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30화
77장 무인쟁패(武人爭覇)(6)
진백천은 비무가 시작되기 전부터 중혁의 속마음에 집중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 그에게 있었던 일을 대충 짐작했다.
‘상장을 죽이면 풀어준다고?’
아까부터 희멀건 한 얼굴로 쳐다보는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면 너무나도 유치했다.
직접 나서지도 못하는 게 어린아이나 협박해서 일을 치르려는 꼴이 지독하게 한심했다.
진백천은 연무장 위에 서서 몸을 풀고 있는 상장을 쳐다봤다.
-상장. 첫수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더니 진백천을 쳐다봤다.
-그러면 저 애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상장은 기특하게도 중혁을 걱정했다.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나설 테니까. 그러니까 괜히 상대를 신경 쓰면서 실력을 펼칠 생각을 하지 마. 모든 것을 쏟아부어 봐.
-네. 알겠습니다!
상장은 씩씩한 대답과 달리 여전히 긴장한 기색으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모든 것을…….
상장과 함께 대련을 해왔던 진백천조차 그의 한계를 정확히 몰랐다.
청룡백상심법(靑龍白上心法)과 광풍칠성검법(狂風七星劍法)을 토대로 벽력천풍검법(霹靂天風劍法)을 쌓아 올렸다.
거기에는 검왕과 진백천의 경험은 덤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상장의 검은 벽력마검 이홍립의 검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어딘가 나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검왕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둘 다의 장점을 빼가는 것 일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니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상장의 벽력천풍검이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상장의 그릇을 전부 채우지 못할지도 모르지.’
상장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비무가 시작되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 중혁은 빠르게 몸을 날리며 비수를 꺼내 들었다.
무인이라기보다 살수에 가까운 살기에 찌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장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배운 대로.
그의 검이 천천히 머리 위로 올라갔다.
-믿고 나아간다.
동시에 상장은 강하게 진각(進脚)을 밟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그 과정에서 묵철의 검은 그 패도적인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다.
서서히 갈라지던 검신이 이내 내력의 방출과 함께 폭발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벽력일섬(霹靂一閃).
우르르르르-
주변의 공기가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잘게 떨렸다.
중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눈앞에서 터진 벽력을 피할 길은 없었다.
파지지짓-
연무장 위를 새하얗게 물들인 벽력은 곧 작은 폭죽처럼 사그라들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바닥에 쓰러진 중혁과 부러진 검을 늘어뜨린 상장이었다.
그는 슬픈 눈으로 부러진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어어.”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스으으으-
중혁의 전신은 까맣게 타서 연기가 올라왔다.
그에 반해 상장은 눈가 바로 옆에 살짝 그어진 상처가 전부였다.
자세히 보면 알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중혁은 전신이 타들어 가는 그 순간에도 아이들을 위해 비수를 휘두른 것이다.
그리고 상장이 검집에 검을 집어넣자 비로소 막혀 있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상장! 최고다아아!”
“저 애가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와 같이 수위를 서던 상장이라고! 멋있다아아!”
아영은 부러진 갈비뼈가 아픈지도 모르고 펄쩍 뛰어나와 상장을 얼싸안았다.
상장은 붉게 물든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진백천과 검왕은 제법 체통을 지키며 앉아 있었지만 얼굴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후우.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이라니. 앞으로 가르치려면 힘들겠구나.”
“힘들긴요. 보는 내내 뿌듯하기만 할 것 같은데요.”
“그랬으면 좋겠군!”
단 한 번의 비무였지만 이것으로 상장의 이름은 모두에게 각인이 되었다.
마화린은 그 모습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러진 중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쓰레기 같은 놈.’
진백천은 서둘러 중혁을 약왕당에 보냈다.
과연 구촉비전이라고 해야 할지 타들어 간 살점은 서서히 차오르며 회복되는 중이었다.
‘지금은 우선 칭찬부터 해주자.’
진백천이 천천히 연무장으로 걸어 나오자 상장을 에워싸던 이들이 전부 물러섰다.
그의 옆에는 황대원과 당소예가 따랐다.
각각의 품에는 약관전의 우승자에게 주는 은자 1만 냥과 만년한철(萬年寒鐵)의 보검이 들려 있었다.
진백천은 평소와 다르게 주변에 찍어내리는 기운을 아끼지 않으며 근엄 어린 모습을 취했다.
“정도회의 상장.”
상장은 무릎을 꿇으며 그의 스승에게 예를 차렸다.
“정도회의 무림대회의 약관전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정도회의 회주인 나는 그에 따라 약속했던 은자 1만 냥과…….”
황대원이 은자 1만 냥의 전표가 든 봉투를 상장에게 건넸다.
“만년한철(萬年寒鐵)의 보검을 내리겠다.”
반대편에서 당소예가 검을 건네며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거 회주님이 가지고 다니던 반푼이 검 녹여서 만든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혈강옥불상을 보관하고 있던 만년한철 상자도 함께 녹여 만든 것이었다.
상장은 이것이 진백천의 검이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올려다봤다.
“크흠. 우승자 상장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두에게 해라.”
근엄 있는 그의 말에 상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전부 그의 입가에만 집중되었다.
상장은 마른침을 한차례 꿀꺽 삼켰다.
막상 말하려니 뭐라고 말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사제! 얼른 말해!”
보다 못한 아영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에…… 회주님께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하다는 게 뭔지.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진백천에 대한 이야기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주님께서는 강하다는 건. 힘이라는 건, 결국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데 사용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조금…… 강해진 것 같습니다. 동생들도 더는 굶주리지 않고, 어머니께서도 건강하시니 말입니다.”
상장의 채 여물지 못한 목소리는 담담하게 좌중으로 퍼져 나갔다.
“……저는 근골(筋骨)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검보다는 쟁기를 쥐는 게 더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저도 해냈으니 여러분들도 충분히 해내실 수 있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강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마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그들은 상장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영은 다시 한번 상장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제 마지막은 포부를 말해야지!”
포부라는 말에 상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매일같이 수련에 열중하느라 사실 그런 것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곧 좌중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떠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호의 올바른 도의(道義)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겠습니다! 호(豪)와 협(俠)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그제서야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허허. 상장의 저런 모습은 자네를 닮았단 말이지.”
검왕의 말에 진백천은 씨익 웃었다.
역시 상장을 제자로 들이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연무장의 거대한 환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도회의 깊은 지하.
상장에게 있어 또 다른 숨겨진 스승인 진가소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상대는 천마였다.
* * *
정확히 말하자면 천마는 아니었다.
천마의 신체였던 그것이 남겨놓은 몸뚱이, 그 정도로 표현이 가능했다.
동공이 풀린 기괴한 신체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비롯해 십이경맥(十二經脈)에 만년한철의 구금쇄(拘禁鎖)가 박혀 있었다.
정상적인 몸이라면 손가락 하나 힘 까딱하지 못해야 하거늘 놈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움직였다.
촤르르르륵-
몸을 구속해야 할 구금쇄는 어느샌가 놈의 무기처럼 사용되었다.
콰아아아앙!
쇠사슬이 닿은 곳이 거칠게 터져나가며 통로가 잘게 떨렸다.
진가소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천마를 포착하고 전력을 다해 검을 뻗어냈다.
쇠사슬 사이의 바늘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틈이었다.
검 끝이 쇠사슬을 쳐내며 정확히 천마의 목덜미를 노렸다.
‘목을 잘라내야 한다!’
-크아아아아악!
천마는 바닥을 강하게 내디디며 뛰어올랐다.
목덜미를 향하던 검은 가슴을 꿰뚫었다.
진가소가 재빨리 검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건 안 되지.
하지만 천마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를 내며 그를 껴안았다.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진가소의 퇴로를 차단하며 거대한 철벽을 만들어냈다.
어둠뿐이 없는 공간에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진가소와 천마의 두 눈동자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천마의 두 눈동자는 진가소의 것과 달리 어둠이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언제부터 의식을 되찾은 거지? 너는 분명…….”
-죽었다고?
진가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뻔했지. 황보세가에 몰려 있던 네놈들은 정말 끈질기고 강했어. 내가 당황할 만큼 말이야.
초절정을 넘는 무인들이 무려 100명이었다.
그중에는 화산신검뿐만 아니라 진가소를 비롯해 황충과 같은 당시의 고수들이 전부 모였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 명이었다.
눈앞에 눈을 번뜩이며 죽지도 않는 괴물.
‘천마.’
-그래. 내가 천마이지. 네놈들이 죽이려 했고 심장을 빼냈지만 결국 이렇게 살아 있다.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냐고? 글쎄. 처음 네놈들이 내 심장을 빼냈을 때 죽음을 거의 정복한 나조차 버티기 힘들었지.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일어났다.
천마는 양손을 벌리며 자신의 가슴을 보였다.
그러자 살점이 스스로 벌어지며 텅 빈 안쪽이 드러났다.
-이제 네놈들이 가져간 내 심장을 되찾을 시간이다.
“심장은 파괴한 지 오래야.”
-크큭.
천마는 그 말을 듣고 격하게 몸을 떨 정도로 웃었다.
진가소의 말을 듣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조소하는 이유는 그의 감각에는 4조각의 심장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 떨림과 강한 진동.
특히나 가장 큰 것과 작은 것이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박동하는 중이었다.
-어리석은 진가. 내 충실한 추종자에게 배신을 당했구나. 그런데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꼴이라니. 심장은 파괴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같은 심장의 힘이 아니라면 파괴되지 않지. 내 불사의 신체처럼 말이다.
“…….”
진가소는 천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 펄떡거리는 기이한 심장은 분명 황충이 가져갔고 용암에 빠뜨려 태워 없앴다고 보고했다.
‘설마 그것까지 거짓이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심장은 대체 어디로……?’
진가소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두 손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말도 안 돼.”
황충이 목숨을 다해 모시는 주군.
그리고 동시의 자신의 아들이며 정도회의 회주.
나이에 맞지 않은 강함을 소유했으며 갑자기 성격이 변해 버린 인물.
‘……단지 철이 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설마?’
천마는 그의 속마음을 읽으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검게 변한 이빨은 검은 눈동자와 함께 악귀 같았다.
-그래. 바로 그놈이다. 내 심장도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