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24화
76장 달아오르는 정도회(4)
새로운 신분을 가진 것은 무척이나 속이 편했다.
진백천이라면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으니까.
그 대표적인 것이 마음에 안 들면 전부 주먹으로 후드려 패는 것이었다.
‘그것만큼 속 시원한 일도 없지.’
만약 당소예가 들었다면 회주님은 원래부터 그러지 않았냐고 할 테지만 나름 참아왔기에 그 정도였다.
그동안 회주전에 박혀 있으면서 쌓인 답답함을 풀려면 누구 하나 열심히 후드려 패도 부족했다.
‘그게 바로 네놈이고.’
진백천은 목을 우둑우둑 풀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권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행동할 생각이었다.
“허허. 역시 나이가 어리다는 건 좋은 거군. 이렇게 생각 없이 주먹을 뻗을 생각부터…… 커헉!”
진백천의 주먹은 방금 예고한 대로 허공을 가르며 정확히 주둥이를 향했다.
떠벌리던 것과 달리 나름 실력이 있는 놈인지 짧은 사이 손을 들어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주먹에 밀리며 이빨이 부러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건방진!”
“그래 봤자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말끝마다 왜 건방지다고 하는 거야?”
진백천은 재차 빠르게 달려들며 질풍처럼 주먹을 내뻗었다.
꼰대는 그대로 주먹에 두들겨 맞으며 김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다 이내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커억! 제, 제법…….”
“제법은 무슨.”
쓰러지기 전까지 나불거리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승자 권진!”
진백천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사방에서 심심찮은 박수 소리는 덤이었다.
* * *
첫날의 대회 일정이 끝나고 진백천은 자신의 방에서 춘식과 단둘이 만남을 가졌다.
춘식이 몰래 숨겨온 주머니에는 다음날 대진표와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다소 흥분한 기색이었다.
“회주님. 5천 냥 걸었던 것이 무려 7,800냥으로 늘었습니다!”
“뭐 그걸로 흥분하고 그래. 그거야 겨우 시작인데.”
춘식은 단 하루 만에 3,000냥 가까이를 벌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진백천을 보며 감탄했다.
왜 약왕당주나 다른 장로들이 그를 보며 재신(財神)이라 칭하는지 알 것 같았다.
“대진표 펼쳐봐.”
진백천은 오늘 경기 결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부 그가 예상한 대로 되었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어 보이네.”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강자끼리의 대전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충분히 그의 예상대로 진행될 거라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은자 1만 냥으로 가보자.”
“허억! 1만 냥입니까?”
반대했던 저번과 달리 춘식은 놀라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에 액수를 갑자기 늘리는 것은 내기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무림대회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고 많은 돈을 넣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배당률이 더 높아질 거야. 돈은 쌓이는데 대련자는 줄어드니까.”
무림대회는 총 9일 동안 진행이 되었다.
그중에 앞의 3일 동안은 예선전과 다름없었다.
나머지 6일 동안은 약관전, 이립전, 연륜전을 번갈아가면서 진행했다.
참가자들이 조금이라도 회복이 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줄 때고 지금은 단지 가볍게 맛만 보는 정도였다.
“네. 회주님. 그러면 이렇게 돈을 걸겠습니다.”
“응. 수고해.”
춘식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하암. 이제 조금 눈 좀 붙여볼까?”
밤도 깊어지고 대충 일 처리도 끝냈겠다 쉬려 했지만.
“회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림없었다.
춘식이 나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강량호가 찾아왔다.
이런 밤중에 급히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급하다는 소리였다
“응. 들어와.”
강량호는 당소예가 내주는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빠르게 이야기를 꺼냈다.
“회주님이 말씀하신 자들을 찾았습니다.”
“그래?”
진백천은 다소 놀랐다.
오마군종대의 마인들을 찾아보라 시킨 것은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쉽게 찾아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강량호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을 파악한 것은 수라검대의 무사들이 아니라 정도회 주변 마을 사람들이었다.
“저희의 눈은 속여도 민간인들의 눈은 속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곳은 생겨난 지 얼마 안 되었고 대부분 정도회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었다.
외부인이 오면 그만큼 민감했다.
마인들이 평범한 상단이나 낭인들로 분장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눈까지 완벽히 속일 수는 없었다.
“그래? 규모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은 안 됐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100명이 넘어갑니다.”
여전히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었고 특정 구심점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령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놈들을 쫓아내겠습니다.”
“아직 다 모이지도 않았을 거야. 괜히 건드렸다가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면 오히려 우리만 더 힘들어져.”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이 무섭지, 눈앞에 훤히 드러난 놈들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군대에 가까운 오마군종대는 그 수가 모여야 힘을 발휘하는 단체였다.
“우선은 다른 움직임이 나타날 때까지 지켜봐. 놈들도 생각이 있는 한 무림대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거야.”
아무리 오마군종대라고 해도 현재 정도회에 모인 전력을 상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 * *
내몽고 동승(東勝).
호북과 상당히 떨어진 변방인 이곳은 오랑캐들과의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을 맡는 것은 대부분 낭인이었다.
우적우적-
낭인 대장의 막사.
얼굴을 붉게 칠한 이들이 둥글게 앉아서 말고기를 뜯어 먹는 중이었다.
방금까지 전투를 하고 왔는지 얼굴의 피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서조족도 끝이다.”
“그러면 중원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글쎄.”
고민 중인 듯 보이는 대장의 태도에 낭인들이 입을 삐죽였다.
중원에서 제집처럼 살인을 저지르며 즐기던 그들의 절반을 베어내고 이곳으로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닌 화산신검이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고 정상으로 돌리기까지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화산신검이 폐관에서 나오지 않자 슬쩍 돌아가려 하던 그들은 갑자기 재등장한 그 이름에 출렁였다.
“말도 안 통하는 서조놈들을 베는 것도 지겹습니다. 떽떽거리는 비명만 들으니 재미도 없고 말입니다.”
“전처럼 산적으로 위장해서 상단을 전부 죽여 나무에 매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 것보다 화적촌에 가서 가둬두고 불을 피워 죽이는 게 더 재밌지. 크크큭!”
“아니면 오랜만에 인간사냥이나 합시다! 강한 놈으로요!”
이들은 평범한 이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냈다.
더 끔찍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전부 진심이며 실제로 해왔던 것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대장이라 불린 자는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다가 말고기를 내려놨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부하들도 화산신검의 무서움은 살과 뼈에 새겨넣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건재하는 한 전처럼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휘이이익-
그는 특정한 전서구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듣고선 천막을 찢으며 뛰어올랐다.
그의 신형은 한순간에 3장 높이로 뻗어 나가며 검은색의 전서구를 움켜쥐었다.
콰드득-
전서구가 손아귀에 들어오자 뼈와 살이 부서지며 즉사했다.
그는 곧바로 다리에 메인 서신을 확인했다.
어느샌가 그의 주변에는 다른 낭인들이 모여선 후였다.
그 수가 무려 300여 명에 달했다.
“이제 중원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군. 아까 말했던 놀이를 전부 해볼 수 있겠어.”
“그렇다면 드디어 허락입니까? 크크큭.”
“이곳에 처박혀 있는 것도 슬슬 짜증 났는데 잘 됐습니다!”
대장은 기뻐하는 이들을 둘러봤다.
그의 손에서 전서구의 피가 뚝뚝 흘렀다.
“그냥 가면 재미없으니 우리가 오기 전과 똑같이 만들어놓고 떠난다.”
“똑같이 라면?”
“그동안은 서조족의 목을 베었으니 균형을 맞추려면 황군의 목을 베어야겠지.”
“크크크큭. 좋습니다! 역시 대장입니다!”
그들은 각기 무기를 집어 들고 붉은 가면을 뒤집어썼다.
가면은 각각 9개의 마귀의 얼굴을 본뜬 것이었다.
“뭐, 뭐 하는 거냐! 당장 멈춰!”
“커헉!”
“낭, 낭인들이 공격한다! 모두 조심……!”
콰드득!
“그래. 이렇게 알아듣게 비명을 질러야 재밌지! 크크큭. 안 그렇습니까 대장?”
가장 큰 가면을 쓴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로 악귀들이 짐승처럼 따랐다.
구악정(九惡井).
모든 죄악과 상처를 영광으로 삼는 정신 나간 놈들이 드디어 변방에서 벗어났다.
목적지는 정도회였다.
* * *
무림대회 4일 차.
진백천은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서 장로들을 비롯해 몇몇 인물들과 대회를 구경 중이었다.
지난 3일 차까지는 각각의 연무장에서 나눠 진행되었지만 4일 차부터는 달랐다.
걸러질 이들은 전부 걸러졌으니 가장 큰 연무장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본선이지.’
그렇다 보니 관심 있는 자들은 이렇게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봤다.
예선전보다는 조금 더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오늘은 약관전(弱冠戰)이라고 해도 관심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네.”
“맞습니다. 오히려 더 열렬히 응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약관전에는 총 8명의 아이가 본선에 진출했다.
그중에는 상장과 아영은 물론 광소산과 마화린이 데려온 구촉무인 3명도 포함이었다.
그들은 한 자리에 서서 진백천을 비롯해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한번 대진표를 뽑았다.
예선전과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름이 나올 때마다 탄성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르신은 누가 우승할 것 같으세요?”
“우승? 흐음. 어렵군.”
검왕은 당연히 아영이나 상장을 고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자꾸 구촉무인 중혁과 광소산을 번갈아 봤다.
권진으로 대회에 몰래 참가했던 그와 달리 검왕은 모든 경기를 전부 지켜봤다.
그렇기에 그들의 실력을 대부분 파악했다.
“가위, 바위, 보처럼 각기 다른 면이 있어서 한 명으로 뽑기 어렵겠군.”
“검왕께서는 검과 달리 꽤나 우유부단한 모습이 있군. 나는 한 명 정했다.”
당염은 묻지도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한 아이를 짚었다.
의외로 상장이었다.
“끌끌. 내가 회주를 모를 줄 아느냐? 대회가 시작하기 전에 저 아이에게 친히 검을 줬다지?”
“그런 건 또 언제 들으셨어요?”
검을 제작하고 구매하는 데 상단을 이용했으니 분명 당천아에게서 들었을 터였다.
“검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으니까 준 거예요. 스승으로서 그 정도는 해야죠.”
“내가 지금까지 봐온 회주는 절대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검을 줬다는 건 저 아이가 어떻게든 우승을 할 거라는 뜻이겠지!”
한마디로 상장이 우승할 거라 고른 것은 진백천의 행동을 보고 고른 것이었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였지만 주변은 의외로 제법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검왕 마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회주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제가 그렇게 치밀한 사람처럼 보여요?”
“그거야 오늘과 결승 결과를 보면 알 수 있겠지!”
진백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줄였다.
‘그나저나 황충은 어디를 간 거지?’
원래대로라면 그의 바로 오른편에는 황충이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갑자기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픈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황충이었기에 더욱 걱정이었다.
‘황충 같이 강한 무인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연무장을 내려다봤다.
가장 첫 비무는 구촉무인 중 한 명과 개방의 제자였다.
‘아무래도 구촉무인이 이기겠지?’
진백천의 시선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마화린에게로 향했다.
그는 특유의 희멀건 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누구를 보는 거지?’
그의 시선은 아주 잠깐이지만 청성파의 무인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떨어졌다.
그 눈동자에 일렁이듯 스치고 지나간 것은 조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