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81화
63장 사패천으로(4)
마차에 탄 진백천은 왠지 모르게 속이 후련했다.
이건 결코 어제 여기 있던 이들을 두들겨 패서도 아니고, 그 영향으로 아무도 자신에게 대꾸를 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단지.
“카아. 그렇지 이 맛이었지.”
눈앞에 잔뜩 놓인 술병과 안줏거리의 힘이었다.
“춘식이가 참으로 요리를 잘해.”
“맞아요. 이 고기 야들야들한 것 보세요. 무려 3시간 동안 양념에 절여놨던 거래요.”
“그래?”
당소예의 말대로 고기는 몇 번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으며 사라졌다.
단 세 명만 강호를 돌아다닐 때는 마차 안에서 이렇게 음식을 차려 먹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주변을 걱정할 이유도 없고, 마차는 알아서 잘만 갔으니 이제 남은 짧은 일정을 힘껏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정도회에 들어가면 또 빡업시작이니까 이 정도는 사치도 아니지.”
“빡업?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빡센 업무.”
“아하.”
진백천은 당소예의 잔에 백건아(白乾兒)를 따르고 자신도 벌컥 들이켰다.
백주 특유의 독하면서 깔끔함이 목구멍에 남아 있던 오리고기의 기름기를 싹 지워냈다.
“아참. 소예야. 동생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니까 걱정 마.”
당소예는 술을 들이켜려다 멈칫했다.
언젠가 진백천이 고향에 있는 동생들을 정도회로 불러오라고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녀가 정도회에서 버는 돈 대부분을 고향으로 보내 동생들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진백천이 신경 써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놀래? 혹시나 해서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대답해 주더라고.”
그 애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무려 강량호와 전등신이었다.
각각 수라검대와 복건추료대 대주인 그들은 그 질문을 받자마자 경쟁하듯 대원들에게 물어서 알아왔다.
“동생들이 소예 너를 닮아서 그런지 똑똑하다고 소문났대.”
당소예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진백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감사해서요. 너무 감사한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옆에서 고생해 주는 게 더 고맙지. 그런 의미로 정도회 들어가면 바빠져도 괜찮지?”
“물론이죠! 뭐든 시켜만 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희희낙락한 분위기도 잠시.
항상 옆에 같이 있던 황대원이 없어서 그럴까?
진백천은 넓은 마차에 둘만 앉아 있으니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황대원도 부를까?”
“네. 몸도 안 좋으니까 제가 들어오라고 하는데 절대 안 들어오더라고요. 회주님을 지키는 오. 른. 팔.은 마차 옆이어야 한다고요.”
당소예는 오른팔을 말할 때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마차의 바로 옆에 있는 황대원이 꼭 듣게끔하기 위해서였다.
진백천과의 대련 중에 그가 직접 오른팔이라 언급한 것이 그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충성심 빼고는 시체였던 황대원은 이제 더더욱 진백천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치 살아 있는 금강동인(金鋼動人)이랄까? 생각해 보니 근육질 몸매도 비슷하고.’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은근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황대원. 잠시 들어와.”
“괜찮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천군지사대 대원들과 함께 호위업무를…….”
“쓰읍. 들어오라면 들어와.”
명령불복종이냐는 한마디에 황대원은 쏜살같이 마차에 들어왔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왠지 보기 안쓰러웠다.
“일단 먹어.”
“…….”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괜한 말대꾸 없이 음식을 먹었다.
“어차피 이렇게 뭉쳐 다닐 일도 얼마 남지 않았어.”
“맞아요. 나중에 이 순간이 그리울 거예요.”
“그건 그렇고 둘은 억울하지 않아?”
“억울이요? 뭐가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황대원과 당소예는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정도회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영약도 먹고 우리보다 편하게 지냈잖아. 아마 우리가 돌아갈 때쯤이면 전과 많이 달라져 있을걸?”
진백천의 말에 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회주님과 함께한 순간이 더 큰 경험이고 무인으로써의 거름이었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선택하라고 해도 함께하는 이 순간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도요. 가끔 힘들기는 했어도 재밌었잖아요.”
“그게 가끔이었나?”
화산파의 첩첩산중 절벽을 오르고, 흑백신의(黑白神醫), 벽력마검(霹靂劒魔)을 비롯해 적조녀의 강시를 비롯한 놈들과의 목숨을 건 전투.
당가를 피해 도망치기도 하고 진주언가에서 하북팽가의 도왕과 일초지적을 겨루는 등 생각해 보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별의별 일이 다 있었네.”
진백천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작은 목갑상자를 꺼냈다.
소림사에서 금혈화린어(金血火鱗魚)의 내단과 함께 받았던 대환단(大還丹) 5알이었다.
진백천이 이러한 것들을 받았다는 사실은 원진 장문인과 장로들, 진백천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한마디로 내 거라는 말이지.’
원래대로라면 혼자 날름 집어삼키고 싶었지만 현재 진백천의 상태로는 대환단을 감히 먹을 수 없었다.
세맥에 잠들어 있는 천마신공의 마기, 독정의 기운을 태허무극진결로 녹여내는 지금에도 그의 내공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설수련의 한기를 녹여낼 때만 해도 3갑자 겨우 넘었던 내공은 이제 그 수위를 훌쩍 넘어섰다.
‘이 상태에서 대환단까지 먹게 되면 태반은 흡수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릴 거야. 욕심을 부린다면 구렁이를 집어삼킨 두꺼비처럼 터져 죽겠지.’
그렇기에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자신을 따라 고생한 황대원과 당소예를 챙기는 것이었다.
정도회에 가면 약왕당주가 만든 단약을 먹겠지만, 그전에 확실한 보상을 주고 싶었다.
“회, 회주님 설마 이거?”
“맞아. 대환단이야. 이 사실은 둘만 알고 있어.”
황지(黃紙)로 싸인 붉은 단약은 목갑을 열자마자 알싸름한 향을 피어났다.
진백천은 냄새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차 안에 기막을 펼쳤다.
“둘에게 대환단을 한 알씩 줄 거야. 잘만 흡수한다면 1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얻을 수도 있겠지.”
“……저보다는 회주님께서…….”
“나는 이미 차고 넘쳐서 먹어도 효과가 없어.”
진백천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미 결정한 이상 무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와 함께 걸어가고 싶다며? 그러려면 지금으로는 부족해. 앞으로는 더 거친 가시밭길이 될 테니까.”
물론 그전에 쏙하고 빠져나올 생각이었지만 그런 속마음은 감췄다.
다행히 표정 연기가 괜찮았는지 황대원은 더 거절을 하지 못했다.
다만 당소예는 아직도 자신이 대환단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제가 무시녀이긴 해도 직접 전투하는 일은 없잖아요. 그렇다고 많은 내력이 필요한 최상승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런 그녀의 의견을 반박한 것은 진백천이 아니었다.
옆에서 듣던 황대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 소저. 그건 절대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그동안 당 소저가 보여준 모습은 어떤 정도회의 무인이 와도 하지 못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보면서 반성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괜히 대환단을 날리는 게 아닐까 걱정돼요.”
“그게 걱정되면 무공을 열심히 익히면 되잖아. 환력신공이라도 알려줄까?”
장난기 섞인 진백천의 물음에 당소예가 입을 삐죽였다.
“……우락부락해지기 싫거든요.”
“그게 싫으면 적당한 단검술이라도 알려줄게.”
“……그럼…… 그건 열심히 해볼게요.”
진백천은 긍정적인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각각 대환단을 한 알씩 둘에게 건넸다.
“호법은 내가 서줄 테니까. 최대한 몸 안에 담아두려고 노력해. 지금 당장 다 흡수하지 못해도 좋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둘은 긴장된 얼굴로 누런 종이를 벗겨낸 대환단을 입에 넣었다.
흔히 영약에 대한 세간의 설명으로 좋은 단약은 하나같이 입속에 넣자마자 물처럼 녹아내려 몸으로 흡수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으음!”
둘은 입속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드는 대환단에 깜짝 놀라며 서둘러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진백천은 양손을 각각 당소예와 황대원에게 올리고 외부에서 기운을 다스려주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격체전력(隔體傳力)을 하면서 내력의 운용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익숙해진 진백천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겨우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기껏 해봤자 60년의 내공이야. 내가 조절 못 할 리 없지.’
진백천은 둘의 혈도를 거침없이 흐르는 내력에 고삐를 채우며 최대한 날뛰지 못하게 제어했다.
3갑자를 넘는 태허무극진결의 내력은 단순히 흘러드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기운을 태우고 몸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으음!”
드드득-
첫 변화는 상대적으로 내력이 적었던 당소예부터 시작되었다.
막혀 있던 혈도가 노도와 같은 대환단의 내력에 뚫리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통증 섞인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조금만 참아.
진백천의 대환단의 기운을 정확히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만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느리지만 소주천이 완성되고 대주천까지 끝마치자 그가 관여하지 않아도 스스로 내력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녀에 비하면 황대원은 조금 더 어려웠다.
-무리해서 흡수하지 마.
황대원은 자신의 단전 크기에 비해 많은 대환단의 기운을 흡수하려 노력했다.
내력이 부족해 아쉬움을 느끼던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단전에서 느껴지는 과부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내력을 밀어 넣었다.
드득-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그 틈조차 미세한 기경팔맥(奇經八脈)에 강줄기가 범람했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을 두고 조금씩 벌려 나가야 할 길이었다.
그 대가로 받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내력의 역류였다.
뚫지 못하면 그만큼 내력을 뒤돌아 역행했고,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드드드득-
이번에도 역류하는 내력을 겨우 붙잡으며 진백천이 한숨을 내뱉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황대원이 고집을 부리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강해지고 싶었던 건가?’
황충의 손자로서 황대원은 그 나이대에 비해 충분히 훌륭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일반적인 수준에서 비교할 때나 그랬다.
진백천이 앞으로 상대할 마인이나 적들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경팔맥을 넘어 임맥(任脈) 독맥(督脈)마저 뚫으려는 황대원의 마음은 그래서였다.
‘쯧. 이런 각오라면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잖아.’
-버텨.
진백천이 말하면 황대원은 행했다.
다행히도 버티는 것은 황대원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황대원의 내력, 대환단의 기운, 그리고 진백천의 것까지 합쳐진 거대한 강줄기가 혈도를 뚫으며 나아갔다.
‘지금 당장 대로를 만들 수는 없어. 대신 자그만 길이라도 뚫어놓는 거라면……!’
내력의 강줄기가 연달아 벽을 깨부수며 나아갔다.
마침내 멈춰 선 것은 독맥의 계문혈(械門穴)과 풍부혈(風府穴)이었다.
각기 경추와 얼굴에 위치한 혈도였기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우우우우웅-
‘더는 위험하다. 여기까지야.’
진백천의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황대원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올렸다.
쿠우우우웅!
기운의 폭발에 황대원의 몸이 크게 떨리며 코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 달리 막혔던 혈에 미세하게 구멍이 생겨났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야.’
불완전하지만 독맥을 뚫었다.
이 한번을 평생 성공하지 못하거나 도전하다 죽어간 무인들이 수두룩했다.
앞으로 꾸준히 내력을 단련한다면 황대원도 언젠가는 완벽히 독맥을 뚫을 날이 올 터였다.
피로 범벅이 된 황대원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후우. 둘 다 수고했어.”
물론 무아지경으로 운기조식에 빠져 있기에 대답은 없었다.
마차 안은 한참이나 세 사람이 내쉬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