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86화
64장 신경전(4)
진백천의 말에 놀란 것은 당소예뿐만이 아니었다.
황대원과 다른 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주님. 당 소저가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시녀입니다. 단순히 실력을 떠나서 그녀를 내보냈다가는 사패천에서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내보내던 우리 일이지.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친선대련까지 하게 생겼는데 우리가 사패천 눈치를 봐야 돼?”
진백천이 당소예를 내보내는 것은 단순히 무인이 적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유 없이 소예를 내보내는 건 절대 아니야.”
당소예가 대환단을 먹으면서 내력의 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진백천을 따라 다니며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경험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그녀를 보고 조금이라도 방심이라도 한다면 1승을 쉽게 얻어올 수도 있었다.
“소예는 그렇게 방심하는 자를 위한 비수야.”
“제, 제가 비수요?”
“응. 그냥 비수도 아니고 특급 비수.”
비수치고는 조금 어리바리해 보였지만 진백천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장로들은?”
“무사들과 함께 휴식 중입니다.”
이름과 얼굴도 제대로 기억 안 날 정도로 존재감이 흐릿한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친선대련 이야기가 나왔지만 자신들이 나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력으로 따지면 대원들보다도 뛰어나고 대주에 버금갔다.
물론 그들이 신위를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머릿수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부터 먹을까?”
사패천에 들어왔지만 이들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춘식이라는 솜씨 좋은 요리사도 있었고 말이다.
“그럼 제가 바로 말해서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오늘 든든하게 먹어둬야 내일 힘쓸 테니까.”
정도회 무사들은 그렇게 거나하게 식사를 차려 먹었다.
적진 한가운데라고 봐도 무방할 사패천의 한 중심에서였다.
그들이 그렇게 따로 밥을 차려 먹었다는 소식은 사자혁과 신위들에게 곧바로 전달되었다.
* * *
“어처구니없군. 시녀들을 전부 물리고 밥을 차려 먹어?”
“……그렇습니다.”
“이건 우리를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군.”
신위들은 다들 어처구니없어했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해도 정도회 한복판으로 갔다면 곧이곧대로 주는 음식을 받아먹진 않을 테니까.
“유소어. 친선대련을 들은 진백천은 어때 보였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하아! 역시. 이유 없이 구룡성에 들어선 게 아니었군!”
전부 유소어의 속마음을 미리 엿들었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사자혁의 머릿속의 진백천은 아니었다.
“분명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움직인 것이다. 그는 그런 인물이야!”
“맞습니다. 무공도 그만큼 강하고요!”
사령령이 재빨리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사자혁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백천을 올려치는 느낌이 강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살기를 간단히 파훼하는 그 압도적인 모습은 모른다고 해도 홍혈도를 제압하면서 보인 무위는 보통이 넘었다.
“유소어. 친선대련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왕 판을 짰으니 크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정도회를 꽉 눌러주면서 저희의 위상을 알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패천의 모든 무인을 비롯해 하오문과 개방에 친선대련에 대해 알리겠습니다. 정도회의 무림대회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구경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루가 되지 않아서 모든 강호로 퍼져 나갈 겁니다.”
“좋군. 그렇게 해라.”
유소어는 그가 말할 줄 알고 미리 모든 계획을 시행했다.
사패천의 가장 큰 연무장은 그들의 친선대련을 위해 꾸며지는 중이었다.
그러한 친선대련 소식은 유소어의 예측대로 강호에 많은 파란을 일으켰다.
“정도회와 사패천의 친선대련?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마교가 불경 읽는 소리를 하는군!”
“진짜야! 하오문과 개방에서도 이미 사람들을 파견했어! 내일 단 하루만 구룡성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더군!”
“정, 정말인가? 그럼 우리도 가서 봐도 되나?”
불과 반나절 앞서 알려진 소식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강호의 무인들로 구룡성의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누가 나오는지는 모르나?”
“거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래도 확실한 건 진백천 회주와 사자혁 천주는 나오지 않겠나?”
“크으. 차기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미리 기리는 날이 되겠군!”
* * *
식사를 마친 진백천은 대주들과 함께 이야기했던 것을 모두에게 말했다.
가장 놀란 것은 아무래도 하릴없이 쉬고 있던 장로들과 춘식이었다.
“흐음. 잠깐 회주. 아무래도 우리는 나이를 먹었고…… 구태여 친선대련까지 나가서 저들과 겨룬다는 게…… 허허.”
“어린 무사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습니다. 크흠.”
하지만 진백천은 그런 대답을 이미 예상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 장로들도 약왕당주의 영약을 먹었어요?”
“…….”
“쓰읍. 먹었냐고요.”
진백천의 눈매가 점점 날카로워지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었습니다.”
“제가 듣기론 약왕당주가 젊은 무사들을 위해 정도회의 재물을 써서 만든 영단으로 아는데 틀려요?”
“……맞, 맞습니다.”
장로들의 몫까지 생각하면서 만든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오히려 일반 무사들보다 더 잘 만들어진 것을 골라 섭취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먹은 값은 해야죠. 장로들은 이럴 때 후배들을 위해 나서라고 존재하는 거예요. 제 말이 틀려요?”
진백천의 심드렁한 말에 장로들은 찔끔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선대련이니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대신…… 지면 알죠? 차마 부끄러워서 장로님들 친히 여기 두고 갈지도 몰라요.”
은근한 협박에 장로들이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원래 전풍객을 따르던 장로들이었다.
이번에 회주를 모시러 간다고 하니 두 발 벗고 뛰쳐나온 것이었다.
-끄응. 단순히 말뿐이 아니라 정말 드잡이질을 시키려는 모양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정도회에 처박혀 있을 걸 그랬군.
후회하는 장로들의 속마음을 들으며 진백천이 피식 웃었다.
저들의 실력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엄연히 장로들이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명만 이겨주면 만족했다.
“그러면 오늘은 눈치 보지 말고 푹 쉬라고. 내일 하루 종일 기 싸움을 해야 할 테니까.”
“네. 회주님!”
하지만 쉬라는 말과 달리 진백천은 해가 지기 전에 황대원을 비롯해 당소예와 함께 전각을 몰래 빠져나왔다.
몇몇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회주님. 저희끼리 움직이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상관없어. 내일이 친선대련인데 전날에 회주에게 문제가 생긴다? 당연히 사패천이 의심을 받지 않겠어?”
사패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진백천이 별문제 없이 대련에 나오게끔하는게 오명을 받지 않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를 걸을 때마다 무인들이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보면 괜히 엮였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그나저나 어디를 가시려고 하십니까?”
“경매장.”
“이곳에 경매장도 있습니까?”
“춘약부터 마약까지 다 팔아치우는 더러운 골목인데 돈이 되는 경매장이 없을 리 없지.”
경매장은 돈이 된다.
물건을 사려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받는 입장비부터 간혹가다 호구라도 잡으면 버는 수익이 엄청났다.
더구나 일반적인 가게가 워낙 비싸다 보니 상대적으로 경매장을 싸게 생각했다.
“사천에서 갔던 경매장 기억나지? 그곳과 비슷할 거야.”
하갈후와 함께 갔던 곳에서 단 1문을 더 놓게 써서 피독주를 획득했었다.
“이곳에서 구매하실 물건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있지.”
진백천의 말에 황대원은 다소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굳이 비싸고 위험할 수 있는 사패천의 경매장을 참여하는 것은 꺼림칙했다.
“걱정 마. 우리가 참여하는 건 고정경매니까.”
“고정경매? 그게 뭐예요?”
경매에는 흔히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경쟁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자유 입찰을 해서 경쟁을 하며 가격을 올리는 방식과 고정된 최소 가격을 두고 파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 방식은 주로 경매 물건이 많아서 유찰이 많은 경우 이렇게 하기도 했다.
사람이 많아도 팔리지 않는 물건은 항상 존재했다.
‘지나치게 비싸거나, 지나치게 특이하거나.’
진백천은 굳이 자유입찰에 들어가서 얼굴을 팔리며 물건을 사고 싶지 않았다.
‘나인 걸 알아보는 순간 어떻게든 경쟁하려고 여기저기서 가격을 올려대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경매장 앞에 도착했다.
특이하게도 경매장은 땅을 파고 지하에 만들었다.
“……저희 땅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으으. 무덤도 아니고.”
보통 지하는 환기도 잘 안 되고 물건관리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사패천에서 굳이 땅속에 경매장을 만든 것은 물건을 모아둔 창고가 여러 차례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도난이요? 사패천이요?”
“생각보다 많이 당했을걸?”
알게 모르게 작은 것들을 제외하고 큰 건만 생각해도 이미 한 손으로 세기가 어려웠다.
그중 대부분은 진백천도 잘 아는 백면신투(百面神偸)의 솜씨였다.
“그렇다 보니 아예 땅속으로 들어가게 된 거야. 물건 관리가 어렵다고 해도 누가 훔쳐가는 것은 막을 수 있으니까.”
진백천의 일행이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인 경매장 입구 앞에 서자 경매장 직원이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살폈다.
“크흠. 호패.”
남자는 짧게 명령투로 말했다.
그 태도에 황대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품속에서 호패를 꺼내려 들었지만 진백천이 막아섰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모습을 오해한 당소예가 화들짝 놀라며 진백천에게 다가갔다.
“회주님! 버릇없다고 막 후드려 패시면 안 돼요!”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자 경매장 직원이 움찔하면서 물러섰다.
그 또한 진백천이 누군지 잘 알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한 것은 정말 호패가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호패라니까.”
“아니, 아저씨. 호패 준다니까요. 왜 자꾸 재촉해요.”
당소예가 정말로 호패를 꺼내려 들자 진백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은자 주머니를 건넸다.
세 사람의 몫으로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호패. 여기.”
은자 주머니를 받은 남자는 무게만으로 그 양을 대충 짐작하며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크흠. 역시 호탕하십니다! 호패 확인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금방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인상을 쓰던 남자는 험악한 얼굴을 활짝 피며 허리를 숙였다.
확실히 경매장 직원이라 그런지 돈이 최고였다.
“어어……? 호패……? 은자……?”
진백천은 어벙하게 눈을 껌뻑이는 당소예와 황대원을 끌고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사패천에서 호패는 곧 은자를 말해.”
“에이. 그러면 애초부터 돈 달라고 하면 되지. 쓸데없이 말을 돌리기는!”
“이곳에는 범죄자들이 많아서 호패를 가진 이들이 많지 않아서 그래.”
매끄럽게 깔린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자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그 안쪽에서 간헐적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 옆의 벽면에 검은색의 반가면이 주르륵 걸려 있었는데 황대원과 당소예가 가면을 쓰려고 하자 진백천이 그들을 막았다.
“……설마 이것도 호패같이 은어 같은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진백천은 손을 뻗어 가면의 안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자 손가락에 묻어나온 것은 하얀색 가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