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26화
77장 무인쟁패(武人爭覇)(2)
중혁의 것과 다르게 아영의 눈은 빛났다.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작, 입가에 걸린 미소.
하다못해 들고 있는 그녀의 보검조차 달라 보였다.
중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나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일까.’
중혁이 사는 세상이 진흙탕 속의 검은 세상이라면 아영은 하늘을 활공하는 매 같다고 여겨졌다.
휘이익-
아영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방금 봤던 개방의 아이보다 더 강할 것이 분명했다.
중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마인을 확인했다.
살의가 득한 눈동자는 자신에게 승리를 강요했다.
조금 전 그가 말했던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지면 전부 죽는다.’
마화린은 냉혹한 자였다.
거짓말 따위는 절대 하지 않고 자신이 한 말은 꼭 지켰다.
그것이 안 좋은 쪽이면 더더욱.
그렇기에 자신은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포권을 말아쥐었다.
“……저는…….”
문득 사혈방을 말하려던 중혁은 그 단어를 속 깊숙이 파묻었다.
자신 스스로를 마화린과 같은 소속이라 소개하려니 속이 울렁거려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중혁입니다.”
“손이 떨리잖아. 너무 긴장하는 거 아냐?”
아영은 이런 중압감이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중혁의 손이 떨리는 것은 한낱 지켜보는 관중들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진다면 함께 수련하고 지냈던 아이들이 전부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겨야 돼.”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이기지 않으면…….”
중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전부 죽어.”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뀌었다.
* * *
첫 공격은 중혁으로부터였다.
그는 방금 구촉무인과 비슷하게 달려들었지만, 짐승보다는 한 자루의 검에 가까웠다.
극도로 빠르게 뻗어오는 손끝이 아영의 얼굴을 노렸다.
첫수부터 급소를 노리며 끝낼 생각이었다.
“어림없지!”
아영은 이미 비무에 들어가기 전부터 단단히 준비한 상태였다.
구촉무인들이 기괴할 정도 빠르다는 것쯤은 파악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진백천이 항상 중요시하던 관찰을 한 덕분이었다.
카앙!
손과 검이 맞부딪쳤음에도 묵직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아영은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것을 느끼며 중혁의 내력의 자신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해!’
아영은 다급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재차 뻗어오는 주먹을 검의 옆면으로 막아냈다.
“……이겨야 돼.”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중혁이 공격을 하면 아영은 막아내는 수순이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아영이 익힌 파초식은 무초식의 중혁에게는 상성이 극악이었다.
익숙해지려고 해도 본능적인 움직임은 아영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으윽!”
손가락 끝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며 갈비뼈를 건드렸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지만 뼈는 너무나도 쉽게 부러졌다.
대련을 지켜보던 진백천이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아영은 더 싸울 수 있다는 듯이 검을 들어 올렸다.
“너 제법 하는구나?”
“…….”
중혁의 시선이 아영의 옆구리를 살폈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걱정과 슬픔이었다.
아영은 공격한 놈이 그런 눈빛을 띠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약 내가 여자라 그딴 눈이라면 너 박살 내버릴 거야.”
아영은 지금까지 제한하고 있던 내력을 전부 검으로 쏟아부었다.
두 눈이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어갔다.
조금 전 구촉무인을 진정시켰던 파사의 기운이었다.
“난 무인이야. 이깟 거 별거 아니라고.”
“네가 여자라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져주면 안 돼?”
“그딴 소리 할 거면 닥쳐!”
방어만 하던 아영이 땅을 박차며 검을 뻗었다.
파초식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검왕과 대련하며 얻은 경험이 있었다.
팔을 향하던 검 끝이 중간에 방향을 틀며 중혁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피잇-
“이제 비슷해졌지?”
아영은 의기양양했지만 구촉비전을 익힌 자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피가 맺히던 살이 금세 아물며 딱지가 졌다.
중혁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아영을 올려다봤다.
“미안해.”
그 말과 함께 중혁의 몸이 한 차례 더 빠르게 가속되었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고?’
얼핏 드러난 모습에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움직임이 그가 해낼 수 있는 최상의 속도일 터였다.
아영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중혁은 그녀의 품을 파고든 상태였다.
“으윽! 너……!”
묵직한 손날이 목덜미를 내리쳤다.
투욱-
아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으며 축 늘어졌다.
중혁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으며 연무장 아래로 향했다.
“승자 사혈방 중혁!”
분명 승자는 그였음에도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꽉 다문 입이 충혈된 눈이 마인을 향했다.
“약속은 지키십시오.”
“물론이다. 덕분에 버러지 새끼들이 다시 한번 목숨을 이어나가겠군.”
중혁은 비웃는 그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져가는 그를 지켜보며 진백천은 자신과 싸웠던 일금영을 떠올렸다.
‘흐음. 구촉비전을 제대로 익힌 모양인데?’
급속도로 빠르게 회복되는 상처.
강철같은 신체.
가속되는 움직임.
‘딱히 부작용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구촉무인과 다르게 충분히 이성을 가진듯했고.’
진백천은 중혁이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넣으며 아영을 살폈다.
갈비뼈를 제외하면 단순히 기절한 것뿐이었다.
“쯧. 상성이 좋지 않았어.”
“그것도 그렇지만 저 아이가 강했지!”
검왕은 중혁의 움직임을 보고 놀란 듯 보였다.
그러면서 상장이 결승에서 마주치게 될 이는 중혁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아영이 크게 실망하겠군.”
그 이후의 경기는 초반의 것들에 비해 심심하게 끝이 났다.
진백천의 예상대로 광소산이 다른 구촉무인을 꺾었고, 상장이 남은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오늘의 비무는 전부 끝이 나고 총 네 명의 진출자가 뽑혔다.
개방의 소걸아와 사혈방의 중혁, 종남파의 광소산, 마지막으로 정도회의 상장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걸아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다음 비무를 치를 수 없어서 기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3명인가.’
3명 다 전부 우승자로서 부족한 실력이 아니었다.
진백천이라고 해도 쉽게 누가 이길지 점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배당으로도 쉽게 나타났다.
“가장 배당률의 높은 게 상장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얼마 전까지 수위였다는 말이 돌다 보니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러면 상장에게 은자 2만 냥을 걸어.”
“……알았습니다.”
춘식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확신을 갖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실 진백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스승인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
원래 스승이란 그런 존재였다.
진백천이 은자 2만 냥을 걸자 순식간에 상장의 배당이 낮아졌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이들의 것이 높아지며 돈이 몰리는 것도 빨라졌다.
마감이 끝나기 전에는 상장의 배당은 오히려 돈을 걸기 전보다 더 높아져 있었다.
* * *
얼마 뒤 깨어난 아영은 모두의 걱정과 다르게 무척이나 씩씩했다.
자신이 졌지만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그만큼 강했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 한쪽에 남은 아쉬움을 지우며 상장의 우승을 강하게 빌어줬다.
“사제! 못 이기면 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저.”
“최선은 누구나 다하잖아! 결과를 보이라고 결과를!”
아영은 갈비뼈가 부러졌기에 수련은 물론 제대로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상장이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상장은 그런 아영을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했다.
“사저를 그렇게 만든 놈은 제가 꼭 복수하겠…….”
“복수가 아니라 우승!”
“……우승하겠습니다.”
그렇게 약관전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만큼 다른 대련도 본선이 열렸다.
이립전의 본선 진출자는 총 16명이었고 연륜전은 11명이었다.
두 분야의 참가자는 비슷했지만 진출자가 이토록 차이가 난 이유는 비무의 격렬함 때문이었다.
나이제한이 없는 연륜전은 기권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끝장까지 가는 경우가 있었고 부상도 많았다.
“남은 이들이 어떨지 궁금하네.”
이립전의 본선 진출자 12명 중의 하나는 진백천이었다.
권진이라는 가명으로 참여했지만 금방 탈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본선까지 나와버렸다.
‘상대가 전 비무의 여파로 갑자기 기권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진백천은 비무가 시작하기 전에 잠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근골을 축소하며 권진으로 변신했다.
‘대충 싸우는 척하다 져버려야지.’
연무장에 오른 진백천은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다.
상대를 확인한 그는 분위기의 이유를 깨달았다.
“…….”
상대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한쪽 발을 절뚝거리는 것이 얼마나 부상이 심한지 알려줬다.
‘아니. 부상이 이렇게 심하면 차라리 기권이라도 하지.’
진백천의 속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는 대차게 외쳤다.
“대형산파의 고당춘이오! 몸이 이 꼴이지만 한 명의 무인으로써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 정정당당한 비무를 부탁드리오!”
“……권진입니다.”
진백천은 가볍게 포권을 쥐며 어떻게 질까에 대해 고민했다.
저자의 몸 상태를 보아하니 작정하고 공격하면 곧바로 끝이 날 게 분명하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긴장한 척 실수하면서 밖으로 굴러떨어져 버릴까? 아니면 실은 나도 부상이 심했던 척을 해?’
비무가 시작되자 고당춘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당차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반대편 발이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고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어어?! 넘어진다!”
재수 없게도 그가 향하는 방향은 연무장 밖이었다.
진백천은 다급히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으윽! 대형산파 제자 고당춘! 이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것이 기회를 노리는 거라 생각했는지 고당춘이 검을 뻗었다.
하지만 망가진 손에 무기가 제대로 고정될 리 없었다.
검은 손에서 쑤욱 빠져나가며 진백천의 손에 잡혔다.
‘쯧 떨어지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동시에 진백천의 손이 고당춘의 옷을 붙잡았지만.
옷이 너무나도 쉽게 찢기며 알맹이만 쏙 빠져나갔다.
“…….”
고당춘은 반쯤 벌거벗은 채로 연무장 밖을 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며 쳐다봤다.
“잔악한 자로군! 부상을 입은 자의 무기를 빼앗고 옷을 벗겨서 떨어뜨리다니!”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자야!”
진백천이 뒤늦게 그게 아니라며 검을 다시 건네려 했지만 형산파의 고당춘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재수 없게 머리부터 떨어지며 정신을 잃은 것이다.
“……설마 지금 저자. 자신이 쓰러뜨린 자를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는 건가?”
“자네 말이 맞군! 웃고 있어!”
“대체 어디까지 잔인해지려고 하는 거지?”
‘내가 언제 웃었다고?’
웃었다기보다는 그저 근육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바꾼 탓에 경련이 잦게 일어날 뿐이었다.
“권진이라. 저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놔야겠어!”
정파에 속한 이들은 경멸의 시선을 보냈고 반대로 흑도나 사파에 속한 이들은 호기심 섞인 눈빛을 보냈다.
진백천은 어정쩡한 상황에 한숨을 쉬며 검을 내려놨다.
그러자 검에 금이라도 가 있던 것인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젠장.’
누가 봐도 일부러 행패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승자 권진!”
진백천은 도망치듯 연무장을 내려왔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인상에 권진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