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18화
75장 무림대회 준비(3)
유일환과 매화검수들은 짐을 풀자마자 준비한 따듯한 물에 씻고 배를 채웠다.
“……대사형.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따듯한 음식인지…….”
“이번 강호행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패천 바로 앞에서 진백천을 놓친 이들은 객잔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하필이면 들어간 객잔이 사람들에게 독을 먹여 매매하는 흑점(黑店)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으며 그 뒤에 꽤나 큰 흑도방파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제대로 음식도 먹지 못하고 정도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전투만 치르고 왔다.
“맞아. 따듯한 국물이 이런 느낌이었어.”
매화검수들은 하나같이 몽롱한 눈으로 음식을 음미했다.
그것은 유일환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아. 대사형. 그러고 보니 진백천 회주도 조금 변한 것 같지 않습니까?”
“어디가?”
“뭔가 기세도 그렇고. 조금 더 존재감이 없어졌다랄까?”
보통은 이런 말을 하면 좋지 않은 뜻이었지만 무림인에게는 아니었다.
반박귀진(返朴歸眞).
원래는 도덕경의 문구였지만 무공의 경지를 나타내는 데 더 사용되었다.
“지극함이 다해 이미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지.”
“맞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회주도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화산파에서 마인들을 상대할 때부터 느끼긴 했지.”
매화검수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유일환의 눈치를 살폈다.
유일환이 강호로 당차게 나온 것도 진백천과의 대련을 위해서였다.
현재 답보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유일환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제들은 본파에 안전하게 도착했다고 전서구를 보냈으니 쉬고 있어라.”
“대사형은 어디 가시렵니까?”
“회주를 만나고 오겠다.”
유일환은 막상 당차게 객당을 빠져나왔지만 한 가지 사실을 망각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지독할 정도로 길치라는 사실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워낙 넓기도 했고 여기저기 전각이 너무 많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안내를 받을 걸 그랬나?”
이제 와 돌아가기에도 그렇고 괜히 돌아다니다 정도회 무사들에게 오해를 받을지도 몰랐다.
잠시 서 있던 유일환은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흐음?”
날카롭게 공기가 찢어지는 파공성이었다.
유일환은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치게 된 것은 흰 눈송이처럼 연무장을 홀로 누비는 설수련이었다.
얼핏 몸이 땅을 박찰 때마다 얼굴을 가린 면사가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
유일환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의 옷차림 아니면 눈같이 하얀 피부 때문인지 순간 그녀가 선녀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수련은 한창 수련에 심취했는지 유일환이 가까이 다가온지도 몰랐다.
“……공격이 단순합니다.”
무심결에 나온 목소리에 설수련이 그제서야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흩날리는 면사를 집어 얼굴을 가렸다.
“누구시죠? 이곳은 회주님의 개인 연무장이에요.”
“……죄송합니다. 길을 잃어서…….”
유일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포권을 취했다.
“저는 화산파에서 온 유일환이라고 합니다.”
“검군(劍君)이신가요?”
“맞습니다.”
설수련은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설수련이에요.”
“……설수련이라.”
그 이름 또한 지금의 모습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유일환은 그녀에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뒤편에서 나타난 존재감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검에 손을 올렸다.
그를 노려보는 것은 포악해 보이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누구지?’
유일환은 본능적으로 설수련의 앞을 막아섰다.
“설소저. 저 노인은 평범한 자가 아닙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냐? 내 딸을 왜 네놈이 지켜?”
딸이란 말에 유일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왕과 설수련을 번갈아 봤다.
“제 아버지세요.”
“…….”
* * *
뒤늦게 나타난 진백천으로 인해 오해를 풀렸지만 유일환을 향한 검왕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어딘가 얼빠진 모습은 물론이고 설수련에게 멍한 표정을 짓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이야?”
“대련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대련?”
진백천은 무슨 개똥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유일환을 쳐다봤다.
“이제 무림대회가 코 앞인데 대련은 무슨. 너도 사자혁 닮아가냐?”
“간단한 대련 정도는 가능하지 않나?”
“화산신검의 유일한 제자이자 검군 유일환과의 대련이 간단해?”
그의 소개 비슷한 대답에 검왕이 눈을 지긋이 떴다.
검신은 검왕의 한 줄 높이 놓이는 인물.
자연스레 호승심이 일었다.
“무림대회에 참가를 해. 그러면 그깟 대련 질리도록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부족할 것 같으면 여기 검왕 어르신께 대련을 부탁하던지.”
“……검왕!”
유일환은 그제서야 왜소한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재차 포권을 취했다.
“심심하다면 나라도 대련을 해주지. 어떤가?”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일환은 싸늘한 그의 태도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게 자꾸 버벅거렸다.
“그래도 모처럼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할까?”
“……아니다. 나는 이만 돌아가지. 오늘은 실례가 많았다.”
유일환은 검왕과 설수련에게도 마찬가지로 절도있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백천이 혀를 차며 말했다.
“소예야. 쟤 또 이상한 데로 간다. 안내해 주고 와.”
“네. 회주님.”
당소예가 뒤늦게 따라가서 객당으로 안내했다.
검왕은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그를 못마땅해했다.
“얼빠진 자로군.”
“그러게요. 원래 저런 친구가 아닌데.”
“나쁜 사람처럼은 안 보였어요.”
마지막은 설수련의 말이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검왕은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유일환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검왕의 시선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 * *
유일환의 도착 이후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바로 다음 날에는 무당파 장로들과 무당팔검(武當八劍).
“회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은 무당파 일대제자 현강이었다.
그들은 오태산에서 빙화를 채취해간 뒤 어린 사매를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원래의 기억에 있던 봉문도 없이 무림대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무림대회를 축하하고자 장문인께서 보내신 겁니다.”
현강이 건넨 것은 한 장의 서화였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무당파에 처음 입문하게 되면 배우는 구절이었다.
선행을 하거나 어려운 자를 도운 사람은 그 가족에게도 복이 내린다는 뜻이었다.
“마음에 드네요. 정도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들은 화산파가 머무는 곳 근처로 배정되었다.
그 후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진백천과 연이 있는 소림사의 4대금강 중 하나인 언규와 나한들을 비롯해 개방의 무인들, 그리고 종남파의 사형제들도 있었다.
특히 그가 궁금해하던 광소산은 역시나 예상대로 묵직해 보이는 검을 들고 일행의 제일 뒤에 서 있었다.
이번 무림대회에서 그가 가장 보길 기대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회주님.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나야 똑같죠. 오신 것을 환영해요.”
무림대회에 찾아오는 것은 정파만이 아니었다.
녹림채와 장강수로채에서도 각기 채주급의 인사들이 찾아왔다.
임백서와 위정자는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다 보니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대신 서신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술은 공짜니까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가라고.”
“감사합니다! 회주!”
“역시 저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하하하!”
우락부락한 이들이 지나가자 반가운 두 얼굴이 회주전을 찾았다.
다름 아닌 하오문 문주 하갈후와 하여교였다.
둘은 가끔 전서구를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것만큼 반갑지는 않았다.
“회주! 신수가 훤해졌구나!”
“훤해지긴요. 그간 고생하느라 살이 쏙 빠졌습니다.”
“엄살은 여전하군!”
둘은 지난 흑풍대 사건 이후 하오문을 재건하는 데 노력해 왔다.
다행히 기존의 점조직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전보다 더 활발히 움직였다.
“다시 한번 전의 일은 감사드려요.”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전과 마찬가지로 진백천을 빠르게 훑었다.
그녀의 눈에는 호감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우리 사이에 당연한 거지.”
“우리 사이예요?”
그녀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여우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하오문과 정도회는 친구 사이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정도회가 아니라 진백천 회주님이시지만요.”
하여교는 또 뵙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호리불녀(狐狸不女) 때의 모습을 기억해서 그런지 그녀 앞에만 서면 어딘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후우. 생긴 건 개미라도 밟으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낼 것 같은데 말이지.’
정도회를 방문하는 것은 진백천과 연이 있는 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잘 모르는 지방 방파나 세가에서도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총관과 춘식이 옆에 서서 그들에게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강소에 있는 남평무관에서 온 이들입니다. 저희 정도회에 친화적이고 어린 아들이 정도회에 와서 수련을 받고 싶다는 서신을 최근에 보냈었습니다.”
진백천은 그말을 들으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관주님. 강소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를 알아봐 주시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회주님!”
“남평무관이라면 저희와 친구 사이인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계시는 동안 마음껏 즐기고 쉬다 가십시오.”
어딘가 감동한 표정으로 변한 남평무관 관주였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진백천의 말에 눈가가 글썽거렸다.
“아 참. 관주님 아드님은 정도회 무관으로 보내시죠. 많은 경험이 될 겁니다.”
“……감,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세한 무관들이나 세가도 신경 쓰다 보니 인사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무림대회 개최일이 가까워질수록 제대로 식사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회주님 너무 바쁘시면 장로들이나 저에게 맡기셔도 괜찮습니다.”
보다 못한 총관이 쉬라고 말했지만 진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후우. 한 명도 서운하지 않게 하려면 얼굴을 마주쳐야죠. 그렇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이들이 회주전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복장을 본 진백천은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회주님.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소가주 제갈풍과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소가주인 남궁휘입니다.”
그들은 절도있는 모습으로 다가와 진백천에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주님.”
둘과 마주친 진백천의 한쪽 입가가 씰룩였다.
그들은 정중한 태도와 다르게 눈빛에서 적의에 가까운 호승심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진백천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주며 상단전을 열었다.
그러자 둘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이자가 운룡심검(雲龍心劍)? 그런 것 치고는 단순히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는데? 소문처럼 심모원려(深謀遠慮) 하기는커녕 단순해 보이는군!
-사자혁과 친선대련으로 이겼다지? 이자만 꺾는다면 남궁가가 잃은 검왕의 이름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자는 제갈풍, 후자는 남궁휘의 속마음이었다.
각기 다른 내용이었지만 한가지는 공통적으로 통했다.
둘 다 진백천을 어떻게든 꺾어내고 싶다는 것.
-이자를 박살 내서 세가의 위명을 되찾겠다!
진백천은 그런 둘의 전의에 재밌다는 듯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모처럼 재밌는 놈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