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16화
75장 무림대회 준비(1)
“그건 또 뭐지?”
“아아. 이건 마검처럼 뿌려지는 건 아니고 저번 고루혈마(骷髏血魔)를 토벌했을 때 얻은 패예요.”
진백천은 이것을 검왕에게서 받고 몇 차례나 부수려고 해봤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을뿐더러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점점 더 진백천의 기운에 저항하기까지 했다.
“그건 마기뿐만 아니라 아주 강한 술법의 흔적도 보이는군.”
“파괴도 가능하시겠어요?”
당염은 불길하다는 듯이 흑마패에 손도 대지 않고 눈으로만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지독한 술법이 담긴 물건은 함부로 부수면 안 된다. 그 안에 담긴 사념이 사람에 쓰일지도 모르니까.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는 깊은 바다나 용암 속에 빠뜨려 없애 버려라.”
진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품속에 넣었다.
물론 그전에 파사의 내력으로 흑마패를 감싸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흐음. 그건 그렇고 마교가 쳐들어온다니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정확한 시기는 무림대회 이후일 거예요. 아니면 그 중간이 될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이번 무림대회에 마교의 소교주가 참가할 거예요.”
그 말에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백천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인물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소교주의 이름이 마화린이라는 것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 갑자기 무림대회에 참가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전부 마교의 노림수고?”
“맞아요.”
당염은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마교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크게 변할지 빠르게 계산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한다고 바로 결정 날 문제는 아니었다.
“그 소교주가 참가할 거라는 소식은 어떻게 들었는지 묻지 않으마. 대신 하나만 묻지.”
“얼마든지요.”
“설마 그 소교주라는 놈. 처리할 생각이냐?”
“얌전히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겠지만…….”
진백천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 없어 보여서요.”
정도회 회주인 진백천이 마교의 소교주의 목은 친다?
이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물론 지금도 보이지 않는 칼날을 주고받는 중이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흐음. 뭐를 걱정하는지는 아는데 선전포고는 제가 먼저 하지 않을 거예요. 그쪽에서 알아서 쳐들어올 테니까요.”
“뭔가 확신하는 게 있나 보군.”
진백천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정혼을 하라고 부추기던 당염은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조용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혼을 한다면 가장 첫 번째 목표는 진백천도 아닌 당천아와 당가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무림대회가 끝날 때까지 당 소저 옆에서 꼭 좀 지켜주세요.”
“네놈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아 참. 당가와 황실의 상단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알고 있었느냐?”
당염은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었을 줄 몰랐는지 제법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황실의 상단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
“뻔한 이야기잖아요. 독점을 그렇게까지 하면 탈이 나다 못해 언젠간 배가 터질 문제였으니까요.”
그의 말에 당천아가 눈을 힐끔거리며 당염을 쳐다봤다.
그녀도 항상 똑같이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당염은 ‘당가는 지지 않는다!’ 같은 쉰 소리만 하며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 지금처럼 상단 하나가 박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실 상단에는 제가 말을 해둘 테니까 이제 독점 좀 적당히 하시고 상생도 하세요. 당 소저가 하는 운룡상단을 보고 본받으시라고요.”
진백천의 칭찬에 당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제가 뭐 그렇게 잘했다고요. 다 회주님이 믿어주셔서 가능했어요.”
당염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흐뭇하게 앉아 있는 당천기를 노려봤다.
차마 둘에게는 뭐라 못하고 괜한 불똥이 그에게 튕겼다.
“네놈은 여기서 매일 놀고먹기만 하는 거냐!”
“……저도 천아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돕긴 무슨!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당장 당가로 돌아가!”
진백천은 당천아와 눈이 마주치곤 피식 웃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당염 앞에서 일부로 칭찬해 준 것을 말하는 터였다.
하지만 괜히 한 소리는 아니었다.
-빈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저야 말로요.
* * *
당염은 회주전에 올 때와 다르게 무척이나 기분이 풀려서 돌아갔다.
황실과의 상단 문제가 가장 시급했는데 진백천이 나서서 말해준다니 한숨 놓은 것이다.
물론 독점을 포기하고 상생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감사해요. 회주님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이고 싸울 뻔했어요. 다 늙어서 욕심은 많아 가지고. 하아.”
당천아는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를 욕하면서도 진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실제로 욕하기보다는 그의 속마음에 드는 소리를 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가주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
“과연 그런 걸까요?”
진백천의 입에서 자연스레 이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상황을 무마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역시 기본적인 상재와 더불어 눈치까지 겸비한 당천아다웠다.
‘이런 그녀를 완전히 깔아뭉갠 고유빈은 대체 어떻다는 거야?’
장차 상후(商后)라는 별호를 지니게 될 고유빈이었다.
회귀 전에는 단순히 장사 잘하는 공주라는 인식뿐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그녀의 실력에 짐작하면서 감탄만 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게 뭐야?”
“다름이 아니라. 황실 상단과의 관계 때문이에요.”
“황실 상단?”
당가와의 관계가 껄끄러운 것은 알았지만 정도회와는 그런 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관리들은 정도회라고 하면 너그러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보다 더 크게 확장시키려면 어느 정도 충돌은 불가피해요. 황실 상단이 독차지 하고 있는 품목이 대부분 돈이 되는 것들이고요. 물론 그 경쟁에서 이기는 게 상단의 능력이라지만…… 아무래도 관계라는 게 있으니…….”
그 관계는 바로 진백천과 황실, 그리고 고유빈과의 관계를 말했다.
지나치게 경쟁을 위해 뛰어들면 잡음이 새어 나올 터였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지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은 거겠지.’
사실 이런 분야에서 진백천이 딱히 조언을 해줄 만한 것은 없었다.
그 또한 상단을 만들어서 정도회에서 운영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운룡상단에서 주로 거래하는 물품은 뭐지?”
“미곡과 수달피요.”
전부 호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품목은 썩 구미가 당기는 것들은 아니었다.
호북 자체가 수해가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고 매해 구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었다.
‘다른 것들이 뭐가 있을까?’
잠시 과거의 기억에서 쓸 만한 게 없을까 뒤지던 그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마교와의 전쟁이 지속되고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전국에는 제대로 된 숟가락 하나 없어지게 되었다.
오죽하면 철검 하나 만드는 것보다 밥그릇과 수저를 만드는 게 더 돈이 된다고 말할 때였다.
‘이번에라고 전과 다를까?’
“차라리 생활용품을 차려보는 건 어때?”
“무시객주(無時客主)를 해보라는 말씀이신가요?”
무시객주란 말 그대로 언제나 수시로 사용되는 가정일용품을 다루는 자를 말했다.
취급 품목은 주로 솥을 비롯해 절구나 숟가락, 그릇 등이 대부분이었다.
웬일인지 그 말을 들은 당천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역시 그렇군요.”
“응?”
“회주님의 몇 수를 앞 보는 생각에 또 한 번 감탄했어요. 다시 한번 그 깊은 혜안에 배우게 됐습니다!”
진백천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감탄하는 그녀를 보며 눈을 꿈뻑였다.
여기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 그래서 고개만 끄덕여줬다.
“그럼 바로 말씀하신 대로 준비할게요! 무시객주라. 하아.”
당천아는 어딘가 흥분한 기색으로 별당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들어온 당소예가 그런 그녀를 봤는지 의아해했다.
“당 소저는 왜 저렇게 들떴어요? 가면서 사람들을 전부 모으던데요? 회주님의 신의 한 수를 들었다나 뭐라나.”
“그래? 그 신의 한 수가 뭔지 나도 궁금하긴 하네.”
진백천은 찌뿌둥한 몸을 풀며 하품이나 늘어지게 했다.
왠지 말을 많이 했더니 출출했다.
“간식 없어?”
“육포 있어요. 드릴까요?”
당소예는 자신이 직접 닭을 잡아 만든 거라며 자랑하듯 내밀었다.
적당히 꼬들꼬들한 게 씹는 맛이 좋았다.
* * *
평화롭게 육포를 뜯는 진백천과 달리 당천아는 대연전(待蓮殿)에 사람들을 전부 끌어모았다.
그중에는 운룡상단에 속한 정도회 무사들을 비롯해 총 책임자인 황충도 자리했다.
당천아가 불렀다기보다 진백천의 명령을 들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회주님께서 직접 명령을 하셨다고?”
“네. 제가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시는 걸 눈치채신 모양이에요. 즉석에서 바로 해답을 내려주셨어요.”
“역시 회주께서는 전적으로 맡긴다 하시면서 전부 둘러보고 있었음이야.”
황충을 비롯해 다른 무사들이 다시 한번 진백천의 심계에 감탄했다.
“그래서 그 해답은 뭐였는가?”
“저한테 무시객주(無時客主)를 해보는 게 어떻냐고 말씀하셨어요.”
“무시객주?”
갑작스러운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만 들어서는 쉽게 해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생활용품이나 파는 일은 정도회 수준의 상단에는 걸맞지 않았다.
당천아는 모두의 반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이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의아했지만, 회주님께서 괜히 말씀하실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전에 말씀하신 게 떠올랐어요.”
마교와의 전쟁.
전쟁이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자원을 소비해야 했고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금속이었다.
“무쇠솥이나 쇠숟가락 같은 것만 생각해도 전부 금속으로 만들어져요. 회주님께서는 무시객주 일을 하면서 최대한 금속의 비축을 쌓으라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호오. 그렇군. 관리물자인 금속을 비축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으니까.”
“솥을 만드는 이들이 무기를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필요하다면 곧바로 무기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의 물꼬를 트니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비축해 둔 금속이 전쟁으로 비싸지면 팔아도 되었고, 말 그대로 불쌍한 민간인들을 위해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아도 되었다.
“그나저나 한 가지 문제라면 금속을 다루기 위해서는 황실의 허락이 필요합니다만…….”
“그것은 걱정할 것 없어요. 회주님께서 그 전에 고유빈 공주와 이야기해 본다고 하셨으니까요.”
“오오.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이미 전부 조치해두신 게 틀림없습니다.”
모인 이들은 이런 생각을 즉시 떠올린 진백천에 대해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무력과 심계뿐만 아니라 상재까지 갖추셨으니 부족함이 조금도 없으시군요.”
“아암! 회주님이 누군데 감히 의심을 하나! 아마 지금도 끊임없이 정도회의 일로 바쁘실 것이야.”
물론 바쁘기는 했다.
당소예가 만든 육포를 먹어치우느라.
그 날 피곤하다며 일찍 잠든 진백천과 달리 대연전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가 툭 하고 말한 것을 시행하기 위해 날이 새도록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로 며칠 뒤 운룡상단은 무시객주를 표방하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