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회귀백서-211화 (211/346)

무림회귀백서 211화

73장 혈막(2)

혈막(血幕)의 은신처.

버려진 집의 지하를 개조한 그곳은 적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들은 작전을 수행할 때가 아니면 서로 딱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제법 불안해 보였다.

“……조장. 정도회의 포위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호운 상단의 장부가 털린 것은 물론이고 간자들도 전부 색출되어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본막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조장이라는 자는 엊그제부터 단지 그 말뿐이었다.

평소라면 찍소리도 못할 테지만 지금은 밑에 있는 둘도 초조한 상태였다.

본막에서도 연락을 준다고 한 지가 언젠데 지금까지도 묵묵부답이었다.

“정도회 놈들이 이곳을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이곳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다. 알아낸다고 해도 우리가 있는 지하까지 찾아내지 못해.”

조장이 장담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그들의 일을 도왔던 자들마저도 지하에 이런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진백천입니다.”

“진백천이 뭐? 그자도 혈막의 암살대상 중 하나다.”

조장은 더 말을 꺼낼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마기를 끌어올렸다.

제법 쉬운 일이라 생각해 경험이 얼마 없는 이들과 함께 온 것이 문제였다.

“조금 더 담대해져라. 우리는 혈막이다.”

마치 주문과도 같은 그 말에 살수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단지 스스로가 혈막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은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혈막은 목표를 한번 정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노렸다.

그 개개인의 실력은 둘째치고 살수가 죽어도 뒤이어 더 실력이 좋은 이들을 보냈다.

그것은 혈막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살왕(殺王)까지였다.

“이미 수많은 고수가 우리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을 뿐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도회가 저런 반응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혈막에서 기대한 반응은 정도회가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풍객은 대외적으로 진백천과 대립했던 자였고, 정치적으로도 끈이 떨어진 자였다.

그런 자를 죽이고서 사람들을 동원해 자연스레 진백천에게 불온한 인상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더구나 정도회는 이런저런 일로 무척이나 바쁜 상황이었다.

“무림대회는 물론이고 안팎을 정리하는데 여력이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진백천이라는 자를 너무 보편적으로 판단한 게 문제군.”

“이 기회를 통해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을 숙청하려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진백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빼 들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둘렀다.

평소였다면 충분히 패도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될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복수를 위한 행동으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자다.”

조장은 그렇게만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이 잘게 울렸다.

깊숙한 지하까지 이런 충격이 전해질 정도면 폭약이 터질 정도의 위력이 있어야 했다.

혈막의 살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단검을 뽑아 들며 경계했다.

-전부 움직이지 말고 대기해.

시끄럽게 사방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도회 무사들은 정말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정보가 이렇게까지 세고 있다니. 보기와 다르게 정도회의 정보력이 보통이 아니군. 기대 수치를 조금 더 올려야겠어.’

조장은 그들이 이곳을 찾아냈다고 하지만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은신처를 찾는 것과 그 아래 숨겨진 지하를 찾는 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몇 번의 숨겨진 입구를 찾아야 했다.

‘절대 이곳에는 들어오지…….’

그때였다.

쿠우웅!

머리 위에서 순간 이해하지 못할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폭탄이라도 터뜨리는 건가?”

화가 나서 흔적이라도 없으려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충격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쿠우우웅!

그것도 점차 그들 가까이였다.

천장이 흔들리며 바위 조각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설마?”

“말도 안 돼.”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다시 한번 폭발이 이어지며 그들이 바닥을 굴렀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정확히 그들 머리 위의 천장이 무너지며 구멍이 생겨났다.

애초부터 폭발은 정확히 그들이 있는 지하로 이어진 것이었다.

‘말도 안 된다. 도대체 어떻게?’

자욱이 피어난 흙먼지가 사라지기도 전.

천장의 구멍에서 일단의 무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뒤쪽의 두 명은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회주님.”

순간 화끈한 열기가 이는 듯하더니 뭔가가 조장 쪽으로 굴러왔다.

혹시나 해서 몸을 움츠리는 순간 그것이 방금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수하들의 머리임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질문은 나만 할 수 있어.”

뜨끈한 통증과 함께 몸이 천천히 굳어갔다.

단순히 점혈은 아니었다.

혈막의 살수들은 제압당할 상황을 대비해서 혈도를 1치씩 옮기는 무공을 배우니까.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것은 진백천의 살기였다.

‘……엄, 엄청난…… 기세!”

덜덜 떨리는 입을 움직여 독단을 씹으려 했지만 그의 입안으로 진백천의 손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독단이 숨겨진 이빨을 뽑아갔다.

“첫째 질문. 혈막의 위치는?”

‘멍청한……! 그것을 묻는다고 말할 리가……!’

혈막의 살수들은 그 어떤 순간이 와도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하지 않았다.

마교의 금제(禁制) 수법으로 특정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뇌가 곤죽이 되어버렸다.

조장은 겨우 움직여지는 입으로 진백천을 비웃으려 했다.

“결국…… 네놈도 잔인하게 죽게 될 것…….”

하지만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금제수법이라. 혈막에 그런 것도 있었나?”

얼핏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진백천의 눈이 싸늘했다.

조장은 순간 자신이 최면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백천이 금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백천은 그에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질문. 전풍객 당주 이후의 목표는 누구였지?”

그와 눈이 마주친 조장은 진백천이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두 눈동자는 자신의 마음을 헤집어놓듯 전부 파악하는 중이었다.

“약왕당주와 총관?”

‘……설마 독심술이라도 사용하는 거냐!’

조장은 그제서야 초창기에 들려왔던 진백천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가 천리안과 천리통을 가졌고 이미 강호 전역의 일을 빠짐없이 안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혈막은 위험하다……!’

조장은 혈막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정기적으로 위치를 변경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자리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았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세 번째 질문. 혈막의 위치는?”

조장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뜨끈한 통증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잘려 나갔다.

스걱-

“대답해. 혈막의 위치는?”

‘저, 절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의지와 상관없었다.

그것에 생각하는 순간 이미 진백천에게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네 번째 질문. 의뢰를 한 자는 누구지?”

‘…….’

“환야루(幻夜樓)라.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가?”

조장의 정신은 진백천의 말이 한마디씩 이어질수록 아득해져 갔다.

차라리 자결할 수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악몽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놈은 쉽게 죽으면 안 되지. 아직 불어야 할 것도 많고 당해야 할 것도 많잖아?”

진백천의 뒤에서 황대원이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함께 내려온 이들은 은신처를 돌아다니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뒤지는 중이었다.

조장의 핏발선 눈이 진백천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의 전서구가 들려 있었다.

“아아. 익숙하지? 이놈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더라고. 내가 비둘기 잡는 데는 재능이 있어서.”

혈막에서 사용하는 전서구였다.

검은 깃털은 밤중에 보이지 않았고 무척이나 기민했다.

진백천은 직접 그 안에 담겨 있던 쪽지를 들어 그의 앞에 펼쳤다.

어지럽게 꼬인 암호문이었다.

무심결에 그것을 본 조장은 곧바로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의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혈막에서 물러나라 했다고? 정도회의 거친 모습에 제법 놀란 모양이군. 천하의 혈막이 움츠러들다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진백천은 암호문을 어떻게 풀고 읽는지 또한 완벽하게 알아냈다.

“호오. 암호문을 그렇게 푸는 거였군.”

매번 암호문을 입수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알아내기도 그렇고 분명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대체 이자는…….’

“그럼 다섯 번째 질문. 살왕은 어디에 있지? 혈막에 있나?”

조장은 일부로 머릿속을 비우며 스스로를 가둬두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과 발이 잘려나가는 통증에 신경이 곤두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쉽게 죽을 생각하지 마. 알았어?”

진백천의 심문은 집요했다.

그가 얻고 싶어 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그를 절대 죽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나고 그의 머릿속이 텅텅 비었을 때쯤.

그제서야 진백천은 그를 내버려 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등신. 이자가 전풍객 당주의 목숨을 빼앗아간 놈이야.”

“……감사합니다. 회주님.”

조장은 한눈에 전등신을 보고 그자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반항하던 전풍객이 조금 젊었다면 이자가 아니었을까 싶었으니까.

“네놈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서 제를 지낼 때 함께 놓일 거다.”

“크크큭. 그자는 살려달라고 빌었지.”

“그것만으로 부족하겠지만 결국 네놈들의 뒤에 있던 자들도 전부 죽을 테니. 할아버지께서도 만족하시겠지.”

“울면서 애원해대는 꼴이 무척이나…….”

스걱!

전등신은 자신이 할 말을 다 하고 목을 베어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소금이 담긴 통에 집어넣었다.

“이제 가자.”

“네. 회주님.”

진백천은 은신처를 벗어나면서 기름을 붓고 그곳을 완전히 불태웠다.

한밤중에도 불길은 높이로 타올랐다.

* * *

전풍객 당주의 장례식은 3일이 지난 후에야 치러졌다.

제사상에는 음식들뿐만 아니라 혈막의 살수들의 머리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도회는 혈막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을 적으로 선언했다.

<혈막은 정도회의 철천지원수이며 둘 중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

물론 혈막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조장을 비롯해 3명의 살수가 은신처를 들키고 그들에게 잡혔다는 것에 의문이 들 뿐이었다.

혈막의 본거지.

그곳에서 살수들은 얼굴을 가린 채 모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모든 외부 일도 잠시 접어둔 상태였다.

“기이하군.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우리 중에 첩자라도 있는 것 아닌가? 정보가 이렇게까지 세어나가는 건 상식 밖의 이야기야!”

“흐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살왕마저 출타하신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

혈막의 살수들은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아무리 날고 기는 진백천이라고 해도 살왕이 돌아온다면 목숨을 손안에 든 콩이었다.

암살(暗殺)이라는 한 분야에서만큼 그를 따를 자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혈막조차 이번에 진백천을 필수 살행 대상으로 삼았다.

“감히 우리 혈막과 맞부딪칠 생각을 하다니. 하루하루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곳에 모인 다른 살수들도 같은 생각인지 비릿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혈막의 살수 중 하나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습격입니다!”

단말마의 비명처럼 내지른 소리는 그자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금빛의 부기가 그의 전신을 가르고 지나간 터였다.

“허허. 이곳에 다들 모여 있었군. 바퀴벌레 같은 놈들!”

“……당신은…… 금부?”

금빛 서기를 흩뿌리는 자는 정도회에 있어야 할 황충이었다.

그 뒤로 다른 장로급 인사들과 더불어 천군지사대와 무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얼핏 개방의 무인들과 사천당가의 의복도 보였다.

“……그렇군. 진백천은 이미 이곳의 위치를 알아챈 거군.”

지금 와서 어떻게? 라는 질문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저들은 몰려왔고 지금은 서로의 피를 봐야 할 때였다.

“이곳에 온 게 단지 황충 하나라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

“누가 혼자냐!”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뻗어온 작은 침들은 어둠을 틈타 살수들을 덮쳤다.

“허억!”

침이 피부를 파고든 순간 독은 거침없이 몸에 퍼졌다.

고통스러워하는 살수들을 보며 하얀 수염의 노인이 칼날 같은 눈을 빛냈다.

“새로운 오독신사(五毒神沙)가 제법 효과가 좋군.”

“……당신은 당염?”

“나를 아는군.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 거란 사실도 잘 알겠지?”

“어떻게 당신 같은 자가?”

“동맹이자 친구인 정도회가 요청하는데 사천당가가 가만있을 수 없지! 안 그런가 금부?”

친근한 말투에 황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무림대회를 맞아 정도회로 향하는 중이었기도 하고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새로운 독을 실험해 볼 자들이 필요했는데 좋은 기회야.”

웃음이 짙어지는 당염과 달리 살수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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