를 붙잡은 상태로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근본 없는 움직임에 당할 진백천이 아니었다.
살짝 몸을 트는 것만으로 주먹을 회피하며 제갈위영의 등을 밀어냈다.
연무장 밖으로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허억!”
제갈위영은 한 손으로 버둥거리다가 앞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찢긴 바지의 천을 밟으며 아랫도리가 쏙 하니 벗겨졌다.
제갈위영은 반쯤 벌거벗은 채로 연무장 밖을 굴렀다.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형산파 고당춘 때와 겹쳐 보이는 듯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역시나 하는 눈으로 권진을 노려봤다.
“이번에도 벗겨서 던져 버렸다!”
“전에도 그렇고 고의임이 분명하다!”
“……작아!”
제갈위영은 뒤로 발라당 누운 상태로 진백천을 올려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이내 심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허허. 어처구니가 없네.”
진백천은 자꾸 벌어지는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조차 관중들이 보기에는 제갈위영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승자 권진!”
진백천은 더는 수습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연무장을 내려왔다.
‘뭐. 이제 나도 모르겠다.’
안 들키면 그만이었다.
안 들키면.
그 후로 두 번째 시합은 청성파의 벽호일이었다.
“전의 다른 이들과 나는 다르다. 나는 대청성파의 벽호일이다!”
그는 마기가 풀풀 풍기는 복마검(伏魔劍)을 들고 소리쳤다.
다른 이들과 달리 진백천이 놈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두면 벽호일의 정신은 복마검에 집어 삼켜지게 될 게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검을 박살 내버리는 게 맞겠지.’
때마침 비무기도 했고, 자신은 희대의 악인이 되어 가고 있으니 그에 맞게 마음껏 날뛰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진백천은 표정마저 나른하게 지으며 손을 까딱였다.
“건방진!”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드는 벽호일의 검법은 어울리지 않게 만상귀일검법(萬象歸一劍法)이었다.
마검을 들고 도가계열의 무공을 사용하니 기이한 광경이었다.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빠르게 벽호일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깟 마검 하나 들었다고 호박이 수박되는 거 아니거든?’
기껏 해봤자 미쳐서 날뛰며 불쌍한 양민들을 베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검로가 꺾이며 진백천의 급소로 뻗어왔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뭉툭했다.
벽호일은 본래 실력이 부족한 게 분명했다.
진백천의 양손이 그의 요혈을 빠르게 두들겼다.
퍼억-
“커헉!”
동시에 검을 뽑아 들며 그 안에 내력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우우우우웅-
파사의 기운과 부딪친 마기가 격하게 반항하며 떨려왔다.
“이딴 검에 의지하지 말고 본인의 실력을 키워라.”
“뭐, 뭐라?”
진백천은 대답 대신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복마검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져 나갔다.
“…….”
황망한 표정을 짓는 벽호일을 두고 진백천은 연무장에서 내려왔다.
역시나처럼 악인이니 뭐니 관중들의 비난이 들려왔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뭐. 돌이킬 수도 없고. 쯧.’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