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10화
73장 혈막(1)
전풍객의 시신은 관음당의 무사에게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자는 처참한 몰골의 사체를 보고 곧바로 보고부터 하였다.
애초에 그것이 전풍객인지도 모를 만큼 훼손된 상태였다.
당연히 그 소식은 당주급 이상에게만 전달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서 말이 세었는지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정도회 전체에 퍼졌다.
‘…….’
진백천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관음당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짙은 피 냄새가 그를 반겼다.
“……사체는 당주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황대원이 형형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
관음당은 회주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전풍객이 당할 정도라면 평범한 자가 아니란 뜻이었다.
이미 정도회 주변은 천군지사대를 비롯한 무사들로 포위된 상태였다.
“내가 살펴볼 동안 여기 있어.”
“네. 알겠습니다.”
진백천은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당주실로 들어섰다.
밖은 환한 낮이었지만 이곳은 아직 어두웠다.
창에 피가 잔뜩 튀었기 때문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혈투를 벌었는지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흉수는 전 당주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 안에 있었다.’
진백천은 여기저기 난 파손 자국과 흔적만으로도 그때의 현장을 만들어냈다.
전풍객이 들어오자마자 공격은 시작되었다.
무기는 아마 길지 않은 단검이었을 터였다.
피가 튄 거리가 길지 않았으니까.
‘의외로 반항이 길어지자 또 다른 이가 나섰어. 흉수는 적어도 둘. 아니면 셋인가?’
놈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풍객의 몸에 칼날을 찔러넣었다.
진백천은 그 자국을 확인하고자 전풍객의 사체로 걸어갔다.
그는 집무실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바로 어제 진백천과 함께 눈을 맞으며 대화하던 그 복장 그대로였다.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상태였다.
진백천은 그의 눈을 감겨주려다 문득 그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벽에 뿌려진 피였다.
‘죽기 직전까지 핏자국을 노려봤다?’
이러한 광경은 전문 살수가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난잡했다.
진백천은 전풍객의 뒤에 서서 핏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이내 그것이 커다란 글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건 전 당주가 쓴 거군.”
전풍객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흉수를 알릴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단순히 피로 적거나 하면 놈들이 알아차릴 테니 전혀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바로 남은 진기를 끓어 모아 사방에 피를 내뿜었다.
커다란 글자는 얼핏 보면 단순히 피가 칠해진 방일 뿐이었고, 흉수는 참혹한 광경에 만족하며 돌아갔다.
“……혈막(血幕).”
피의 글자는 정확히 그 두 글자를 만들어냈다.
진백천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전풍객의 손자인 전등신이었다.
“할, 할아버지!”
그는 처참한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도 칼밥을 먹고사는 무인인지라 이를 악다물며 버텨내려 했다.
진백천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꽉 쥔 두 손이 하얗게 변해 부르르 떨렸다.
“혈막이다.”
“……혈막.”
“그래. 기억해. 그게 너의 복수대상이자…….”
진백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각 무력대대 대주들은 이미 전부 모인 상태였다.
진백천은 그들을 낮은 눈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우리 정도회가 없애야 할 첫 번째 적이다. 그리고 놈들의 목을 베어 전 당주의 한을 푼다.”
* * *
진백천은 정도회 내에서 발생할 혈사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대대적으로 주변에 적들의 정체에 대해 공개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혈막의 살수가 정도회의 장로를 죽였다!>
<그에 대한 값은 혈막 전체의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것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이는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피로 되갚아주겠다!>
처음으로 정도회가 전면으로 내놓은 선전포고였다.
그동안의 정도회가 보인 모습은 구름에 휩싸인 용이었다.
그런 용이 갑자기 피의 비를 뿌리겠다고 하자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졌다.
“혈막? 그자들은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던 놈들이 아니었어?”
“그런 자들을 정도회가 찾아낼 수 있을까?”
피를 몰고 다니는 정도회는 왜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백천은 오히려 이편이 더 자신 있었다.
“전등신. 전풍객 당주의 뒤를 이어서 관음당을 임시적으로 맡기지.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곧바로 보고해.”
“네. 회주님.”
“전 무력대대는 칼을 뽑고 기다려라. 놈의 꼬리는 어떻게든 발각될 테니까.”
모든 대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밖에도 진백천은 이참에 안팎을 전부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정도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우습게 봤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도회를 비웃어댔다.
“어떻게 된 게 당주가 살해당할 수가 있지? 실력 대신 나이순으로 앉히기라도 한 건가? 하하하”
“자네 말이 심하군.”
“말이 심하긴. 내 말이 어디 틀렸나? 정도회도 알고 보면 용이 아니라 단지 몸집 큰 미꾸라지일 수도 있어!”
평소의 정도회라면 궁시렁거리는 그런 이들쯤은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롱이 되는 대상은 정도회의 죽은 장로였고, 진백천은 결코 그런 것까지 귀찮다고 무시할 정도로 무심하지 않았다.
“당장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을 쫓아내. 마을에 투자한 자라면 돈을 물어줘서라도 다시는 발길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관과 관련 있는 자라면 내가 직접 가서라도 아가리를 뭉개주지.”
친절하기만 하던 순찰대원들과 무력대대는 칼날 같은 눈을 뜨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한 자들은 가차 없이 쫓아냈다.
“……정도회가…… 아니, 진백천 회주가 정말 마음을 먹은 모양이군.”
관음당이 관리하는 전서구들이 하루에서 수십 마리씩 날아올랐다 가라앉았다.
조금이라도 혈막과 관련된 소식이 있다면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진백천은 잠시도 쉬지 않고 관련 있는 자들을 심문했다.
“회주님. 인근에서 살수로 활동하던 자입니다.”
황대원이 끌고 온 자는 이미 온몸이 엉망이었다.
“끄으으윽. 아, 아무리 정도회라고 해도 죄 없는 이에게 이럴 수는…….”
“닥쳐.”
진백천의 손에는 이미 그자에 대한 정보가 들려 있었다.
출생부터 최근 어디서 살수행을 맡았는지까지 전부였다.
하오문과 개방, 녹림과 하다못해 장강수로채를 통해서라면 어젯밤 누구와 붙어먹었는지, 함께 무엇을 먹었는지조차도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혈막에 대해 아는 걸 전부 털어놔.”
“……아무것도…….”
진백천은 그자가 말을 다 끝내기 전에 발등을 그대로 밟아버렸다.
“끄아아아아악!”
“혈막에 아는 자가 있지?”
“모, 모른…….”
콰드득!
순식간에 반대쪽 발목도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진백천 앞에서는 거짓말 따위 통하지 않았다.
이미 상단전을 열어 그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듣는 중이었다.
-제, 젠장. 나는 단지 그들에게 정도회의 정보를 팔아넘긴 것밖에는…….
이놈이 며칠 전 만난 자들이 혈막의 살수, 혹은 그 대리인들이라는 것쯤은 파악이 끝났다.
바닥에 흩뿌려진 수많은 피의 주인들 덕분이었다.
“누구에게 정도회 정보를 팔아넘겼지?”
“……다, 단순한 상단이었을…….”
-……망할 호운상단…….
상단의 이름이 들렸지만 진백천은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살기를 더 끌어내며 남자의 정신을 압박했다.
“……상단은 단지 정도회와의 거래를…… 원할 뿐이라고…….”
-그래서 정보를 비싸게 팔아넘겼을…….
그 정보에는 정도회의 구역과 조직도 따위가 전부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자에게 이러한 정보를 팔아넘긴 정도회의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진백천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누구냐? 너한테 그 정보를 팔아넘긴 자가?”
“으으…….”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모든 것을 털린 채 끌려나갔다.
그리고도 몇 명이 더 왔다 가고 나서야 진백천은 어두운 방에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정도회 내에 이런저런 끄나풀이 많았고 그만큼 그의 손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회주님. 닦으세요.”
기다리고 있던 당소예가 따듯하게 적신 손수건을 건넸다.
“고마워.”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자 피곤함이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며칠 강하게 조사한 탓에 대략적인 가닥은 잡혀 나왔다.
‘내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그런지 놈들은 몇몇 정보를 흘리고 갔다.
꼬리가 보일 때 더 세차게 몰아붙여야 했다.
그래야 더 많은 살점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강량호. 당장 호운상단부터 뒤져. 그곳에 이미 놈들은 없겠지만, 섣불리 도망가거나 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미 관의 도움을 받아서 주변에 경계를 철저히 하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도망간다고 하면 스스로 우리가 범인입니다- 라고 시인하는 꼴이었다.
그렇다면 살수놈들은 호운상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고 그곳을 중심으로 찾아보면 되었다.
“호운상단에 가서 그곳과 거래한 장부를 찾아내는 것을 잊지 마.”
“장부 말씀이십니까?”
흉수를 찾아내는 게 목적이라 생각했던 강량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만 강량호는 눈치가 빨라서 그 명령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 민감함이 이런 복잡한 일에 꼭 그를 시키는 이유였다.
“호운상단의 이름으로 정보를 샀다면 그들과 거래하는 자들, 혹은 자금을 건넨 놈들 중에 배후가 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까.”
“역시. 회주님은 그 뒤까지 생각하시는 거군요.”
강량호는 또 한 번 배웠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무사들과 함께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기 전.
호운상단은 정도회로부터 공격을 받아 박살이 났다.
그 안에 발견된 장부는 그들이 어떤 거래를 해왔는지 흉수와 관련이 있는지 모조리 알려주었다.
“회주님의 예상대로 뒤에 더 큰 상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알아보려고 한순간 이미 꼬리 자르듯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걱정 마.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니까. 이제 흉수의 머리를 찾으러 가야지.”
마치 맡겨놓은 듯 말하는 진백천이었다.
그날 밤.
진백천은 정도회의 무사들과 함께 혈막의 은신처로 향했다.
지켜보는 이들에 따르면 그들은 나갈 시기를 잡지 못하고 그곳에 발이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놀랍게도 정도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회주님. 아무래도 그놈들이 아직까지 도망가지 않고 그곳에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까.”
황대원을 비롯해 강량호나 전등신, 다른 무력대대의 대주들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진백천의 말에 눈이 붉어졌다.
“알아낸 바에 따르면 전 당주를 시작으로 몇몇 인물을 더 죽일 생각이었어.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정도회를 우습게 봤겠지.”
“……찢어 죽일 놈들.”
“그래. 이번에 어떻게 보이냐에 따라 세간의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들은 곧 오래된 집 앞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무사들이 틈새도 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안에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비밀 통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포위를 더 넓혀.”
진백천은 곧바로 독고구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진백천의 기감에는 정확히 놈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질척이는 듯한 비릿한 피 냄새는 덤이었다.
‘아직 전 당주의 피 냄새가 마르기도 전이지.’
“생포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진백천의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검끝으로 빠져나간 강기의 파도가 일격에 대문을 박살 냈다.
“전부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