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22화
76장 달아오르는 정도회(2)
진백천이 양손으로 막아서자 사자혁과 마화린은 동시에 물러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차피 곧 둘이 붙을 텐데 왜 이렇게 성격들이 급하실까?”
사자혁과 마화린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말은 안 해도 각각의 손으로 스며들어온 진백천의 파초식(破招式)으로 인해 제법 놀란 상태였다.
“저자는 내 먹잇감도 못될 수준인데 회주가 날 상대해 주면 안 되겠나?”
“나는 대회 진행해야 하느라 바빠서 안 돼. 하여튼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고 떨어져.”
사자혁은 피식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리며 물러났다.
반면에 마화린은 얼굴을 굳힌 채 뒤돌아섰다.
사자혁과 처음 맞부딪쳤던 그의 오른손은 푸르딩딩하게 멍든 상태였다.
단 한 수였지만 누가 앞섰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구촉비전을 익힌 마화린도 사자혁한테는 안 되는 건가?’
진백천과 친선대련 이전의 그라면 맞상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미 한 단계 벽을 뛰어넘은 상태.
진백천이라고 해도 쉽게 맞붙기 꺼려질 정도였다.
‘혹시 마화린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
워낙 속이 음흉한 놈이라 쉽게 볼 수는 없었다.
‘둘을 외곽으로 떨어뜨려 놓기를 잘했어.’
서로에게 악감정이 쌓였으니 마화린은 사자혁의 눈치를 살피느라 함부로 움직이기는 힘들 터였다.
그리고 그런 진백천의 생각은 정확했다.
콰지직!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마화린은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깨부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구촉비전을 익히기 시작한 후부터 감정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방금도 살의를 억누르느라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지조차 몰랐다.
으드득
“건방진 놈들. 감히 나를 무시해? 나, 마화린을?”
지금이라도 당장 정도회 주변에 있는 오마군종대를 이끌어 이곳을 휩쓸어 버리고 싶었다.
강호의 명문 정파 무인들이 모여 있는 지금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분노에 사리분별이 되지 않았다.
“쯧.”
침상에 누워 있던 환야루의 루주는 그런 마화린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녀는 마화린의 시녀인척 신분을 속이고 이곳에 들어왔다.
‘구촉비전의 부작용이야. 아이들에게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소교주에게 저렇게까지 발현되다니. 역시 별 볼 일 없는 자였나?’
속마음과 다르게 루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화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의 목을 쓸어내리며 화를 풀어주려 애썼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교주님의 발밑에서 애원하게 될 자들이에요.”
“닥쳐! 이게 다 네년 때문이다!”
마화린은 루주의 목을 움켜쥐었다.
“구촉비전 따위보다 더 강한 무공이 필요했어!”
“……끄으윽!”
루주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그가 마음에 들어 할 이야기를 꺼냈다.
“하아하아…… 걱정 마세요. 곧 구악정(九惡井)의 마인들이…… 소교주님을 도우러 올 겁니다.”
“구악정? 그들이 왜 나를 돕지? 그것도 마뇌의 지시인가?”
순간 소교주의 눈에서 포악함이 사라지고 이지가 돌아올 만큼 의외의 정보였다.
루주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는 그녀가 어떤 모습이건 구악정이라는 말에 비릿하게 웃었다.
“교주의 명이 아니면 듣지 않는 자들인데 마뇌가 나를 위해 움직여주다니 의외로군! 하지만 상관없겠지. 어차피 교주의 직위에 오를 자는 오로지 나일 테니!”
마화린은 방금까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 마화린을 지켜보는 루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마뇌님이 지켜보라 했지만 이자는 쓰레기일 뿐이야. 그분께서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싶을 정도로……!’
루주는 자신의 속내를 지우며 마찬가지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말로 그를 응원한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제서야 마화린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무림대회의 첫 시작은 그 무성했던 소문과 기대감만큼 대단했다.
관중들까지 수천 명이 모인 곳에서 진백천은 내력을 끌어모아 개회식을 열었다.
사람들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리는 것에 신기해했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이렇게 대단한 내력이라니!”
진백천은 이왕 시작하는 것 무림대회에 참가하는 무인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흥을 돋웠다.
나서기 꺼리는 무인들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지만, 유명세를 좋아하는 자들은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모든 이들의 소개가 끝나자 본격적인 무림대회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회주님!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이 몰릴 줄은 몰랐습니다.”
“첫날이라 적은 걸 수도 있어. 대회가 무르익어가고 소문이 퍼지면 더 몰릴 거야.”
“네.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황대원과 전등신이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들이 신경 쓸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가끔 흥분한 관중들이 서로 시비가 붙는 것을 빼면 안내하는 게 전부였다.
혈막을 상대로 본보기를 보여준 지금, 정도회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이들은 없었다.
“흐음. 그러면 나는 상장과 아연의 경기를 보러 가볼까?”
가장 일찍 열리고 빨리 끝나는 것이 20세 미만만 참여 가능한 약관전(弱冠戰)이었다.
그리고 추후 그 문파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대련이었다.
연무장으로 향하니 이미 비무는 진행 중이었다.
“회주. 여기야.”
설수련과 함께 서 있던 검왕이 그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관중석이 아닌 연무장 뒤편에 서 있었다.
관계자만 있을 수 있는 나름의 특별 관람석이었다.
“아영이부터 시작이죠?”
“이제 막 연무장에 올라갔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영은 진백천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상대인 아이는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한 것이다.
채앵-
“나는 사천 지심무관 이철관의 제자 이백호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무관이었지만 제법 절도가 있는 소개였다.
아영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도 똑같이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크흠! 저는 정도회 진백천의 제자 아영이에요.”
그녀의 소개에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첫 대련부터 나온 아이가 다름 아닌 정도회 회주의 제자였다.
어린아이들의 경기라 흥미 없이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호오. 회주의 제자였다니! 어쩐지 이름이 익숙하더라니!”
“웃기는군. 이름은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데 익숙할 리가 있나!”
“뭐가 됐든! 아무나 이겨라!”
관중석에서는 박수갈채와 함께 응원이 쏟아져나왔다.
대부분은 자신이 승패에 건 쪽에 대한 응원이었다.
아영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며 이백호를 주시했다.
생글생글 웃던 얼굴은 어느샌가 무표정이 되어 얼음처럼 차가웠다.
“역시 뛰어난 집중력이에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긴장 한 번 안 하고요.”
“아마 지금쯤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멋져 보일까 고민하고 있을걸?”
“에이. 회주님도 아니고 설마 그럴 리가요.”
당소예가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진백천은 움찔거리는 아영의 어깨를 확인했다.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이런 것도 닮았네.’
첫 공격은 이백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석에 가까운 검로가 손목을 노리고 뻗어오자 아영이 옆으로 물러났다.
카앙-
검끼리 부딪치며 옅은 불똥이 튀었다.
아영은 그동안의 조언대로 함부로 나서거나 자신의 내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게 상대를 관찰하며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살폈다.
‘좋은 자세야. 검왕 어르신께 잘 배웠어.’
아영이 가진 내력만을 놓고 보면 약관전에서는 그녀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런 노련한 모습은 그녀를 한층 더 여유 있게 만들었다.
“으윽!”
이백호는 과하게 검을 밀어 넣다가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아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보법을 밟으며 강하게 검을 쳐냈다.
“허억!”
번쩍하는 사이 이백호의 어깨에 아영의 검이 올려졌다.
이백호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궜다.
“져, 졌습니다.”
“정도회 아영 승!”
진행자의 외침이 있자 주변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아영은 방금까지의 날카로운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폴짝 뛰었다.
“와아아아! 스승님! 저 이겼어요오오!”
“침착하게 잘했어.”
“헤헤.”
이제 남은 것은 상장의 대련이었다.
하지만 몇 개의 대련이 지나야 그의 차례였고 진백천은 거기서 다른 연무장을 훑어봤다.
그때 유난히 진백천의 눈길을 잡아끄는 아이가 보였다.
‘마화린과 함께 온 아이.’
3명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중혁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마르고 별 볼 일 없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전혀 달랐다.
‘구촉비전을 아이들에게 익히게 할 생각을 하다니. 마화린답다고 해야 하나?’
진백천은 자신과 싸웠던 일금영과 비슷한 느낌일지 중혁에게 집중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아이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서 쳐다봤다.
그리고 역시나 별다른 감정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상대는 무려 남궁세가의 제자였다.
‘흐음. 제법 볼 만하겠는데?’
과연 남궁세가답게 아이의 근골은 뛰어났다.
그만큼 가진 실력도 좋아 보였고 태도에도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잘 부탁합니다.”
포권을 취하는 모습에는 서둘러 대련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한낱 흑도방파의 비루한 아이에게는 자신이 절대 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겠지.’
진백천은 통통이와 장난을 치고 있는 아영에게 둘의 대련을 지켜보라 말했다.
“저 키 크고 훤칠한 사람이 이기지 않을까요?”
아영이 가리키는 것은 역시나 남궁세가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의 관중도 마찬가지였다.
대련이 시작되자 남궁세가의 아이는 여유롭게 검을 뽑아 들며 기수식을 취했다.
“대연검법(大衍劍法). 과연 남궁세가에서 약관전에 내보낼 만한 아이군.”
검왕은 아이의 자세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승자는 저 비루한 아이가 될 것이다.”
“정말요?”
아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연무장에 집중했다.
처음 공격은 남궁세가의 아이부터였다.
호쾌하게 내리긋는 검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중혁의 어깨를 노렸다.
중혁은 여전히 멍하게 그 검을 바라보다 위험해질 상황이 되어서야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어어?”
단지 앞으로 걸어왔을 뿐이지만 검이 흔들리며 상대는 뒤로 물러났다.
황급히 놀란 남궁세가의 아이가 재차 검을 휘둘렀지만 중혁에게는 전혀 닿지 못했다.
그런데도 겉으로 보이는 것은 남궁세가의 아이가 몰아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와아아아! 역시 남궁세가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얼른 끝내라고!”
주변의 환호와 다르게 남궁세가의 아이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혁은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검 아래로 파고들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커헉!”
붕 뜬 몸이 떨어진 곳은 연무장 밖이었다.
조금씩 밀리던 것이 어느새 연무장 끝에 도달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며 중혁을 쳐다봤다.
“승자! 사혈방 중혁!”
중혁은 인사도 없이 연무장에서 내려갔다.
“아영아. 어땠어?”
“으음. 어딘가 모르게 싸늘했어요. 몸이 한순간에 빨라졌다 줄어들기도 했고요.”
“맞아. 몸 쓰는 것에 이미 극도로 익숙하다는 거지. 저런 동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혹사당했을지 안타깝네.”
그 대련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장에 상장이 올라왔다.
잔뜩 긴장했는지 팔과 다리가 기계처럼 어색하게 흔들렸다.
관중석에서 그와 함께 근무했던 수위를 비롯해 정도회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응원을 했다.
“상장! 잘할 수 있으니까 겁먹지 마!”
“지더라도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그런 응원도 제대로 못들을 정도로 상장은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대편 측에서도 누군가 올라왔다.
상장과 달리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가 넘치는 태도였다.
그 아이는 잔뜩 긴장한 상장을 보며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크큭. 첫판부터 이런 놈이라니. 운이 좋은데?”
말투부터가 싸가지가 없는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