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23화
76장 달아오르는 정도회(3)
상장은 긴장했는지 눈앞의 아이가 한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만이 머리를 멍하니 울렸다.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장소에서 본 것이 처음이고, 오로지 자신만 쳐다보는 모습도 처음이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환호 소리 사이에 언뜻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제! 정신 차려!”
“……사저?”
웬일인지 아영의 목소리는 그 사이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뒤돌아보니 진백천과 함께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 차리고 상대에 집중하라고!”
“…….”
상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상대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명백하게 자신을 비웃는 중이었다.
“너 그래서 싸울 수나 있겠냐? 지금이라도 그냥 내려가지 그래?”
“문제없어.”
“아니. 내가 문제 있어서 그래. 첫 대련인 만큼 화려하게 각인시켜야 하는데 네까짓 놈이 첫 상대면 너무 싱겁잖아?”
상장을 흥분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그런 말 따위로 상장이 흥분할 리 없었다.
돌같이 단단한 심성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쯧. 나는 감숙 무자방에서 온 이채도다. 앞으로 유명해질 이름이니까 잘 기억해라.”
“나는 정도회의 상…… 으윽!”
상장의 소개가 다 끝나기도 전에 이채도는 허리춤의 도를 휘둘렀다.
길게 꺾인 곡도(曲刀)가 아슬아슬하게 상장의 앞섶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아. 미안. 나는 가치 없는 자의 이름은 듣지 않거든!”
“…….”
상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묵철의 차가움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들끓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두 눈이 먹잇감을 포착한 호랑이처럼 매섭게 가라앉았다.
“뭐야? 그렇게 쳐다보면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이채도는 바닥을 박차며 낮은 자세로 곡도를 휘둘렀다.
어린 나이였지만 도를 휘두르는 자세가 상당히 실전을 많이 겪어본 모습이었다.
‘사람을 죽여본 티가 확실히 나. 급소를 공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상장은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앙!
각각의 무기가 맞닿자 이채도가 가볍게 신음을 냈다.
무기에서 밀려오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콰악!
상장은 평소 진백천이나 검왕과 대련할 때처럼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검을 강하게 밀쳐내며 검로를 이어갔다.
순식간에 세 방향에서 뻗어오는 검에 이채도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쯧. 멍청하긴. 상장에게서 도망칠수록 끝인데.”
아영의 말대로였다.
상대가 도망칠수록 상장은 더더욱 몰아붙였다.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듯 거칠게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어딘가 검왕을 닮아 한층 더 날카로워진 광풍칠성검법이 이채도의 전신 요혈을 금방이라도 파고들듯 뻗어왔다.
“히이익! 자, 잠깐!”
이채도가 뒤늦게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대련에 집중한 상장은 멈추지 않았다.
지켜보던 진행자가 막아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만해라! 너의 승리다!”
“아. 감사합니다.”
상장은 검을 집어넣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채도의 전신은 파고들었던 검으로 옷이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
상장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에게 포권을 쥐며 당당히 말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나는 정도회의 상장이다.”
전과 달리 이채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와아! 상장 멋있다아!”
“매일같이 수련한다더니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냐! 으하하하!”
상장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때 얼핏 관중들 사이에 흐뭇하게 웃고 있는 진씨 아저씨가 보인 것 같았지만 다시 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봤나?’
* * *
진가소, 흔히 진씨 아저씨라 알려진 그는 상장의 대련이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췄다.
상장에게 모습이 들키기 때문이라기보다 진백천 때문이었다.
‘괴물 같은 놈.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 나를 알아봤다 이거지?’
진백천은 그를 확인하자마자 기이한 기세를 풍기며 그를 압박하려 했다.
어떻게든 붙잡겠다는 뜻이었다.
진가소는 자신을 얽매는 무형의 기운을 끊어내며 자리에서 도망쳤다.
‘쯧. 이런 기운은 언제부터 사용한 거지?’
혀를 차는 것과 달리 진가소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진백천이 자랑스러워서였다.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그의 신형이 물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조금은 걱정했는데 저 정도면 마음 놓고 상장을 맡길 수 있겠어.’
진소가는 정도회 무사들의 이목을 피하며 정도회 내부를 걸어나갔다.
그리고 곧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곳은 다름 아닌 회주전이었다.
그는 마치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사람처럼 익숙하며 회주전의 한 측 벽면으로 걸어갔다.
‘이쯤이었는데?’
벽면을 더듬거리자 한쪽이 보일 듯 말 듯 눌리며 들어갔다.
그러자 바닥에서 뭔가 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딸칵-
동시에 미세하게 바닥이 벌어지며 틈이 생겨났다.
“됐군.”
진소가는 벌어진 그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닥이 벌어지며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생겨났다.
회귀를 여러 차례 경험한 진백천조차 모르던 비밀 통로였다.
“후우. 망가진 몸을 회복하느라 지금까지 꽤나 고생했다. 이제 전부 끝낼 시간이야.”
그의 신형이 입구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내려갔다.
그러자 언제 열렸냐는 듯이 입구가 다시 닫히며 틈이 사라졌다.
쿠웅-
비밀 통로에 들어온 진가소는 극도로 경계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인기척 하나 없는 통로일 뿐이었지만 이 끝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잘 아는 그였다.
인외(人外)의 괴물.
자신을 죽음 가까이 이르게 만들었던 놈의 신체가 봉인되어 있었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 지금까지 몸을 숨기고 회복되기까지 기다려왔다.
“분명 마교의 간자놈도 이곳에 대해 알고 있을 거다.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진가소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마교의 간자 놈부터 처치할지 지하고에 들어갈지 몹시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지하고였다.
“내가 놈을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그 이후의 짐은 백천이에게 넘어갈 테니까.”
20살의 나이에 갑자기 회주가 되게 만든 것도 미안했다.
몰래 정도회의 수위로 일을 하면서 그를 지켜봤지만 걱정한 것과 달리 잘해냈다.
아니, 단순히 잘해냈다는 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그는 뛰어났다.
“내가 회주로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하고 있지.”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앞에 나타나기가 어려웠다.
어딘지 진백천을 닮은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며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나는 내 할 일을 끝마치면 될 뿐이야.”
지하고에 봉인되어 있는 괴물.
그놈을 죽이는 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사명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것을 실패하더라도 이곳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전 회주였던 그만이 아는 비밀 중 하나였다.
화르르륵-
그때였다.
그의 양옆으로 걸려 있던 횃불에 스스로 불이 붙으며 주변이 밝아졌다.
“……괴물새끼. 눈치챘군.”
마치 오래된 친구를 초대하듯 횃불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서 지독한 마기가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그 끔찍한 기운에 진가소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멈춰 섰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마기를 대면하자 다시 과거의 기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는다.”
진가소는 이를 악다물며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씩 지하 아래로 걸어갔다.
철퍽-
바닥에 고인 더러운 물이 악몽처럼 그의 발을 적셨다.
* * *
진백천은 사라진 진가소의 기척을 끈질기게 쫓았다.
진가소는 그를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했지만 진백천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 어떻게든 붙잡아서 정체를 밝혀내고 만다.’
진가소의 주변에 꼬리표처럼 남은 그의 호무살(虎武殺)의 기운이 흔적처럼 남아 일렁였다.
그는 그것을 따라 이동하다 회주전으로 이어진 것을 보고 놀랐다.
진백천이 회주전으로 들어서자 총관과 춘식이 나와서 그를 맞았다.
“회주님 오셨습니까.”
“응. 혹시 여기 방금 누가 오지 않았어?”
“아니요. 아무도 못 봤습니다.”
안타깝게도 기운의 흔적은 회주전 입구가 마지막이었다.
그자가 이곳에 들어왔는지 아니면 입구에서 다시 돌아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진백천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조금 더 주변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이제 곧 이립전(而立戰)의 시작이었다.
‘슬슬 나도 준비해야지.’
앞으로 걸어나가는 진백천의 근골이 뒤틀리며 조금씩 키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굴의 근육도 꿈틀거리며 모양이 바뀌었다.
자연스레 바뀐 얼굴은 진백천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후우. 이렇게 눈먼 돈을 벌 좋은 기회를 그대로 눈앞에서 보고 넘기는 건 바보나 할 짓이지.’
진백천은 겉옷을 그대로 뒤집어 입었다.
회백색의 겉옷의 안쪽은 검은색이었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그는 확인도 할 겸 근처의 정도회 무사에게 다가갔다.
“……저. 연무장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흐음. 잠시 호패 좀 확인하겠습니다.”
진백천은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호패를 꺼내 건넸다.
[권진(拳進).]
무려 실재하는 지방 무관의 관주였다.
물론 망한 지 오래된 죽은 이의 것이었지만, 진백천의 위장 신분으로는 적절했다.
정도회 무사는 특이점을 찾지 못하고 다시 호패를 돌려주었다.
“연무장은 반대쪽입니다. 이곳은 통제구역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네. 죄송합니다.”
진백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났다.
바로 앞에서 봤음에도 역시나 알아보지 못했다.
‘좋았어.’
진백천은 유유자작하게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진! 없습니까? 셋을 셀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실격패입니다!”
“어어. 여기 있습니다!”
진백천은 재빠르게 땅을 박차며 연무장 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순간 달라진 팔과 다리의 길이에 주춤거리며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관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저런 초짜까지 참여하다니! 역시 무림대회는 첫날이 가장 재밌는 법이지!”
“괜히 까불다 맞지 말고 일찍 항복하라고!”
전부 진백천을 향해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쯧. 자네 몇 살인가?”
“20살입니다만…….”
“어리군. 겨우 약관전(弱冠戰)을 벗어날 나이에 이립전을 지원한 것을 보면 용기가 가상해.”
그자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진백천을 가르치듯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 때는 말이지. 20살 때 무공 수련은커녕 사형들 물 떠다 주고 어깨 주물러주는 게 전부였네. 지금 세상 차- 암으로 편해진 거야. 자네 같은 이들만 봐도 느낀단 말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맞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기권하고 내려가게. 괜히 여기서 망신당하면 자네만 손해 아닌가?”
진백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쯧.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답답하게 생각해서 말해줘도 못 알아듣는군. 자네도 꽤나 부모님 속을 썩였…….”
“하아.”
파앙-
허공을 가르는 거친 파공성은 진백천의 주먹에서 난 소리였다.
절도있는 그 동작에 떠들어대던 꼰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진백천은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내 부모 속은 내가 신경 쓸 테니까 그만 좀 떠들어 대면 안 될까? 더 떠들면 시작하기도 전에 입을 박살 낼 것 같아서 말이지.”
“뭐,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