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77화
62장 그가 남긴 것들
지객당에 들어선 진백천은 제법 놀랐다.
첫 번째로는 황대원이 환력신공을 배운지 얼마 안 되었는데 마인을 상대로 능숙하게 운용해서였고, 두 번째로는 당소예의 전투 보조 때문이었다.
‘둘이 나 없는 동안 대련을 하러니 손발이 제법이잖아.’
혼자 싸우는 것과 둘이 싸우는 것.
보통은 둘이 싸우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였다.
손이 맞지 않으면 오히려 서로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황대원이 앞에 나서고 옆에 선 당소예의 보조는 무척이나 절묘했다.
‘마인들의 흐름을 끊어내 주니까.’
진백천은 자신의 발전도 좋지만 둘의 나아진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했다.
필사적으로 싸우는 황대원의 모습이 아슬아슬했지만 곧바로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깨달음과 경험을 얻을 수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회주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자는 평범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뒤편에서 나한들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진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들의 말대로 마지막 한 수는 제법 날카로웠다.
황대원의 전신에 상처가 생겨날 때는 순간 나설까 고민했지만 이내 멈춰섰다.
그리고 진백천의 믿음대로 황대원은 그자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대단하군.”
지켜보던 나한들마저 혀를 나뒹굴 만한 거친 싸움이었다.
진백천은 또 다른 마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남은 마인들은 그저 지원하는 자들인지 그다지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진백천은 그들을 전부 처치하고 황대원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
“……다른 쪽도 끝났습니까?”
진백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황대원도 안심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백천은 황대원과 당소예를 부축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그를 부축해 주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상처는?”
“저는 없는데 황 무사님이 심해요.”
“내가 살펴볼게.”
지켜볼 때 이미 알았지만 딱히 근골이 상하는 부상은 없었다.
그것은 당소예도 마찬가지였다.
진백천은 요상단을 꺼내 둘에게 직접 먹이고 나한들에게 호법을 맡겼다.
“나는 원진 장로에게 갔다 올 테니까 쉬고 있어.”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운기조식을 취했다.
진백천은 곧바로 가주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의 피해는 아주 미미했다.
참회동에서 진백천이 운조와 마인들을 붙잡아두었기 때문에 마인들 얼마가 전부였다.
그들은 미리 대비하고 있던 원진과 나한들에게 금세 처리되었다.
‘오히려 지객당에 마인들이 제일 많이 몰려든 건가?’
소림을 뒤집지 못하면 진백천을 죽이겠다는 운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회주! 몸은 괜찮은가?”
원진은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의 뒤로 주변을 정리 중인 언규와 나한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야 항상 피곤하죠. 상황은 어때요?”
“마인들은 처리했다. 그리고 회주가 준 명단 덕분에 간자들이 활동하기 전에 먼저 제압할 수 있었어. 고맙군.”
“공짜로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요 뭐.”
진백천의 장난 반 진담 반 섞인 말에 원진이 피식 웃었다.
“나한들에게 장문인이 입적하셨다고 들었다.”
진백천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원진은 대충 그럴 거라 생각했는지 딱히 충격받은 모습은 아니었다.
대신 정신적인 허탈감은 어쩔 수 없는지 얼굴이 퀭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선은 소림사 내의 소란스러움부터 잠재워야겠지. 그런 의미로 보면 놈들이 장로전만 노린 것이 아주 큰 다행이야. 속가제자나 다른 이들은 소란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전부 원진 장로가 한 조치들 때문이었다.
가주전과 장로전을 제외하고 간자들과 참회동을 중심으로 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망을 펼쳐 놨었다.
진백천이 마인들을 쓸어버렸지만 도망가려던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는 장문인의 사체가 수습이 되면 새로운 장문인 선출을 서둘러야겠지. 그동안 멈춰진 일이 많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간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장로들의 의견이 한데 모였어.”
“앞으로 소림은 달라지겠군요.”
“그렇겠지. 전부 회주 덕분이다.”
진백천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때 안쪽에서 원진 장로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제일 바쁜 것은 계율원의 승려들이었다.
대충 그런 모습만 봐도 앞으로 소림을 이끌 사람이 누가 될지는 짐작이 되었다.
“후우. 잠시도 숨 돌릴 틈도 없군.”
“편히 일 보세요. 저도 제 일행들하고 시간을 갖고 있을 테니까요.”
“고맙군.”
원진은 인사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백천은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장문인의 자리는 한참이나 비워져 있었지.’
그 후에 뽑힌 이가 누군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자는 소림을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어딘가 중구난방하게 의견이 흐트러졌다.
그렇기에 정도회와의 동맹은 물론 제대로 된 마교와의 전면전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진백천은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의문형이었다.
남소림과 북소림.
그 치열한 분쟁의 역사를 마무리할 증거가 장문인에게 있다고 하지만 금지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소림은 분명 정도회에 큰 힘이 되어주겠지.’
진백천은 뒤돌아서서 지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외로 며칠 되지 않아서 소림은 장문인의 입적 소식과 함께 새로운 장문인 선출을 발표했다.
그 후보는 유일하게 단 한 명뿐이었다.
물론 그 후보는 진백천도 잘 아는 원진 장로였다.
그 발표가 있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백천은 가주전으로 향했다.
그곳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은 원진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원진 장문인님?”
원진은 장문인이라는 말에 아직 어색한지 어깨를 으스스 떨었다.
“험험. 뭐. 그렇게 되었다. 나 말고 딱히 맡을 사람도 없어 보이고 말이지.”
원진 장로가 그렇게 말은 해도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번 전대미문의 사건을 정리하고 간자들을 처리한 것이 원진과 계율원이었다.
더구나 정도회의 회주인 진백천과도 어느 정도 사이가 돈독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크흠. 그나저나 소림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감히 말 한마디로 갚지 못할 만큼.”
운을 꺼내는 원진 장로의 얼굴은 긴장감이 흘렀다.
단순히 장로였을 때의 입장과 장문인이 된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소림의 대표로 하는 것이 되었으니까.
그렇기에 진백천에게 더 함부로 말을 못 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선 뭐든 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크흠. 그래서는 장로들이 가만두지 않으려 하겠지.”
원진 장로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문 하나로 막혀 있지만 그곳에는 장로들과 나한들이 앉아 있었다.
딱히 진백천을 경계하려 하다 보다는 마교의 간자로 인해 장문인이 죽음에 이르게 되다 보니 이러한 호위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 이해해요. 저도 똑같은데요.”
진백천의 뒤에는 아직 다 낫지 않은 상처로 얼굴이 울긋불긋한 황대원이 앉아 있었다.
“그래.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그것이 피차일반 편하고 말이야.”
“네. 들어볼게요.”
원진은 이미 장로들과의 회의로 결론 난 사항을 읊듯이 말했다.
“이번 본파의 있었던 마교의 잔악한 술수를 파헤치고 해결하는데 회주의 도움이 명백했음을 인정하여…… 추후 정도회의 요청이 있으면 강호의 정의(正意)와 협의(俠義)에 벗어나지 않는 한 무조건적으로 도움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원진은 말을 마치고 진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겨우 그게 다냐고 물으려는 순간 원진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진백천이 이대로 만족하면 입을 싹 닦을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장문인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잔꾀를 부리시네.’
그렇다고 딱히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전부 본파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으니까.
“……또한 이번 일의 보상과 맹우로써의 증표로 소림의 영약인…… 대…….”
원진은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지 말하다 말고 진백천을 쳐다봤다.
정말 이것까지 받아야겠냐는 표정이었다.
“왜요. 한만큼만 주시면 돼요. 한만큼만.”
“……대환단(大還丹) 5알을 주겠다.”
원진의 말에 듣고 있던 진백천마저 깜짝 놀랐다.
기껏 해봤자 대환단의 보급용인 소환단을 주거나 대환단 1개가 전부일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알려진 환단 중에 모든 문파를 통틀어 가장 효과가 대단한 것을 뽑자면 대환단을 말했다.
‘화산파의 자소단, 무당파의 태청단 등이 있지만 전부 대환단의 아류에 불과하지.’
소림의 비전이 들어간 대환단은 요상성약으로 일반인이 복용하더라도 평생 무병장수하며 무림인이 제대로 흡수하면 일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만들어지는 방법과 들어가는 정성이 극악스러울 정도라 4대 금강 정도 되는 나한이 아니면 내려주지 않았다.
‘그런 대환단을 5개를 내려준다고?’
진백천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원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회주라도 대환단 5개라고 하니 놀라는구나. 하지만 그만큼 큰일을 해줬으니 합당한 대가다.”
“흐음.”
진백천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운조 대사와 마인들을 처리하고 마교의 간자들을 축출해 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환단 5개는 너무 과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던 건가?’
그때 진백천의 시선에 원진의 등 뒤로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는 녹옥불장(綠玉佛杖)이 보였다.
“혹시 저기에 뭔가 있었습니까?”
“……눈치 빠르기는!”
원진은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해 줄 생각이었기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녹옥불장 안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그 안에 전 장문인이 적어둔 편지가 있었지.”
혼자 금지에 있으면서 작성한 것인지 편지의 내용은 꽤나 길었다.
가장 처음으로는 금강동인의 제작법과 기관진식이었다.
현재의 소림으로써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고차원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의 뒤쪽에는 남소림과 북소림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소림이 크게 혼란에 휩싸일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야.”
“흐음. 제가 들어도 되는 내용이에요?”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회귀가 계속되던 지난 생에서도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소림의 맹우인 정도회의 회주라면 가능하지.”
원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남소림과 북소림의 분단.
그리고 추후 남소림이 번창한 북소림을 찾아온 것까지는 그도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소림에 찾아와서 쫓겨났다고 알려졌지.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북소림은 그들을 용서했고 받아들이려 했지만 남소림은 그 자리에서 떠났다.
“왜요?”
“발전한 소림을 보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거지. 그들이 아는 소림은 불타 사라지고 새로운 소림이 태어난 사실을 깨달은 거지.”
남소림의 장문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허접한 신물을 스스로 부숴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강호로 뿔뿔이 흩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속가제자라 칭했다. 그리고 언제든 소림에 찾아와 공부하기를 꺼리지 않았지.”
본산은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이 사실을 외부에 밝히지 않았다.
대신, 36방을 비롯해 속가제자들을 위한 수련장소를 만들어냈다.
언제라도 그들이 자격을 얻으면 다시 본산제자가 될 수 있게끔.
“결국 북소림이니 남소림이니 전부 없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소림은 애초부터 하나였으니까.”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뿔뿔이 흩어지는 속가제자들이었다.
진백천은 그제서야 이러한 소문들 속에서도 소림이 꿋꿋이 버텨나간 이유를 알았다.
‘역사. 그리고 속가제자.’
전부 정도회가 갖지 못한 것들이었기에 조금은 부러웠다.
그 후로 진백천은 원진 장로와 가벼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정도회로 가야죠. 그 전에 사패천에도 들리려 했는데 워낙 꿍꿍이가 많은 곳이라.”
“사패천이라. 가능하면 혼자 가지 마라. 머리에 무공만 가득 찬 놈들이라 감금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원진이 거칠게 말하자 벽 너머에서 헛기침이 들려왔다.
이제 장문인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눈치였다.
“조만간 정도회에서 봬요. 소림에서 신세 많이 지고 가네요.”
진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원진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회주. 잠깐만.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군.”
“또 뭐예요?”
원진이 아깝다는 얼굴로 꺼내놓는 것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상자였다.
그런데 상자는 재질부터가 특이했다.
‘화강암? 안에 든 게 뭐길래?’
상자를 건네는 원진의 손은 아까운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뭐길래 이래요? 아까우면 주지 마시던가요.”
“……아니다. 후우. 이건 회주한테 가야 할 물건이지. 아암.”
진백천은 그제야 상자를 받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철컥-
상자가 열리며 안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건?”
웬만하면 놀라지 않는 진백천조차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