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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회귀백서-212화 (212/346)

무림회귀백서 212화

73장 혈막(3)

전풍객의 무덤 앞.

전서구를 확인한 진백천은 제법 담담해 보였다.

그가 정도회 내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눈길을 사로잡는 사이 다른 이들을 보내 혈막의 본거지를 기습했다.

이 모든 것은 혈막의 위치를 알아냈을 때부터 계획해 둔 것이었다.

“역시나 살왕은 없었군.”

목소리에 담긴 것은 안도감이나 만족감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살왕의 존재 자체가 혈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그를 제외하고는 전부 대체 가능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살왕은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하는데.”

그가 그림자 속에 숨어서 움직인다면 진백천조차 항시 긴장하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릴 수 없었다.

황충을 비롯해 장로들과 암왕(暗王)인 당염에게까지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검왕(劒王)조차 나설 수 있게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이라면 살왕도 그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했다.

“혈막이 더 커지기 전에 뿌리를 뽑는 것은 좋은 일이지.”

이들은 첫 살행 이후로 차츰 세를 떨치며 커져 갔다.

경험이 부족했던 이들이 무기에 피를 묻힐수록 까다로운 살수가 되었고, 살왕을 주축으로 정도회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이번에 한차례 움츠렸으니 다시 몸집을 키우는 데 시간이 걸릴 터였다.

“살왕 그자는 죽이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일은 서툰 자니까.”

혈막이라는 단체를 만드는 이유도 전부 그의 수발을 위해서였다.

진백천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그리고 무덤가에 반 정도를 졸졸- 따라냈다.

“전부 전 당주 덕분이에요.”

이렇게 술을 나눠마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럴까?

평소 달기만 하던 술맛이 오늘따라 지독히 썼다.

“이 정도면 제법 복수는 해줬어요. 그러니 그 위에서 잘 지켜보세요.”

진백천은 술병을 남김없이 비워냈다.

그가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이 눈이 시릴 정도로 반짝였다.

* * *

그 시간 광서에 위치한 천중파(天中派).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들지는 못해도 그 지역에서 나름 선업을 쌓아가며 성장하던 문파였다.

그런 천중파의 회주전에서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가 있었다.

진백천이 혈막에 없어서 아쉬워했던 살왕이었다.

쪼로로록-

작은 도자기 잔에 술이 가득 차며 독한 향이 올라왔다.

살왕은 그 향을 음미하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70이 넘는 나이임에도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은 표정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벌컥-

술잔을 들어 올린 그의 손은 피로 붉게 물든 상태였다.

“나쁘지 않군.”

매번 느끼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운 혈향과 함께 마시는 독주가 제법 어울렸다.

살왕은 재차 술잔을 가득 채우고 입에 가져다 댔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쩌릿하게 흘러내렸다.

타악-

술잔을 내려놓은 살왕이 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노잣돈은 못 챙겨줘도 이 정도는 해줘야지.”

살왕이 앉아 있는 자리 주변으로, 회주전은 전부 시체 투성이었다.

한눈에 봐도 몸 여기저기 잘린 시체는 수십이 넘었다.

천중파의 무인들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하나같이 죽어가면서도 부릅뜬 눈을 감지 못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지.”

살왕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단신으로 주변의 살육 현장을 만들어낸 것만 아니라면 정말 평범한 중년 남자로 보일 모습이었다.

이번 살행을 끝으로 혈막으로 돌아가 한동안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환야루의 루주의 부탁에 따라 특별히 광서의 천중파를 지워주긴 했지만 딱히 그 이상의 것을 들어주기는 싫었다.

스으으-

단지 앞으로 걷는 것만으로도 그의 신형이 허공에 묻어나며 흐릿해졌다.

그리고 혈막의 본거지로 돌아왔을 때 그가 본 것은 불타 엉망이 된 현장이었다.

살수들 대신 관군 몇 명이 그 입구를 지키는 중이었다.

“흐음. 아무래도 사달이 난 모양이군.”

살왕은 천천히 그 안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관군이 다가오며 거칠게 그를 밀어내려 했다.

“이봐! 여기는 통제구역이니까 썩 꺼져.”

하지만 살왕은 별 대답 없이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라혈선(修羅血線).

그들에게는 단지 손이 눈앞에 일렁였다 사라졌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스걱!

그를 막아 세우려던 관군들은 손을 뻗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이내 전신에 붉은 실선이 생겨나며 토막이 나 버렸다.

후드드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쪽의 관군이 기겁하며 호각을 불어댔다.

“허억! 침, 침입자다!”

관군이 뭐라 하든 살왕은 서서히 살심을 품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자신들의 수족을 전부 죽였으니 그 화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자들이라면 그 핏값으로 충분해 보였다.

살왕의 손 앞에서는 무기와 방어구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얼굴로 묵묵히 그들을 베어낼 뿐이었다.

그렇기에 관군들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서, 설마 살왕? 서둘러 정도회에 알려!”

“정도회? 그들의 짓이었다 이거지?”

“그럼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알 필요가 있나. 내 집에, 아니, 내 집이었던 곳에 있던 것만으로도 전부 죽을 만한 죄를 지었으니.”

살왕은 더는 묻지도 않고 그들의 목숨을 수확했다.

“커헉!”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의 목줄기를 베어냈을 때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정도회로 가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 관심이 없다 하나 그곳에 검왕을 비롯해 강자들이 많음은 잘 알았다.

“더구나 회주 그놈도 제법 강하다고 하니 혼자서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나 또 다른 살수 집단을 집어삼켜서 제2의 혈막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죽어 나간 이들처럼 말이다.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쩔 수 없지.”

살왕은 무심한 눈으로 정도회가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이미 피 값은 지어졌고 받아갈 날이 있을 테니.”

그의 신형이 왔던 것처럼 사라졌다.

* * *

며칠간의 폭풍 같은 날이 지나고 진백천은 또다시 회주전에 틀어박혔다.

혈막을 박살 냈으니 환야루마저 찾아내야 했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무리였다.

강호에 있는 모든 기루를 뒤질 노릇도 아니었고 그럴 시기도 아니었다.

지금은 단지 그들에 대한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다 전면에 나서는 순간에 처리하는 편이 옳았다.

“여기서 새로운 적을 찾아 쫓는 것은 정도회로써도 무리야.”

무림대회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상황이었다.

전체적인 인원이 늘었지만 반대로 찾아오는 이들도 늘어날 터였다.

적어도 이곳으로 찾아온 이들이 서로 반목하지 않으려면 그들을 뛰어넘는 무력이 있어야 했다.

“으휴.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도 문제야.”

진백천은 탁자 위에 정도회의 건물 배치도를 놓고 생각에 빠졌다.

찾아올 마교야 가장 외쪽의 춥고 비좁은 곳으로 안내하면 될 테고 나머지가 문제였다.

“동맹이라고 하나 당문과 녹림, 장강을 가까이 둘 수 없으니까.”

녹림, 장강은 몰라도 당문은 아니, 당염은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난리를 피울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혈막을 슬슬 깨부순 이들이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당소예가 회주전에 들어왔다.

“회주님! 황충 친위대장을 비롯한 토벌대가 돌아왔어요!”

“그래?”

진백천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하러 갔다.

즉각적인 대응으로 혈막을 없앤 것은 진백천의 판단이었지만 그들의 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위풍당당한 태도로 정문을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도회가 거품이라 말하던 이들은 전부 입을 꾹 다물었다.

대부분 쫓겨나기도 했지만 단 며칠 사이에 보여준 모습은 과연 피를 뿌리는 용과 같았다.

“친위대장 황충! 회주님의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황충을 비롯해 무인들은 도끼에 묻은 살수들의 피를 닦아내지 않은 채였다.

지켜보는 이들에게 하는 또 다른 경고의 의미였다.

진백천은 황충을 손수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는 한 명 한 명 직접 손을 맞잡으며 그들의 고생을 치하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뒤편에 서 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회주!”

칼날 같은 눈빛에 주름진 얼굴.

그 뒤로 서 있는 이들은 가주 직속의 무력단체인 당문비였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에서는 노인의 정체가 소문의 암왕(暗王)이며 사천당가의 가주임을 알아봤다.

하지만 놀라는 주변 이들과 다르게 진백천은 동네 할아버지라도 본 듯 편하게 말했다.

“오셨어요? 그간 격조하셨는지요?”

“격조하지 못했지! 회주가 사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짐작은 했지만 첫 만남부터 뭔가 맡긴 것처럼 따지고 물었다.

사위라는 단어에 모두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전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꺼내지 못하던 단어들이었다.

진백천의 정혼자가 당천아가 될지 아니면 공주인 고유빈이 될지, 혹은 설수련이 될지에 따라 정도회의 방향이 사뭇 달라졌다.

“……아버지!”

하지만 그때 시기적절하게도 사람들 사이에서 당천아가 나오며 그를 말렸다.

그녀의 얼굴은 다소 붉어진 상태였다.

“오오. 천아야. 살이 많이 빠졌구나. 정도회에서 밥도 제대로 안 주더냐?”

“아버지! 그만 하세요.”

당천아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당염을 말렸다.

평소에 당찬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고생하셨을 텐데 어서 안으로 드시죠. 머물 곳은 당 소저가 머무는 대연전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당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백천이 뒤편에 서 있던 당천기에게 그들의 안내를 맡겼다.

당천기는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안내했다.

하지만 당염은 여전히 멈춰 서서 진백천을 쳐다봤다.

“회주. 오늘이 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오늘 저녁에 회포 좀 푸시죠?”

“좋지. 기다리겠네. 사위.”

당염은 마지막까지 사위라는 말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늙은이야.’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황충을 비롯해 검왕을 회주전으로 모셨다.

혈막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적이나마 듣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있던 살수들과 전투는 진백천이 예상한 것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

살수들이 괴이한 수를 사용하긴 했지만 대부분 숙련이 되지 않은 자들뿐이었다.

“특히 당가의 독에 당하자 몹시 당황했습니다. 살막의 뒤를 이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흐음. 살수들이 어둠에서 벗어나면 유난히 맥을 못 추리긴 하죠.”

놈들이 독에 대항하지 못했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혈막의 본거지는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고 살아남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진백천은 다시 한번 수고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황충이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혈막에서 입수한 것들입니다.”

황충이 꺼낸 것은 수십 장의 종이 다발이었다.

순간 전표가 아닐까 눈이 번쩍였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금고 깊숙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분명 중요한 내용일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도 황충이 중요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 암호문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백천은 그것을 보자마자 자신이 살수를 심문할 때 읽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종류임을 알아봤다.

“흐으음.”

진백천은 살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암호문의 해독방법도 알아낸 지 오래였다.

그는 그 가운데 익숙한 단어를 찾아내고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광서. 천중파(天中派) 멸살(滅殺).]

[의뢰자 : 환야루(幻夜樓).]

‘천중파? 그곳을 굳이 왜?’

서신에는 혈막의 직인이 찍힌 상태였다.

이미 살행에 들어갔다는 뜻이었고, 이 정도 되는 문파를 멸살하기 위해서는 살왕이 직접 움직였을 확률이 높았다.

“……회주님. 그 암호문을 읽을 수 있으십니까?”

“네. 전에 혈막의 살수를 잡았을 때 알아냈어요.”

“오오. 대단하십니다!”

진백천은 서신들을 읽다가 의아한 내용을 발견했다.

[정도회. 수위 진가소]

[의뢰자 : 황보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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