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27화
77장 무인쟁패(武人爭覇)(3)
본선 3일 차 밤.
약관전을 비롯해 이립전과 연륜전의 마지막 날 진출자까지 전부 정해졌다.
대부분 남을 만한 이들만 남았다는 게 정설이었다.
“사람들 반응은 어때?”
“엄청납니다. 객잔에 가도 사람들 대부분은 무림대회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와 관련된 소설도 써져서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얼핏 들어보니 무림대회에서 꽃피는 금단의 사랑이라는데 굳이 찾아서 일어볼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지막 날의 최종 승자와 그 후의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립전에서 우승 후보는 크게 4명입니다. 사천당가의 당웅, 제갈세가의 제갈위영, 청성파의 벽호일…… 무명악인(無名惡人) 권진입니다.”
“……뭐?”
처음 두 명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던 진백천이 마지막 이름을 듣고 움찔 놀랐다.
“아. 회주님께서는 그때 자리를 비우셔서 못 보셨죠. 무명악인 권진이라고 아주 악독한 놈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찌나 손속이 음흉한지 보는 내내 소름이 끼치는 악인입니다.”
오죽하면 무명이었던 자의 별호에 악인이라고 떡하니 박혀 버렸다.
‘그렇게까지 심해 보였나?’
결코 상대를 무시할 의도가 없던 진백천으로써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그 경기를 봤던 당소예마저 못된 놈이라며 권진을 신나게 욕했었다.
바로 앞의 진백천이 그 권진 본인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쯧. 역변한 얼굴이 그렇게 못되게 보였나?’
진백천은 연륜전의 진출자들을 살펴봤다.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굵직굵직한 이름이 가득했다.
“사패천의 사자혁, 화산파의 유일환, 무당파의 현강, 후우. 이름만 봐도 다들 엄청난데?”
이 중에는 이립전에 참여 가능한데도 연륜전을 참가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연령에 상관없이 누가 오든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부 나이와 상관없이 전부 이겨내며 올라왔다.
그들끼리 붙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우승 후보는 당연히 이들 중 하나겠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또 누가 있어?”
춘식은 새로운 명단을 꺼내 건넸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이름들만 적혀 있었다.
“매화방의 검노. 비우무관의 당초우?”
누가 봐도 가짜로 만들어낸 소속에 가명이었다.
‘이런 이들이 있었나?’
자신이 아는 이들의 비무만 살펴보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름 없는 자들만 본 것이 실수였다.
더구나 이들은 대부분의 비무를 전부 일수, 혹은 이수에 끝내고 올라왔다.
이미 관중들의 뇌리에는 인두로 새겨지듯 강하게 남은 이름들이었고, 우승 후보로 뽑히는 것은 당연했다.
‘회귀 전에는 이런 자들의 이름을 본 적이 없어. 그렇다면 전에 없던 새로운 자들이라는 말이겠지.’
“흐음. 사자혁이 검노와 맞붙고. 유일환이 당초우……?”
마화린은 운이 따랐는지 가장 실력 없는 자와 맞붙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진표에도 미리 손을 써놓을 걸 그랬나?’
갑자기 복잡해진 상황에 지금까지와 다르게 쉽게 돈을 걸지 못했다.
가장 크게 돈을 걸어야 할 때이지만 누구 하나 쉽게 고를 수 없었다.
만약에라도 마지막 선택이 틀린다면 지금까지 딴 돈은 물론이고 자신의 돈도 일부 까먹게 되었다.
“흐음. 연륜전은 우선 대기해. 아무래도 변수가 너무 많아.”
“그렇다면 이립전만 하겠습니다.”
이립전의 대진표를 보니 진백천의 첫 상대는 제갈세가의 제갈위영, 그리고 이긴다면 청성파의 벽호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딱히 지고 싶은 상대들도 아니란 말이지.’
“흐으음. 그래.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지. 권진에게 전부 걸어.”
“……권진, 말입니까? 이자는 조금…….”
“왜 사람들이 미워하니까 돈도 안 걸고 최고의 배당률이잖아.”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인기 최악인 권진의 배당률은 무려 132배.
이기기만 한다면 132배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실력은 잘 몰라도 인성이 못되어 먹은 자 아닙니까?”
“……그걸 네가 어떻…… 크흠.”
진백천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대진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자의 상대들을 보니 아주 대진운이 좋아. 다른 이들은 강자끼리 맞부딪치기 때문에 한 번씩 이긴다고 해도 바로 이어지는 비무에서 힘겨워할 거야.”
“그렇긴 하죠.”
“나 믿고 권진에게 걸어봐. 혹시 알아? 이자가 우승할지.”
춘식은 마지막까지 인성을 운운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다음 경기에서부터는 예의 좀 보이고 그럴듯하게 이겨야겠어.’
안 그랬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권진이라는 이름이 십대악인에 들어버릴지도 몰랐다.
진백천은 늦은 밤이 되었을 때, 잠들지 않고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혹시 몰라 몸 주변에 사패천의 경매장에서 구매했던 은형비단(隱形緋緞)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은형비단은 진백천의 내력을 흡수하자 마치 그림자처럼 어두워지며 인기척을 지웠다.
‘호오. 제법 괜찮은데? 비싼 값은 하네.’
“하하하하!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들 한잔하자고!”
정도회 곳곳에서는 무림대회에서 떨어진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그들이 마시는 술은 전부 진백천이 미리 사들인 것들이었다.
‘술장사도 쏠쏠하겠어.’
이들을 지나쳐 그가 향하는 곳은 매화방의 검노와 비우무관의 당초우가 묵고 있는 숙소였다.
그들의 숙소는 각기 떨어져 있어서 가장 먼저 당초우가 있는 곳부터 들렸다.
‘벌써 잠들었나?’
불 꺼진 방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지켜보던 진백천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무리 궁금하다 해도 도둑처럼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시야에서 멀어지기 직전.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숙소 앞에 뚝 떨어졌다.
‘으음?’
흑의를 입고 조금은 왜소해 보이는 자였다.
그자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진백천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일다경이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나온 것은 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당천기? 네가 거기서 왜 나와?’
당천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백천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 * *
놀란 쥐새끼처럼 도망치던 당천기가 멈춘 것은 바로 대연전 앞이었다.
그곳까지 오자 안심했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뭐냐?”
“허억! 누, 누구냐!”
진백천은 은형비단을 벗으며 당천기를 쳐다봤다.
그는 상대가 진백천인 것을 알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크흠. 백천이군. 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나야말로 묻고 싶어서 쫓아왔는데? 방금 내가 조금 이상한 상황을 봤는데 설명을 들어볼 수 있을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진백천은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상단전에 내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정확한 한 문장을 내뱉었다.
“비우무관의 당초우.”
“…….”
-……설마 가주님이 당초우라는 가명으로 연륜전에 참가하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건가?
당초우의 존재가 꽤나 대단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지만, 당염이라고 까지는 진백천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전부 일수에 끝나 버린 거구나.’
무려 암왕의 일격이었다.
당금 강호의 그와 손속을 나눌 이들은 많지 않았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당 가주님이 대체 왜 연륜전에 참여하신 거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설마 돈 때문은 아닐 테고.”
말꼬리를 길게 늘이자 역시나 당천기의 속마음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아. 그러게 말이야. 그깟 차기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황금패 따위가 무어라고. 그래 봤자 차기일 뿐인데 말이야. 그놈의 허영심 때문에 내가 제명을 못 산다니까!
‘패 때문이었다니.’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가명까지 만들어 참여했다는 게 참으로 재밌었다.
하지만 그간 무림이 암흑기였던 것과 정파의 무인들이 무시당하던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진짜 모른다니까.”
“쯧. 그러면 친구 얼굴 보고 한번 그냥 넘어가 주지.”
“……고맙다. 백천.”
진백천은 알아낼 것은 전부 알아냈으니 괜히 생색을 내며 돌아섰다.
하지만 이내 멈춰 서고 당천기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까 왜 너는 참가 안 했어? 너 정도면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하지 않았나?”
빈말은 아니었다.
진백천에게 자주 당하긴 했지만 꾸준히 강해지는 인물 중 하나였고, 추후 독인(毒人)이 될 당천기였다.
당천기는 무심결에 한숨을 내뱉으며 진백천을 올려다봤다.
“……너라면…… 후우,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만 생각해 줘.”
아마도 암왕인 당염이 나서는데 자신이 낄 자리가 있을까 해서 지레 포기한 모양이었다.
“쯧. 네가 고생이 많네. 언제 술이나 한잔하자.”
“그래. 기다리지.”
진백천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당초우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이제 매화방의 검노를 확인할 차례였다.
‘매화방 그리고 검노.’
진백천은 이 둘의 조합에서부터 마음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이름이 존재했다.
하지만 도저히 말이 되지 않기에 그 사실을 부정했다.
‘당천기와 다르게 유일환은 무림대회에 참가하기까지 했잖아?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서서히 숨을 차오를 때쯤 마침내 그가 머무는 숙소에 도착했다.
달빛이 내리쬐는 곳 백의의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자가 들고 있는 검이 너무나도 눈에 익었다.
아니,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검이었다.
‘하늘을 베어냈으니까.’
“…….”
“왔나?”
천천히 돌아서는 자는 바로 화산신검이었다.
진백천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니, 무슨 말도 없이 이렇게 오십니까?”
“그래야 조용히 다닐 수 있지 않겠나?”
주름진 얼굴로 웃는 검신은 화산파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주화입마의 여파를 대부분 떨쳐낸 것으로 보였다.
“조용히 다닐 필요가 있으십니까?”
“있지. 자네는 모르겠지만 마교를 제외하고도 나를 노리는 자들이 많아.”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것이 주는 상징성은 컸다.
화산신검을 꺾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목숨을 거는 미친놈들이 있을 만큼 말이다.
“그래도 오신다고 넌지시 말씀이라도 하셨으면 제가 모셨을 텐데요.”
“당금 강호에 자네처럼 바쁜 이가 어디 있다고. 오히려 자네가 이목을 끌어줘서 편히 다닐 수 있었지.”
화산신검은 진백천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탁자에 잔을 두 개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물이 끓어올랐다.
진백천은 아닌 밤중에 화산신검과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검군과 따로 오셨나 봐요?”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왔지.”
그 정도는 이미 파악한 진백천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숙소 근처에는 화산파 무인들이 곳곳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어르신이 나설 정도면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지긴 벌어지겠네요.”
진백천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화산신검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나보다 자네야말로 더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정도회의 바뀐 모습을 보고 화산파 무인들을 데려온 내가 우스워질 지경이었어.”
사실 화산신검이 이곳에 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마교의 움직임을 살피려던 그가 무언가를 포착하고 정도회로 온 것이다.
무림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것도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포착이라면?”
“자네라면 알지도 모르겠군. 구악정(九惡井). 그 괴물들이 이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