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78화
63장 사패천으로(1)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노란빛의 둥근 내단이었다.
진백천은 보자마자 한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거 설마?”
“맞다. 금혈화린어 내단이다. 아무래도 자네에게 주는 게 맞을 듯싶어서.”
그 말을 하면서도 원진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환단과 달리 영물의 내단은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기운을 잃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꺼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금혈화린어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던 거대한 놈이었다.
금혈화린어의 크기에 비하면 영단이 작았지만 그렇다고 느껴지는 기운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이거라면 어떻게 섭취하느냐가 더 문제겠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내단은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집어삼키면 그대로 목구멍과 위장이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크흠. 회주도 잘 알겠지만 이대로 섭취는 힘들고 극음의 영단과 함께 조제해 먹으면 그 효과가 더 좋을 거야. 혹시라도…….”
“정도회의 약왕당주가 좋아하겠네요.”
진백천은 뒤이은 원진의 말을 끊으며 화강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특수 방열처리를 한 상자였지만 표면이 뜨끈뜨끈했다.
‘휴대용 손난로가 따로 없네.’
품속에 넣고 있자 가슴팍이 후끈해졌다.
“크흠. 그래. 뭐. 나한들의 말로는 회주가 놈을 잡는데…… 크흠. 힘을 썼다고 하니…….”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진백천의 품속을 힐끔거리는 게 아쉽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진백천이 다시 내놓을 리도 없었다.
진백천은 그 후로 빠르게 다시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의외로 올 때 함께 했던 위향아와 이소한은 이곳에 조금 더 머문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소림의 풀 식사와 생활방식이 둘에게는 잘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부쩍 친해져 보이기도 하고.’
슬쩍 팔을 맞대고 있는 것을 보니 둘 사이가 꽤나 진전되었음을 알려줬다.
이소한은 아까부터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잘 어울리네.”
“흐흐. 감사합니다. 회주.”
그들을 남겨두고 진백천은 황대원과 당소예만을 데리고 산문을 벗어났다.
원진을 비롯한 장로들의 배웅은 정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옆에 수행하듯 따르는 것은 4대금강 중 하나인 언규와 나한들이었다.
“우리끼리 내려가도 된다니까.”
“아닙니다. 아래까지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들은 전부 금지에서 진백천의 실력을 봤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진백천을 대하는 게 깍듯했다.
아무 말 없이 내려가던 언규는 소실봉 중턱에 있는 참불당(讒佛堂)이 가까워지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번 무림대회에 회주님도 참가하십니까?”
“나? 글쎄. 회주인 내가 참가하면 조금 보기 그렇지 않을까?”
“그렇습니까?”
언규는 어딘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진백천은 그 얼굴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았다.
‘호승심인가?’
무인이 강한 자와 겨뤄보고 싶은 호승심은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강한 이들은 전부 호승심이 강했다.
‘종남의 광소산부터 화산의 검군(劍君) 유일환, 무당의 무당팔검(武當八劍), 개방의 적의단(赤衣團) 정도일까?’
순간 당천기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지만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뺀질거리는 그 얼굴은 아니었다.
‘회귀 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쓰읍.’
그밖에도 몇몇 얼굴이 떠올랐지만 눈앞의 언규라면 그들과 충분히 겨뤄볼 만한 했다.
“이번 무림대회에는 꽤나 재밌는 자들이 많이 나올 거야. 강자도 있을 테고. 서로 발전하는 커다란 의미가 있겠지.”
“……그렇습니까?”
아쉬움이 섞인 언규의 눈빛에서 진백천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떠나기 전 자신과 대련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또한 소림에서 가장 큰 기대를 받고 강자라는 호칭에 어울렸던 만큼, 진백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 회주를 만나고 나서 천외천의 경지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언규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딱히 가르침을 준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숙일 줄 아는 겸손한 모습이었다.
‘역시 소림답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시간이 되면 대련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
“감사합니다.”
언규는 그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진백천은 왠지 맨들맨들한 뒤통수를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지만 꾹 참아냈다.
“벌써 참불당이네. 이제 우리끼리 내려가 볼 테니까. 어서 올라가 봐.”
만남만큼 이별의 순간도 담백했다.
그들은 가볍게 합장을 하고서는 뒤돌아 산을 올랐다.
진백천은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하암. 피곤하다. 그렇지?”
“……네. 배고파요.”
“밥 안 먹었어?”
문득 쳐다본 당소예는 볼이 홀쭉했다.
며칠 안 되는 사이 간식거리도 끊고 황대원과 대련만 하더니 쪘던 살이 쏙 빠졌다.
“……너무 뺀 거 아니야?”
“뺀 게 아니라 빠진 거예요. 토끼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종일 풀풀풀! 배는 부른데 몸이 축축 쳐지는 그 느낌 아시죠?!”
진백천이야 허기가 질 때마다 당소예가 챙겨준 육포와 군것질거리를 먹었기 때문에 딱히 그런 것을 몰랐다.
아무래도 그에게 줬던 것들이 전부였던 모양이었다.
“하하. 곧 내려가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네! 황 무사님이 그렇게 말한다니 참을게요.”
펄쩍 뛰던 당소예가 황대원의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그 모습에 왠지 으스스스하고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고개를 틀며 아래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참불당(讒佛堂)은 여전히 속가제자들로 북적였다.
그곳을 관리하는 원상 장로는 여전히 부처님 같은 미소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본산에서 그렇게 난리가 났는데 아래쪽에서는 조용하네요.”
“다행인 거지.”
내려오는 진백천을 발견한 원상은 얼굴에 화색을 돋우며 다가왔다.
“회주! 소림에서의 일은 잘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하하. 그게 전부 부처님의 미소가 함께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크흠!”
누가 원진 장로의 사형제 아니랄까 봐 은근히 말하면서 복전함을 쳐다봤다.
하지만 처음 방문할 때와 달리 금자를 꺼내는 진백천의 손길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이미 품속에 있는 금혈화린어의 내단과 대환단 5알만으로도 본전은 차고도 넘쳤다.
짜릉-
몇 개의 금자를 복전함으로 밀어 넣자 원상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회주의 여정에 부처님의 불법이 함께할 겁니다.”
미소가 불법으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진백천은 마주 합장하며 참불당을 내려갔다.
“또 오십시오! 언제든 소림은 열려 있습니다!”
“……참 장사수단이 좋으신…… 뭐라 해야 하지? 아무튼 좋은 분이시네요.”
숭산의 굽이친 산맥을 건너편 산의 출구로 다와갈 무렵.
진백천은 저 밑에서 수많은 인파를 느끼며 잠시 멈춰섰다.
원래부터 상당히 많은 이들이 찾는 소림이었지만 대부분 속가제자들이었다.
‘평범한 속가제자들의 기운이 아니야. 누구지?’
그러고 보니 산 주변에는 비둘기 한 마리 떠오르지 않았다.
전서구를 보낼 자들조차 전부 자리를 비운 것이다.
‘평범한 세력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한 기세를 느낀 것은 진백천뿐만이 아니었다.
당소예와 황대원도 뒤늦게 그런 것을 알아차리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회주님. 다른 길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야. 정신 나간 마교놈들이라고 해도 감히 숭산 입구에서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을 거야. 우선은 어떤 놈들인지부터 확인해야지.”
진백천은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올리며 산 아래로 향했다.
그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한 듯 전부 자리에 서서 움직임이 없었다.
마침내 서로 얼굴을 확인할 정도가 되자 진백천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응?”
“회주님이시다아아!”
“와아아아아아!”
단체로 모여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도회의 무인들이었다.
* * *
흑룡강성(黑龍江省) 시내.
요녕과 길림을 지나 동북에 위치한 험한 산지.
지형이 그래서 그럴까.
이곳의 주민들은 유독 중원인들보다 더 날카롭고 험악했다.
한 뼘쯤 더 우뚝 솟은 키는 물론이고 두꺼운 옷만큼이나 체구도 컸다.
그곳에서 장모사, 아니 마뇌는 마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흑룡강성 안으로 향했다.
장모사일 때 입던 경장 차림은 벗어던지고 하늘하늘한 옷에 얼굴은 면사포로 가린 상태였다.
“이쪽입니다. 마뇌님.”
그들을 안내하는 것은 흑룡강의 관리였다.
놀랍게도 이곳은 이미 마교의 분타 역할을 할 정도로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후였다.
그도 그럴 게 마뇌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곳답게 중원과 황실에 연이 없었고, 특유의 충성심도 뛰어났다.
‘부족민 정도밖에 안 되는 이들을 모아서 만드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었지.’
굳게 세워진 몇 개의 기둥을 지나자 눈앞에 거대한 황금의 문이 나타났다.
실제 황금은 아니었고, 청동으로 만든 문에 도금을 칠한 것이었다.
마뇌가 문 앞에 서자 기다리고 있던 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크하하하! 마뇌님. 오래간만입니다! 벌써 얼굴을 본 지 10년이나 되었지요?”
마뇌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로 거구의 남자였다.
남자는 그 자체로 황금이라도 봐도 될 정도로 치장한 모습이었다.
“무겁지 않아요?”
“이것들 말입니까? 무겁긴! 오히려 힘이 솟습니다! 하하하! 이것들로 가족들의 배를 불리고 무인들을 양성하고 성도 지으니! 이것이야말로 곧 내 힘이자 행복 아니겠습니까?!”
말뿐이 아닌지 남자는 두꺼운 손으로 몸에 걸린 황금을 쓰다듬었다.
남자의 이름은 금노산(金老山).
흑룡강의 성주이자 이곳을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황금마전(黃金魔殿)의 오래된 주인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뭔가요?”
“아아. 이것 말입니까.”
금노산은 눈앞에 놓인 거대한 문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욕망과 소유욕이 뻗쳐 나왔다.
가지고 있음에도 계속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은 과연 황금마전의 주인다웠다.
“마뇌님이 맞이하는 마음으로 새로 꾸며봤습니다. 황금마전의 새로운 정문으로 말입니다. 어떠십니까?”
“쓸데없이 화려하네요.”
기대한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조촐한 감상평이었다.
하지만 금노산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었다면 맨손으로 찢어버렸겠지만, 황금마전의 실질적 주인인 마뇌에게 감히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 칭찬을 하고 멋있다고 하는 자는 더 잔인하게 죽였다.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탐낼 것 같은 자는 살려두지 않으니까.’
“역시 마뇌님은 소탈하십니다. 하하하! 그럼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금노산은 직접 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3장(9m)에 가까운 문은 그 청동의 두께만으로도 일반적으로 열고 닫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금노산은 문 앞에 서서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드드드드드득-
놀랍게도 수백 근은 족히 나갈 문이 바닥에 쓸리며 천천히 열렸다.
마침내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가 되자 금노산이 뒤로 물러났다.
“마뇌님. 먼저 지나가시죠.”
마뇌는 그러한 대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길을 지나갔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전각과 그 흔해 빠진 바닥 또한 전부 황금의 향연이었다.
이곳의 금을 때다가 팔아도 몇 대가 떵떵거리며 살 정도였다.
금노산은 그런 마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뇌의 뒤를 따라가며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문은 지금 당장 녹여서 새로 만들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번 통과할 때마다 새로 만드는 괴이한 습관은 그의 극악스러운 소유욕을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뇌는 익숙하게 길을 나아가 정중앙에 있는 2층 높이의 황금의 권좌에 올랐다.
그 위에 깔린 것조차 황금의 실로 만든 비단이었다.
그곳에 앉자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금노산. 먼저 보고부터 듣죠.”
“네. 마뇌님.”
이미 마뇌가 온다는 이야기에 준비를 해놨는지 금노산의 수하들이 수십 권의 책자를 그녀의 앞에 내려놨다.
불과 1년간의 황금마전의 거래 내역이었다.
마뇌는 빠르게 책자를 훑었다.
단순히 넘기는 듯했지만 이미 그 내용은 전부 그녀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때였다.
마뇌는 마지막 책자를 넘기다 덜컥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금노산에게로 향했다.
무심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싸늘한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