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28화
77장 무인쟁패(武人爭覇)(4)
“구악정이요?”
너무 의외의 말이라서 그럴까.
진백천은 잠시 눈을 꿈뻑거리며 화산신검을 쳐다봤다.
오마군종대까지는 당연히 짐작했지만, 구악정은 예상도 못 했다.
“아니, 중원에서 도망친 놈들이 뭣 하러 기어들어 온답니까?”
악행이란 악행을 전부 일삼던 놈들을 전멸에 가깝게 박살 내고 내쫓은 것이 바로 눈앞의 화산신검이었다.
1,000여 명까지 모였던 놈들을 채 몇십 명 남기지 않고 전부 베어냈었다.
그 건은 화산신검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 중 하나였다.
“나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놈들은 세를 제법 회복했고 다시 한번 그 더러운 손을 펼치려고 한다는 걸세.”
회귀 전에도 놈들을 마주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고 지금같이 빠르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에 빠진 진백천은 이런 변화의 이유에 대해서 짐작해 보려 애썼다.
‘새외세력처럼 남아서 황군과 싸워 대는 걸로 알았는데 갑자기 들어오다니. 분명 마화린의 움직임에 대해 꿰차면서 정도회에 대해서도 잘 파악한 자일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오마군종대만으로는 정도회에 안 된다고 생각할 리 없었다.
‘마화린은 결코 구악정을 움직일 만한 위치가 안 돼. 그렇다면 남은 건…….’
진백천의 뇌리에 마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뇌는 분명 구악정 정도는 마화린의 편으로 밀어 넣어야 싸움이 된다고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마뇌마저도 정도회에 화산신검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구악정의 제일 큰 두려움이라 할 수 있는 화산신검이 있는 곳에 구악정을 밀어 넣을 리 없을 테니까.’
진백천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놀란 속내를 가라앉혔다.
아무리 회귀로 인한 과거의 기억이 있다고 하지만 결코 쉽게 볼 놈들이 아니었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위험이 내 턱밑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검신 어르신께서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셨어요?”
“놈들과 부딪쳤을 때 나는 놈들을 모조리 베어낼 생각이었지. 하지만 화산파의 전력이었음에도 놈들을 전부 죽이는 데 실패했어. 특히나 대장이라 불리는 구심점을 죽이지는 못했지.”
그때부터 화산신검은 언젠가 놈들이 중원에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복수 대상이 자신, 혹은 뒤에 남겨질 화산파의 식구라 생각하고 놈들에게 꼬리를 남겨놨다.
다행히 놈들의 이동 동선은 복잡하지 않았고 간헐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놈들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들은 거지.”
“천만다행이네요. 그 시기까지는 모르시죠?”
“대략적으로 무림대회가 끝나고 모든 이들이 풀어질 때를 노리는 게 아닐까 싶네.”
가장 확실하게 경계심을 내려놓고 즐기고 싶을 순간이긴 했다.
둘은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진백천이 미리 짜놓은 작전에 화산신검이라는 묵직한 말이 하나 더 놓이는 모습이었다.
‘후우. 겨우 한 명이 더 왔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든든할 줄이야.’
진백천은 오마군종대고 구악정이고 오면 효과적으로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여기서 뭔가가 더 터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연륜전에는 왜 참여하신 거예요?”
그의 물음에 화산검신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이들의 실력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지. 다들 훌륭하더군.”
“전부 한수로 끝내셨다면서요.”
“허허. 실수야 실수.”
처음에는 몇 판 살피고 져주려고 했는데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그 생각이 바뀌었다.
사자혁이나 마화린과 같은 자들을 보고 한번 검을 나눠보고 싶은 욕심이 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화산신검도 확실히 무인이야.’
“그러고 보니. 사혈방의 그 아이. 마기가 짙게 풍기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왜 가만히 두고 보는 건가?”
역시나 화산신검은 마화린의 정체를 대충 짐작한 상태였다.
진백천은 놈의 정체에 대해 말할까 말까 하다 입을 열었다.
“그놈. 마교의 소교주예요.”
“소교주? 간도 큰 자로군.”
“그러게요. 사혈방이라는 흑도방파의 이름을 덮어쓰고 오면 모를 줄 알았나 봐요.”
“흐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겉에서 보면 소교주라는 머리를 제거하면 놈들이 와해될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무리 소교주라고 하지만 놈은 그저 마교주의 아들일 뿐이었다.
그것도 실력도 마교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도 달랑 혈랑대 하나였다.
“오마군종대와 구악정은 분명 소교주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소교주를 미끼 삼아 던져지는 것들에 불과하죠.”
그들 전부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마뇌나 마교주는 분명 이것을 빌미로 중원에 발을 들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명분이라는 것은 중원 무림인의 가장 큰 힘이었지만 반대로 약점이 되기도 했다.
“흐음. 그렇군. 회주가 이유 없이 가만 놔둘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
“멍청한 놈이라 오히려 멋대로 행동하게 두는 게 좋기도 하고요.”
화산신검을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놀라는 눈으로 진백천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회주에게서 느껴지던 마기가 상당히 줄어들었군.”
“그래요?”
“지금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면 나라도 느끼지 못할 수준이야.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열심히 태허무극진결을 수련한 보람이 있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그 마기를 몸에서 몰아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그런 불길한 물건은 가지고 다니는 건가?”
화산신검이 말하는 불길한 물건은 등 뒤의 걸린 종마검(從魔劒)과 흑마패(黑魔牌)였다.
진백천은 둘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화산신검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 개의 물건 모두…… 영혼이 깃들어 있군.”
“영혼이요?”
화산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가 도가계열이다 보니 이어지는 설명은 다소 원론적이었다.
하지만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두 개 다 사악한 술수로 만들어낸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혹시 부술 수 있으시겠어요?”
“심검(心劍)이라면 가능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야.”
이제 곧 마교 놈들의 공격이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정신력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가능하면 몸에서 떼어놓고 봉인해두게. 그편이 더 좋을 테니.”
“네. 참고할게요.”
그 후로도 진백천은 화산신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급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니 남은 것은 무림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허허. 오랜만에 몸을 푸니 좋더군. 일환이와 다른 재미가 있어.”
“흐음. 그러시면 혹시라도 검신께서 우승하시는 건 어떠세요?”
“내가?”
“네. 그러는 편이 보기도 좋고 추후 벌어질 전투에서도 좋을 것 같아서요.”
우승 후보인 사자혁이나 다른 이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화산신검 앞에서는 태양 앞 반딧불이었다.
아직까지는 무림의 천하제일인의 칭호는 그가 가지고 있는 편이 좋았다.
정마대전이 벌어질 근미래에 제일 먼저 목표가 될 이는 분명 그들이 될 테니까.
“두 번째 무림대회가 열리는 5년 후에는 지금의 젊은 무인들도 마교놈들과 싸우면서 충분히 강해질 거예요. 그때까지만 방패가 되어주세요.”
“방패라. 알았네. 그렇게 하지.”
진백천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당염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상대가 화산신검이었다는 것을 알면 금방 수긍할 터였다.
진백천은 화산신검과 헤어지고 난 뒤 곧바로 춘식을 불러 남은 모든 돈을 매화방의 검노에게 걸게 시켰다.
“은자 1만 냥, 아니, 금자로 갈까?”
“허억! 그, 금자라뇨! 그만한 돈이 걸리면 배당이 순식간에 낮아질 겁니다.”
“뭐 어때. 무조건 우승할 텐데. 통 크게 금자 1만 냥 가보자! 몽땅 부어 넣어!”
진백천의 명령에 춘식이 울상을 지었다.
요즘 들어서야 왜들 그렇게 진백천 앞에만 서면 안절부절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금자 1만 냥이 2만 냥으로 올라갈 듯싶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혼자 남은 진백천은 금방이라도 넝쿨째 들어올 돈을 생각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입만 벌리면 떡이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는 게 바보 아니겠어?”
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 * *
본선 3일 차.
마침내 약관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혈방의 중혁, 종남파의 광소산, 정도회의 상장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연무장 위에 올라섰다.
3명만 남은 지금 대진표가 절반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순간이었다.
“3명 중 1명은 부전승으로 올라갑니다.”
개방의 소걸아가 부상으로 나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정도회 무사는 각기 이름을 적은 쪽지를 통 안에 넣고 섞은 뒤 꺼냈다.
“부전승은…….”
쪽지를 열자 그 안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상장!”
상장의 얼굴이 기쁜 듯 아닌 듯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운 한번 억수로 좋은 놈이구나!”
“운도 실력이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말라고!”
“그래 봤자 어차피 우승은 광소산이다!”
관중석의 환호를 들으며 상장은 쭈뼛거리며 연무장에서 빠져나왔다.
“상장. 둘의 대련을 유심히 살펴봐. 분명 도움이 될 거니까.”
“네. 스승님.”
광소산과 중혁은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섰다.
“종남파의 이대제자 광소산입니다!”
“……중혁입니다.”
둘의 시선은 각기 방향이 엇갈렸다.
광소산은 진백천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목례를 더했고, 반면에 중혁은 관중석의 마화린과 마인을 내려다봤다.
다른 감정이었지만 둘의 마음속에는 똑같이 이겨야 한다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소산아! 잘해애애!”
관중석에서 백아린을 비롯한 종남파의 사형제들이 큰소리로 광소산을 응원했다.
스르릉-
광소산은 무척이나 두꺼운 검을 뽑아 들며 기수식을 취했다.
진백천도 잘 알고 있는 천하삼십육검법(天下三十六劍法)이었다.
‘얼마나 변했을까? 그토록 바라던 중(重)의 묘리를 검에 실었을까?’
아직은 어린 나이.
구촉무인인 중혁을 이기기에는 무척이나 무겁고 느린 동작처럼 보였다.
그것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중혁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흐읍!”
둘은 상대를 간 보듯 의미 없는 타격을 주고받았다.
중혁이 틈새를 노리는 거친 물줄기였다면 광소산은 강철의 요새였다.
카앙!
둘 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공방을 주고받을 무렵.
중혁의 두 눈이 다시금 붉게 물들며 신체의 움직임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크흑!”
그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며 광소산의 급소를 노렸다.
금방이라도 그의 손끝에 살점이 뜯겨 나가면 피가 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의 광소산은 중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절대 도망치려는 동작은 아니었다.
그저 빠르게 다가오는 중혁을 자신의 품속으로 깊게 끌어당기는 것뿐이었다.
‘첫 번째 수는…….’
거력암하(巨力巖下).
백아린을 덮쳤던 거대한 호랑이를 베어냈던 수였다.
베어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곧 힘이 되어 검으로 전해졌다.
검신에는 은은한 빛이 서리며 광소산에게로 향했다.
후우우우욱-
검은 절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무거웠다.
진백천의 뇌리에 회귀 전 광소산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자연스레 되풀이되었다.
-허허. 참. 형님 제 검이 느리다고요?
-그건 형님이 종남의 검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 들어보세요!
-진정한 중검의 묘리는 말이죠. 단지 무겁게 적을 내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광소검의 검에 무게가 실리며 바람이 묵직해졌다.
겉으로만 봐서는 중혁이 마치 검으로 달려들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내 검이 닿기 전에 적을 끌어들이고…… 베이게 하는 것! 그것이 종남이 품은 진정한 중(重)입니다!
‘이것이 네가 말하던 중검이었지.’
스걱!
광소산의 검은 마침내 중혁에게 닿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연무장 위로 짙은 붉은 꽃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