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203화
68장 친구가 된 기념으로(3)
‘흐음. 꽤 하는데?’
유형화된 살기가 진백천을 노리고 뻗어왔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종류의 정신 간섭 따위는 그에게 절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백천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살기를 집어삼켰다.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야 이런 검이 만들어지는 거지?’
실제 그 모습을 보지 않았음에도 코끝으로 비릿한 냄새가 맡아지는 기분이었다.
진백천은 상자를 뜯어내고 그 안에 담긴 목갑을 발견했다.
그 목갑을 열자 마침내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종마검(從魔劒)?’
마(魔)를 따르는 검이라는 뜻이었다.
신기하게 보라색 빛을 띠는 검신에 장식 하나 없이 기다란 검이었다.
검집 하나 없이 덩그러니 있는 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보검이었다.
막상 모습이 드러난 검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진백천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종마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지이이이잉-
그러자 종마검이 잘게 떨리며 반응했다.
진백천의 정신을 휘감으려거나 차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검과 함께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몸속의 혈강옥불상이었다.
-더 많은 피(血)!
-더 많은 살육(殺肉)!
-죽음이 많아질수록 더욱더 강해진다!
그동안 비교적 얌전했던 혈강옥불상의 의지가 머릿속을 울렸다.
동시에 약해졌던 기운이 웬일인지 검을 쥔 후에 발작하듯 날뛰었다.
우우우우웅-
머릿속이 파도처럼 울렁이며 환상 비슷한 뭔가로 뒤덮였다.
진백천은 이 사태의 원인 종마검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검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을 때 그는 이미 구룡성의 최상층이 아닌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지독한 환상이다.’
환상이면 환상이지 굳이 지독한 이란 단어를 붙인 것은 주변의 풍경 때문이었다.
그곳을 둘러보던 진백천의 시선에 붉게 물든 간판이 들어왔다.
‘혈뢰음사(血雷音寺)!’
한적해 보이는 조그만 절은 온통 피로 절은 상태였다.
사방에 쓰러져 있는 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은 자들의 사체였다.
전부 혈뢰음사의 무공에 만들어지기 위해 마교의 마인들이 납치한 자들이었다.
진백천은 그제야 종마검이 이 미친 혈뢰음사 놈들과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얌전했던 혈강옥불상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분명 전부 마교에 의해 죽었을 텐데?’
진백천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혈뢰음사의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이이이익-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승복의 승려였다.
피의 호수 위에서 진백천에서 혈뢰음사의 무공을 보여주던 자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붉은 눈동자뿐이었다.
그자는 마치 걷는 듯 아닌 듯 허공을 흔들거리며 앞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숨어서 지켜보는구려.
승려가 말을 했을 때 진백천은 흠칫 놀랐다.
마치 자신을 향해 말하는 듯한 모습 때문이었다.
전의 환상에서는 항상 무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났었다.
‘대체 이 환상은 뭐지?’
대답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진백천의 뒤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승려 주제에 기척이 좋구나.
진백천이 놀라며 뒤돌아서자 광대 가면을 쓴 이가 보였다.
아무리 환상이라고 하지만 조금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네놈들 말대로 사람을 하도 죽여대서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이냐?
광대 가면은 혈뢰음사에 대해 잘 아는지 이죽이며 말했다.
하지만 승려는 그저 더 깊게 합장을 할 뿐이었다.
-재미없는 놈. 쯧. 물건은?
-만들어졌소.
-어디 있지?
-저 안에 있소.
승려가 가리킨 곳은 혈뢰음사 안쪽의 불당이었다.
얼핏 열린 문틈으로 혈강옥불상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혈강옥불상이 만들어졌던 때를 보여주는 건가? 왜지?’
진백천이 의문을 갖는 사이에도 눈앞의 환상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흘러갔다.
광대 가면을 쓴 남자가 손짓하자 허공에서 붉은 깃발을 든 마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등장하기 전조차 있는지도 모를 자들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은밀함보다 그들의 옷차림이었다.
‘천살대(天殺袋) 마인들!’
특이한 창끝에 마(魔)가 새겨진 붉은 천을 달고 휘날리는 모습은 그들의 상징과도 다름없었다.
그들은 이끄는 것은 오직 마교의 교주뿐이었다.
마뇌 마저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지살대의 마인들과 함께였다.
‘……천살대 마인 3명이면 화산신검과 잠시 자웅을 겨룰 정도니까.’
그 무력만으로만 따지자면 마교의 교주인 마천영과 비등했다.
그들은 오직 교주의 칼로써 만들어진 이들이었다.
진백천은 광대 가면을 쓴 자가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천영인가? 그런 것 치고는 젊어 보이는데?’
-확보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머지도 정리해야지. 이곳에 이들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게 완벽히 제거해.
-존명(尊命)!
대답과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그때까지도 혈뢰음사의 승려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주먹이 닿기 전 몸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사라지며 마인들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제1초.
혈홍각출 시산육혼 (血紅脚出 尸山肉魂).
붉은 피가 치솟니 시체와 영혼이 떠돈다!
승려는 그대로 한쪽 발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벼락처럼 아래로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
그러자 땅이 거칠게 흔들리며 피의 가시가 솟구쳤다.
진백천이 사용할 때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강기의 가시였다.
하지만 천살대의 마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받아내며 승려의 몸을 붙잡았다.
강기의 가시는 그들의 몸을 타고 흐르는 마기를 뚫지 못했다.
‘……괴물이다.’
제2초.
혈각시 시즉산(血角矢 屍卽散).
피의 뿔이 쏘아지니 시체가 흩어진다!
승려는 곧바로 두 번째 초식을 사용했다.
합장한 손에서 뻗어 나간 붉은 강기가 마인의 심장을 노리며 뻗어 나갔다.
1초와 다르게 만들어진 단 하나의 강기는 공간 자체를 찢어발겼다.
-반항이 심하군.
마인들은 양손이 마기로 차오르며 강기를 붙잡고 그대로 흩어냈다.
흑악지괴(黑惡地怪).
손이 찢어낸 것은 강기뿐만이 아니었다.
붙잡힌 승려의 왼쪽 어깨가 장난감처럼 뜯겨나갔다.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승려를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만신창이가 되어 피 구덩이에 처박혔지만 승려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아직도 반항할 생각인가?
승려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마인들을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제3초.
혈호폭 사천즉시(血湖爆 赦天卽尸).
피의 호수가 터지니 하늘마저 시체 앞에 엎드린다!
‘세 번째 초식?’
이것은 진백천도 본적이 없던 것이었기에 더욱 시선이 갔다.
승려가 세 번째 초식을 사용하자마자 피의 웅덩이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이내 피할 새도 없이 격렬하게 폭발하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앙!
퍼진 핏방울들은 그것이 각각 날카로운 암기가 되어 천살대 마인을 삼켰다.
마기에 물든 몸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며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급소는 전부 피한 모습이었다.
‘피의 폭발. 이것이 세 번째 초식이었구나!’
지난 회귀에 마화린이 사용하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놈은 궁지에 몰리면 광전사가 되어 여기저기 피를 뿌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상대를 끌어들여 피의 폭발로 수많은 정파의 무인들을 처리했다.
‘이것 때문에 마화린을 상대할 때는 항상 원거리였었지.’
최후의 초식 정도라 생각했는데 겨우 세 번째 초식이었다니 놀라웠다.
승려는 피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뜯겨 나간 어깨는 어느샌가 지혈이 되어 살점이 자라나는 중이었다.
‘괴물이군. 살점이 자라나다니.’
이런 것은 몰랐는지 뒤쪽에서 지켜보던 광대 가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엄청난 재생력이야. 혈뢰음사의 무공에 그런 효능이 있었던가? 차례대로 잘라봐. 허리, 가슴, 마지막은 목 순서대로.
천살대의 무인들은 별다른 대답 없이 승려에게 달려들었다.
승려가 계속해서 기이한 수를 쓰며 반항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광대 가면의 말처럼 허리부터 시작해 몸이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머리만 남았음에도 승려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기괴한 장면이었다.
-호오. 재생이 되는군. 이건 어디까지 되는 거지? 무공을 만들어내면서 의도한 건가?
-……죽음을 쫓을수록 기이하게 죽음에서 멀어지더구려.
-흐흐. 재밌구나. 미치광이들이 불사(不死)의 무공을 만들어냈어! 크하하하하하!
승려는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광대 가면과 마인들을 올려다봤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진백천은 이 자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 볼 일 없는 무공이라 생각했는데 제법 괜찮은 구석이 있다, 이거지? 부작용은?
-서서히 광증에 사로잡혀 죽음을 쫓다…… 결국 죽음에 잡아먹히는…….
-그 정도면 충분하지. 화린이가 익히기에 적격이겠어.
광대 가면은 승려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뒤돌아섰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전부 얻어냈으니 이제 볼일 따위 없었다.
그러자 천살대 마인들이 허공에 떠오르며 마기를 끌어모았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혈강옥불상의 무공은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혹시라도 무공이 완성된다면…… 죽음을 점령한 최초의 무공이 될지도…….
진백천은 승려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쓰러진 승려의 붉은 시선은 정확히 진백천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진백천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허공에서 마기의 폭포가 쏟아졌다.
파천마광권(破天魔廣拳).
콰아아아앙!
승려를 포함해 주변의 혈뇌음사는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진백천은 환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시선에 손에 들린 종마검이 보였다.
“괜찮나?”
진백천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검을 집기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어딘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자 사자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혹시라도 마검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이면 지체 없이 손을 쓸 생각이었다.
“흐음.”
서서히 자신의 무기에 손을 뻗어가는 그의 표정에 점점 미소가 맺혔다.
“안 미쳤거든? 괜히 그런 핑계 대고 또 붙을 생각하지 마시지?”
정말 그럴 마음도 있었는지 사자혁이 헛기침을 했다.
“하긴 천하의 정도회 회주가 그깟 마검 따위에 흔들릴 리가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자혁은 수하를 불러 종마검을 부적으로 칭칭 감았다.
그러자 검이 내뿜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어때? 이 정도면 친구가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치고는 꽤나 괜찮지 않나?”
“충분해.”
“그러면 나도 기대해 봐도 좋겠지?”
“뭐가?”
“선물은 원래 주고받는 것 아닌가? 맞지 유소어?”
“맞습니다. 천주님! 원래 강호의 도리가 은혜는 3배로 원수는 30배로 갚는다고 했습니다!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그에 응당한 것을 주는 것이 진짜 친구입니다!”
때리는 시부모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유소어는 먹물에 찌든 말로 진백천을 압박했다.
진백천은 뭐가 괜찮을까 생각하다 적당한 것을 생각해냈다.
“그러면 이거 어때? 전에 알고 싶다고 했던 무공 말이야.”
“걸개구타권?”
“맞아. 그걸 알려줄게. 흐음. 시범 상대가 있어야 할 텐데…….”
진백천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는 듯했지만 역시나 마지막으로 멈추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유소어. 나와보지?”
“……저…… 그게…….”
“에이. 빼지 말고. 잠깐이면 되니까 그냥 좋게 나오지?”
유소어는 본능적으로 방금 자신의 무덤을 직접 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