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07화
70장 당천아의 고백
상장의 속마음에 진백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을 알려준 게 이자라고? 대체 누구지?’
혹시나 정도회에 숨어든 간자가 그런 게 아닐까 싶었지만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보면 마교나 사파 쪽은 아니었다.
‘흐음. 한번 알아봐야겠네.’
진백천은 굳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상장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고 안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인 진씨 아저씨의 시선이 남몰래 진백천의 뒷모습을 쫓았다.
상단전이 열린 진백천은 그런 시선을 똑똑히 느꼈다.
‘흐음. 집안 단속도 한번 해야겠어.’
그리고 진백천이 곧바로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우선 정도회의 본당으로 향해서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주요 장로들과 대주급 이상의 인사들이었다.
“가장 먼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충은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진백천에게 직접 말했다.
“회주님의 말씀에 따라 정도회의 안팎을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첫째로 일반 무사들을 비롯해 무력대대를 늘리고 근처 마을까지 순찰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오오. 잘하셨네요. 제가 소림사에 가서 36방을 보고 느낀 건데 저희도 그런 체계적인 수련체계를 만들어볼까 해요.”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것도 신경 써서 만들어보겠습니다!”
진백천과 황충은 죽이 잘 맞았다.
그가 말만 하면 황충이 바로 옳다 하며 동조했다.
“둘째로 상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동안 정도회의 수익은 일부 가게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을 위해 마을을 확장하며 가게와 상가를 만들어 새로 온 이주민들에게 임대해 주었습니다!”
황충이 그로 인해 얻는 수익을 간략하게 말하자 다른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도 정도회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이 정도로 많을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마을을 확장하면서 호북성 관리들과 마찰은 없었어요? 그것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초창기에는 찾아와서 귀찮게 해댔지만 회주님께서 정2품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제수되었을 때부터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지방의 안찰사들이라고 해봤자 정3품에 불과했다.
관직 수준으로도 진백천이 높았고, 표기장군의 특수한 직책은 날고기는 자들이라고 해도 단칼에 잘라 버릴 수 있는 자리였다.
굳이 진백천의 심기를 어질러가며 주머니 속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하북성 성주나 관리들 입장에서도 사람이 많아지면 좋긴 하겠지.’
모르긴 몰라도 늘어난 세수로 인해 싱글벙글일 터였다.
“셋째로 대형 상단의 설립입니다. 물건은 호북에 위치한 특산물이며 호위는 정도회의 일반 무사를 비롯해 저희와 관련된 무가의 무사들로 하였습니다.”
무척이나 좋은 생각이었다.
정도회의 무사들에게 강호 경험을 주기에도 충분했고 주변의 무가들에 영향력을 넓혀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황충은 진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상단의 운영자는…….”
진백천은 이미 안다는 듯이 뒤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천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역시나 당찬 기색이 역력했다.
“회주님. 미숙하지만 제가 운룡상단의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운룡상단?”
“네. 그동안 임시로 정도상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얼마 전에 운룡상단으로 이름을 최종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진백천의 별호인 운룡심검의 앞 두 글자를 그대로 딴 것이었다.
“그나저나 괜찮겠어요?”
그의 물음은 당천아가 아니라 황충을 향했다.
“어떤 것이 말입니까? 걱정되시는 게 있으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정도회가 최초로 만든 대형 상단을 외부인에게 맡겨도 되냐는 거예요.”
외부인이라고 정확히 지칭하는 단어에 당천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그녀도 분명 짐작하고 있던 문제 중 하나였다.
처음 당천아가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정도회는 만만하고 우스운 곳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그 위상과 높이는 달라져만 갔다.
-……이제 사천당가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런 위치가 되었어.
외부와의 관계, 진백천의 직위, 무사들의 수준, 모든 것이 당당히 호북의 강자이자 강호의 패권주자로 나선 것이다.
무림오봉(武林五鳳) 중 하나이자 머리가 비상한 당천아조차 쓸모를 보이는 시기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정도회에서 쫓겨났을지 몰랐다.
-나도 내 가치를 보여야 해! 가가, 아니, 회주님은 쓸모있는 자를 버리지 않아! 전 당주만 봐도 알 수 있어!
당천아의 속마음을 들으며 진백천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철없이 떼만 쓸 줄 알았던 당천아가 이렇게까지 훌륭히 어른스러워질지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정도회에 돌아왔을 때 가가- 니, 뭐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당천기를 남기더라도 그녀를 억지로 사천당가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천아는 오히려 진백천의 성향을 빠르게 눈치챌 뿐만 아니라 정도회 인사들과는 일체의 마찰도 없었다.
‘그 자존심 센 사천당가가 이렇게 숙이고 지내다니. 그건 제법이야.’
그렇기에 황충마저도 그녀의 능력만 보고 상단의 운영을 맡긴 것일 터였다.
‘정확한 그녀의 생각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녀가 분명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인이라고 하지만 딱히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 조금 더 자유롭고 싶은 진백천이었다.
만약 지금 노력의 대가가 진백천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 관계를 단칼에 베어내야 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당천아는 진백천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 진짜로 해보고 싶어졌어요.”
“뭐를?”
“……상단 경영 말이에요. 누구보다 더 크고 천하 3대 상단에 버금가게 만들어볼게요.”
“그건 사천당가에서도 못한 거 아닌가?”
“그건 사천당가니까요.”
-정도회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사천당가와 다르게 사람들 사이의 인식뿐만 아니라 전망이 무궁무진하니까. 아니! 무조건 가능하게 만들 거야.
진백천은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유심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정도회의 어떤 점이 당천아를 이렇게 변화시켰는지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그냥…… 욕심이 생긴 거예요! 최고로 정말 만들어보고 싶어요!”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깨달았을 뿐이었다.
진백천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이 상단을 운영하는데 제법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상단을 키워가는 게 재밌다고 말하면 분명 이상하게 보겠지?
그녀의 의도가 그렇게 순수하다면 진백천으로써도 나쁠 것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딱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혹시라도 사천당가의 상단과 맞부딪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호북과 사천은 가깝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았다.
진백천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한 당천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유난히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떨림은 길지 않았다.
이내 고개를 든 당천아가 그녀답게 당당히 대답했다.
“박살 내버리겠어요. 그 상대가 누구든. 운룡상단의 앞길을 막는다면요.”
그녀의 속마음을 들은 진백천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로서도 당천아가 상단을 맡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잘 부탁하지.”
“감사해요.”
당천아가 물러나자 황충이 만족스러운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네. 후딱 해치우죠.”
“넷째로 회주님께서 맺은 동맹관계를 철저히 해나가도록 지시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음당(觀音堂)을 설치해서 자연스레 정보가 모일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진백천이 지시한 적은 없지만 충분히 좋은 생각이었다.
관음당의 당주는 전풍객이 맡았다.
이미 순찰당주를 겸하고 있지만 외부의 정보를 취합하고 선별해내는 일이 제법 중요하고 꽤나 집요함이 요하는 만큼 그에게 넘겨졌다.
‘이제는 제법 자리에 순응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전풍객은 온화해진 눈으로 황충과 진백천의 대화를 듣는 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아암. 황충이 또 하루 종일 떠들어대겠구나.
“다섯째로 정도회 내부조직의 개편 및 증설에 관한…….”
전풍객의 말대로 황충은 물 만난 고기처럼 그동안 자신이 해오고 진행하려는 일에 대해 쉬지 않고 말했다.
적당히 듣다 듣다 적당히 끊어낼 때쯤에는 늦은 저녁이 된 후였다.
“……허음.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면 미처 못한 말씀은 식사 후에 이어서…….”
“황충. 잠깐만요. 바쁜데 괜히 다 같이 모여서 이럴 필요 없으니까. 간략하게 서신으로 정리해서 보내줘요.”
진백천의 말에 뒤편에 서 있던 자들의 얼굴이 전부 화색을 지었다.
그들도 감히 말은 못 했지만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직접 말로 듣는 것과 사뭇 다르실 텐데.”
“괜찮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하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황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당의 문이 열리며 음식이 들어왔다.
끊이지 않고 놓이는 음식에 진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주님의 복귀를 축하하는 의미로 차려봤습니다. 이미 이곳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래요?”
술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진백천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이었다.
진백천은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고 나서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은 한동안 쓰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먼지 하나 없었다.
“흐아.”
진백천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우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노곤노곤하니 이제야 비로서 집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보니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정도회는 잘 굴러가겠어. 생각보다 편할지도 모르겠는데?”
진백천은 역시나 황충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평소보다 살짝 늦게 일어난 진백천은 세안을 하고 습관처럼 몸을 움직였다.
밖과 다른 점이라면 그의 개인 연무장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태천검을 수련하고 곱게 쌓여 있는 종마검을 꺼냈다.
부적에 쌓여 있지만 역시나 악의가 가득한 살의가 문득문득 피어오르곤 했다.
‘흐음. 이게 처치 곤란이네.’
진백천에게 환상을 보여줄 정도의 의지를 가진 물건이었으니 보통 이가 가까이 다가온다면 바로 마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검을 파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고구검을 꺼내 아무리 내리쳐도 종마검은 조금의 흠집도 없었다.
‘독고구검과 맞부딪쳐도 흠집 하나 없다 이건가?’
안에 담긴 것만 아니면 절세의 보검(寶劍) 소리를 들을 만했다.
결국 부수는 것을 포기한 진백천은 다시 꽁꽁 묶었다.
혹시 몰라 태허무극진결의 파사(破邪)의 기운으로 검을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반항하듯 떨리던 종마검이 얌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혈강옥불상의 세 번째 초식도 확인해 보지 않았지?’
피가 부글부글 끓더니 폭발시키는 초식이었다.
환상을 지켜봤던 진백천은 이미 그 내력의 운용이 뇌리에 각인된 상태였다.
‘흐음. 한번 사용해 볼까?’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고 바닥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내력이 섞인 핏방울이 돌로 된 연무장 바닥을 적셨다.
혈호폭 사천즉시(血湖爆 赦天卽尸).
피는 얼마 되지 않는 양임에도 불구하고 환상에서 봤던 것처럼 거품이 일었다.
그리고 이내 격렬하게 폭발하며 바닥이 움푹 파였다.
확실히 얼마 되지 않는 피였다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후우. 그렇다면 그 피 웅덩이가 폭발하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던 천살대 마인들은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진백천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슬슬 수련을 끝마치고 돌아갈 때쯤 연무장으로 당소예가 찾아왔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회주님 큰일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