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82화
63장 사패천으로(5)
당소예와 황대원이 눈을 뜬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진백천은 그들이 일어날 때까지 단 한숨도 자지 않고 그들을 지켰다.
최대한 기막을 유지하며 바깥의 사소한 소리 한 점까지 들리지 않게 막았다.
“하아암!”
둘은 무척이나 개운한지 기지개를 켜며 환하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환단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몸에 있던 불순물들이 전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둘이 입고 있던 옷은 검게 물든 상태였다.
“으응? 옷이 왜 이러지?”
진백천이 기막으로 차단하고 있던 공간을 풀자 갇혀 있던 냄새가 훅- 하고 피어올랐다.
“아악! 이, 이게 무슨 냄새야!”
“허억! 서, 설마 독? 당 소저 건드리지 마십시오!”
둘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진백천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은 무슨. 니들 몸에서 나온 불순물이거든?”
“불순물이요? 그렇다면 설마…… 저 환골탈태(換骨奪胎)한 거예요?!”
그 말에 놀라는 것은 황대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진백천이 두 번이나 환골탈태를 하는 것을 봐왔던 그들이었기에 더욱 기대감이 커졌다.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던 당소예가 눈을 빛내며 자신의 피부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면 피부가 훨씬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골탈태는 아니었다.
강력한 진기가 몸을 순환하며 불순물을 밖으로 배출했을 뿐이지, 무공에 효과적인 근골로 재배치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진백천은 그 사실을 굳이 말해주지는 않았다.
“후우. 이제 피곤하니까 둘 다 나가봐. 나는 한숨 자야겠으니까.”
둘은 대환단을 먹은 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회주님. 저희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죄송해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깨어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진백천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예는 서둘러 나가며 마차 문을 힘껏 닫았다.
콰직!
그러자 놀랍게도 두꺼운 문짝의 손잡이 박살이 나며 덜렁거렸다.
급격히 강해진 내력으로 인해 힘 조절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어. 이, 이게 왜 이러지?”
당소예는 어색하게 문을 다시 끼워 넣으려 했지만 조금씩 더 금이 커질 뿐이었다.
“당 소저 제가 할 테니까 잠깐 나와 주시겠습니까?”
황대원은 조심스럽게 문짝을 고정했다.
진백천은 그제야 쓰러지듯 자리에 누우며 한숨 놓았다.
뻐근한 눈두덩이를 쓰다듬는 그의 얼굴은 피곤함과 함께 뿌듯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다행히 둘 다 문제없이 대환단을 흡수할 수 있었어. 앞으로는 둘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리고 이득을 본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기막을 유지하고 진기도인을 도와주면서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 더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실제 눈으로 보는 시야는 아니었고, 두 눈을 감았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처음 상단전을 열었을 때와 비슷해.’
집중한 상대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얼핏 마차 밖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 막 밖으로 나간 황대원은 길어둔 물로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뛰어난 직감력과는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니까.’
상단전의 무공인 십이용천공(十二龍天功)의 호무살을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장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듣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이제는 보는 것이라 이거지.’
진백천은 두 눈을 감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제법 피로함이 심했는지 곧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게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마차는 어느새 구룡성(九龍姓) 바로 앞이었다.
* * *
“미쳤군.”
사자혁은 눈 옆으로 길게 찢어진 흉터를 쓸어내리며 인상을 썼다.
그를 잘 아는 자라면 그것이 곧 그의 짜증이 극도로 차올랐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무사들을 이끌고 구룡성 앞에 모여 있다?”
“……그렇습니다.”
“그 수가 100여 명에 이르고?”
“……맞습니다.”
“그만한 무사가 움직이는데도 군은 뒷짐 지고 지켜보기만 한다?”
“…….”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쯤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이것뿐만이라면 대충 표기장군(驃騎將軍)이라는 진백천의 또 다른 직책을 생각하며 넘어갔을 터였다.
문제는 그들이 사패천으로 오는 것을 공공연히 숨기지 않았고, 그것은 자연스레 강호의 이목을 끌었다.
<정도회와 사패천이 만났다! 분명 커다란 사건이 터질 게 분명하다!>
가는 곳마다 사건을 만들어왔던 진백천이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그런 그가 괜히 사패천을 방문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진백천이 사패천의 기를 눌러주기 위해 방문했다고도 하며 친교를 위한 것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사자혁으로써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사령령. 어떻게 생각하냐?”
“좋은 거 아닙니까! 저번에는 졌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이겨 보이겠습니다!”
“쯧.”
아무리 자신의 동생이지만 제대로 사태파악조차 못 하는 모습에 한숨마저 나왔다.
“다른 이들은?”
10신위들은 각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차피 유소어를 제외하면 사령령이나 다들 비슷한 수준의 머리였다.
무공이라면 자신 있어도 머리를 굴리는 것은 전부 젬병이었다.
“흐음. 애초에 초대한 것은 회주뿐이니 그자만 구룡성에 발을 들어놓게 하는 건 어떻소이까?”
4신위 홍염도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핏 듣기에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패천은 끊임없는 무(武)의 단련을 위해 생겨난 곳.
투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각오한 자들이라면 1층에서부터 올라와야 했다.
하지만 사패천주의 초대를 받은 진백천은 아니었다.
“그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안전이란 말이 우리 사패천에 어울리는 말이던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몰려든 정도회의 무사들을 내버려 두고 진백천만 들일시 분명 까내리는 자들이 생겨날 게 분명했다.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겠지. 나, 사자혁이 말이야.’
그의 불편한 속내만큼 눈가가 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100여 명에 가까운 무사들을 전부 구룡성에 들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대한 것은 진백천 혼자이거늘 다른 이들이 끼어드는 것은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사자혁은 왜 이렇게 상황이 꼬였는지를 생각했다.
“하아. 유소어.”
“네. 천주님.”
“유소어.”
“네. 천주…….”
“유소어.”
유소어는 사자혁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되뇌인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사단이 전부 유소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6신위인 사령령도 함께 갔는데 만만한 게 나지?!’
그의 속마음에 답하듯 사패천의 손가락이 끝이 바닥을 천천히 긁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단단한 흑목이 그대로 갈리며 톱밥이 생겨났다.
사자혁은 뜨끔한 유소어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게 진백천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지기 전에 데려왔으면 됐잖아?”
“……그게…… 6신위가 괜히 대련을 하자고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유소어 내 탓하지 마라! 무인은 무기와 눈빛으로 말하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얻어터지셨습니까?”
“뭐?”
사령령이 허리춤의 채찍을 움켜쥐며 유소어를 노려봤다.
평소였으면 이대로 입을 다물고 물러났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억울한 게 많았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6신위는 싸우자고 덤벼대고 저는 겨우 이야기를 풀어가고. 진백천 그자가 보통 대가 셉니까? 정도회의 회주이자 차기 부마가 될지도 모르는 황실의 표기장군입니다! 천하의 6신위도 진백천 앞에서 까분다고 아주 그냥 복날에 개처럼 두들겨 맞는데…….”
“……그렇게까지는 맞지 않았다!”
“더 심하게 맞을 뻔했는데 제가 겨우 말려서 그 정도로 끝난 겁니다!”
사령령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다들 너무하시네. 그런 악화된 관계 속에서도 제가 어찌어찌 설득해서 구룡성 앞까지 제 발로 오게 만든 겁니다! 반대로 따지면 정도회의 늙은 장로들이 천주님께 와서 찾아오게 만든 것과 똑같은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칭찬은 못할망정……!”
유소어는 열변에 다른 신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전부 맞는 말이었다.
“6신위의 말대로 진백천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패천을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요.”
“10신위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
다소 힘이 풀린 사자혁의 물음에 유소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 질문에 대한 것은 그들이 왔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해두었다.
사자혁이 제일 좋아할 만한 답변으로 말이다.
“크흠. 저희는 그자에게 받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받아? 뭘?”
사자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신위들도 애초에 진백천을 왜 이곳에 부르려 했던 건지 까먹은 눈치였다.
“……흑백신의와 계약한 백년단약…… 말입니다.”
“아아. 그런 사소한 일이 있긴 있었지. 계속해.”
“……크흠. 그러니까…….”
유소어는 머리에 무공만 가득한 이들과 대화하려다 보니 말문이 턱턱 막혔다.
사자혁은 본능적인 직관력이 굉장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싸움이 걸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싸움을 선택했다.
괜히 그의 별호가 무공에 미친 자, 무광(武狂)이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희가 정식으로 진백천과 정도회의 무사들을 초대해서 화합의 장을 열어보는 것 어떻습니까?”
“화합의 장?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말이 화합의 장이고 실제로는 무인들끼리 친선대련을 하는 겁니다. 저희 사패천식으로 말입니다.”
“사패천식이라.”
친선대련이라는 말에 신위들이 전부 눈을 반짝였다.
고리타분한 대화라고 생각하던 자들도 유소어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강자와의 대련은 구룡성의 모든 이들이 꿈속에도 바라던 것이었다.
구룡성 최상위층에 멈춰선 신위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저쪽이 100명이니 각자 10명씩 뽑아서 대련하면 적당할 겁니다.”
“10명이라. 그렇다면 이쪽은 10신위인가?”
“제가 회주를 상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금부(金斧)의 손자를 맞겠네!”
신위들은 누가 먼저 말하기 전에 마음에 드는 자들을 찜하려 했지만 사자혁의 눈빛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흐음.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신위들은 너무 서두르지 마라.”
하지만 분명히 유소어의 제안은 꽤나 흥미로웠다.
사자혁은 유소어의 예상대로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되었다.
“재밌겠어. 역시 학사답게 두뇌 회전이 빨라. 1급 갑등급까지의 무공 서적을 읽어보는데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로 유소어 네가 직접 가서 그들을 모셔와라. 잘할 수 있겠지?”
당연히 거절하고 싶지만 유소어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갑등급의 무공 서적은 그가 허락된 1급 을등급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 쌓여 있었으니까.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소어는 얼른 대답했다.
“10신위 유소어! 천주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6신위와 함께…….”
“저 혼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 걱정이시면 4신위 홍혈도 님과 가겠습니다!”
적절한 거절과 대안의 제안까지.
유소어는 스스로의 재빠른 대답에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사자혁도 그런 대안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홍혈도와 함께 갔다 와.”
“네. 천주님!”
-유소어 너 일부로 그랬지?
뒤통수가 사령령의 살기로 따끔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직책이 낮은 게 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