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73화
61장 잔당 제거(1)
진백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희뿌연 시야 속에서 그를 반긴 것은 반들반들한 광채였다.
한 개도 아니었고 여러 개였다.
‘……눈부시게 이게 뭐야?’
인상을 찌푸리던 진백천은 문득 자신이 금지 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정신이 확 들었다.
“회주! 괜찮으십니까?”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 속에서 광채라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언규를 포함한 나한들이었다.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은 그들이 반들반들한 대머리였다.
“눈부시니까 옆으로 비키지?”
언규는 어딘지 모르게 상처를 받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진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도도히 흐르는 태허무극진결과 곳곳에 자리 잡은 내력들.
쓰러지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태허무극진결의 내력이 조금 더 두터워졌다.
‘마지막 장문인이 뿜어냈던 그 기운 탓이겠지.’
진백천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던 금강동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반면에 용암 구덩이를 빠져나왔던 금혈화린어는 온몸이 낭자된 상태였다.
‘저 상태로 살아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래서 그런지 펄펄 끓던 용암 구덩이도 서서히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금강동인 말입니까?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장문인이 떠나기 전에 어떤 조치를 하신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한들은 마지막 순간을 정확히 떠올리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진백천이 거대해져서 금강동인들을 때려잡던 것까지가 그들의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습니다.”
진백천은 상단전을 열어 속마음을 듣고 나서야 그들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그의 시선이 허리를 숙인 채 죽어 있는 장문인의 사체로 향했다.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런데도 어딘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전해졌다.
‘이런 게 고승의 등신불(等身佛)일까?’
또 다른 말로 육신불(肉身佛)이라고도 하며 법력이 강한 승려가 입적하게 되면 시체가 썩지 않는데 그것에 금물을 부어 만드는 불상을 말했다.
장문인의 사체에서는 금지 전체를 감쌌던 황금빛 서기의 기운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보고 자신을 잃지 말라고 했던가?’
마지막 떠나는 순간 장문인이 그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불가의 표현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에게 남겨준 조언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제 회주께서 깨어났으니 슬슬 나가볼까 합니다.”
나한들은 이곳을 이대로 금지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금강동인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고, 뚫고 왔던 기관진식을 다시 가동시키면 충분히 안전했다.
“장문인의 시신은?”
“우선은 이곳에 둘 생각입니다. 저는 장문인과 많이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지만 이곳에 함께 두기를 바라실 것 같습니다.”
진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소림의 일이니 굳이 그가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나가는 것은 멈춰 세웠다.
“나가기 전에 말할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언규와 나한들은 정체를 숨겼던 진백천에게 나쁜 감정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진백천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내가 왜 이곳에 들어오려 했는지는 잘 알 거야.”
장문인을 죽이려 했던 마교의 간자때문이라는 것쯤은 그들도 알았다.
진백천은 바깥에서 들었던 마교의 계획에 대해 모두 설명했다.
그들이 금지에서 나가는 순간 마교의 간자들이 소림을 공격할 거란 말에 나한들은 격하게 분노했다.
“……운조 대사님이 마교의 간자란 말씀이십니까?”
나한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삼대제자일 때부터 보던 자였다.
친하지는 않아도 익숙한 사람이 간자라니 그 충격이 더욱 컸다.
“우리가 나가게 되면 참회동의 갇혀 있는 마인들과 함께 공격하겠지.”
“그 목표가 소림의 원로들이고 말이죠?”
“맞아. 그러니까 안 믿기더라도 나를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언규는 잠시 굳은 얼굴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는 아직 여러 의문이 있었지만, 그것을 전부 젖혀두고 믿어보기로 했다.
만약 진백천이 악한 자였다면 장문인은 결코 그를 돕지 않았을 테니까.
“회주님은 저희가 어떻게 했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원진 장로는 이미 알고 있지만 혼자서 간자들을 상대하는 건 힘들 거야. 놈들은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할 테니까.”
오히려 원진을 간자로 몰아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한의 수장인 언규와 이들이 나서준다면 무력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나한들을 이끌고 원진 장로를 도와서 혼란을 잠재워.”
그사이 진백천은 참회동으로 갈 생각이었다.
“……혼자서 가신다는 겁니까?”
“참회동에 가보니까 마인들이 갇혀 있는 곳은 빛 한점 없는 곳이더라고. 여기서 그놈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갚아줄 것도 많고.”
‘……한껏 두들겨 패야 속이 풀릴 것 같아서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 집어삼켰다.
언규는 진백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는 금지보다도 더 좁고 복잡한 미로 같았다.
그런 곳에 우르르 몰려가 봤자 결국 맞부딪치는 건 가장 앞에 선 자뿐이었다.
“회주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위험합니다. 일부는 회주를 따르겠습니다.”
진백천은 굳이 돕겠다는 이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입구 밖에서 빠져나가는 자들을 막아주는 정도는 맡겨도 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움직일까?”
“네. 저희는 전부 괜찮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 밖으로 나가려던 진백천은 문득 장문인을 돌아봤다.
‘마지막으로 인사나 할까.’
나한들과 달리 진백천은 아마 다시는 장문인을 보게 될 리가 없었다.
그를 향해 무림의 후배로서 꾸벅 절을 했다.
그 모습에 나한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좋은 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영면하시길.’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진백천의 시선에 녹색의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응? 저건?’
녹색의 기다란 막대가 장문인의 품속에 숨겨져 있었다.
진백천의 시선을 느낀 언규가 조심스럽게 장문인의 품속을 살폈다.
“……녹옥불장!(綠玉佛杖)”
언규와 나한들은 장문인을 직접 모시지 못하는 대신 녹옥불장을 챙겼다.
그것이 이곳에 있었던 일들을 증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럼 가지.”
* * *
나가는 길은 단순했다.
왔던 길 그대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언규는 해체했던 기관진식을 돌아가면서 전부 돌려놓았다.
한참을 걸어나가자 멀리 입구에서부터 햇빛이 들어왔다.
“나가면 눈썹 휘날리게 움직여.”
“네. 알겠습니다.”
진백천을 따르는 나한은 3명이었다.
“장로분들을 만나고 나면 상황을 전하고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천천히 와도 돼. 그동안 저놈들은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까.”
“네.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라는 말에 진백천이 씨익 웃었다.
진백천은 지금 그들을 막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마인들이 하려던 것처럼 똑같이 사냥을 하러 가는 것뿐이었다.
그 차이를 모르는 언규는 진백천의 웃음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이따 보자고.”
진백천은 출구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나한들과 진백천을 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 중 마교의 간자도 섞여 있었고 그들이 알리기 전에 먼저 참회동에 도착해야 했다.
“……회주! 같이 갑시다!”
뒤늦게 나한들이 눈썹이 휘날리게 쫓아왔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멀어질 뿐이었다.
참회동 바로 앞까지 도착한 진백천은 그 앞을 지켜서고 있는 무인을 확인했다.
운조 대사 옆에 붙어 있는 마인 중 하나였다.
“……멈춰라!”
놈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진백천을 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에 담긴 내력이 제법 웅후했지만 금강동인에 비하면 코웃음만 나올 정도였다.
“주먹에는 주먹이지.”
진백천은 그대로 주먹을 맞부딪쳤다.
“커헉!”
마인은 휘두르던 그 모습 그대로 튕겨 나가며 바닥에 처박혔다.
“웬 놈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저놈을 붙잡아라!”
참회동에 있던 소림사 무인들이 다급하게 진백천을 포위하려 했다.
하지만 곧 나타난 나한들을 보며 멈춰섰다.
“그만둬라! 이분은 정도회의 회주님이시다! 다들 물러서!”
나한이라 하면 소림사의 모든 무인에게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진백천을 감싸며 말하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에 다른 간자는 없군.’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이들을 잘 살펴. 마인이면 곧바로 사살하고.”
나한들은 가볍게 합장을 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무승들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그사이 진백천은 참회동 안으로 들어갔다.
운조 대사는 그렇다 치고 갈마기마(渴魔飢魔)를 비롯해 여기 남아 있는 마인들을 전부 없앨 생각이었다.
‘때마침 화풀이 대상도 필요하고.’
지하로 내려가자 완전한 어둠이 그를 감싸 안았다.
보통 이들이라면 두려움을 느꼈을 테지만 진백천은 아니었다.
엄연히 그의 혈도와 내부에 들어차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천마신공의 마기였고, 어둠은 그의 친구였다.
진백천은 짧은 강호행을 하면서 작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바로 강호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고,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각기 달랐다.
정파의 무인들은 그들의 아집과 가치관을 깨부수는 실력과 명분을.
사파의 무인들은 그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무공보다 더한 악랄함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인들에게는…….
‘찍소리도 못할 선빵!’
때마침 누군가 횃불을 들고 진백천에게 다가왔다.
조장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마인이었다.
“누구냐! 여기가 어디라고……!”
진백천은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놈의 가슴팍을 발로 후려 찼다.
제법 내력이 실린 발길질에 가슴팍이 뭉개지며 즉사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굴 안쪽에서 바빠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출구는 막혔으니 천천히 사냥만 하면 되겠지.’
진백천은 오랜만에 천마신공의 마기를 끌어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일렁이는 마기가 바닥에 눅눅히 깔리며 떨어진 횃불의 빛마저 집어삼켰다.
우우우웅-
진백천의 몸에서 시작된 마기는 365개의 혈도를 따라 맹렬하게 맴돌았다.
환력신공으로 인해 대부분이 소멸되었음에도 그 기운은 절대 적지 않았다.
혈도뿐만 아니라 근육 조직과 같은 세맥에도 스며들며 전신이 활력으로 가득 찼다.
‘흐음!’
진백천은 피가 솟구치는 기이한 열감이 온몸을 맴돌았다.
따듯한 물속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묘한 감각이었다.
마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잔을 가득 채운 물처럼 진백천의 몸에서 흘러넘쳤다.
곧 그의 주변은 마기인지 어둠인지 모를 것으로 가득 찼다.
그가 굳이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내는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니었다.
‘마인들에게는 이게 쥐약이니까.’
태허무극진결이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도가의 무공이었다.
분명 강하고 뛰어났지만 마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반면에 천마신공은 모든 마교 무공의 근원이자 뿌리였다.
어떠한 마공도 천마신공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이 마인들이 천마를 두려워하면서 경배했던 이유였다.
‘더구나 이곳에는 저놈들과 나뿐이야. 천마신공을 감춰둘 이유가 없다는 거지.’
“허억!”
마인의 비명을 듣고 다가온 놈들이 천마신공의 마기에 경악하며 멈춰섰다.
그들이 내뱉는 마기는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성만큼이나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 이게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마기가 일렁이며 언뜻 진백천의 얼굴을 비쳤다.
마기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마인이 들고 있는 횃불을 휘감았다.
불꽃이 사라지며 주변은 지독한 어둠에 빠져들었다.
“네놈들 잡아먹을 저승사자다.”
그리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마기는 기쁜 듯 일렁이며 마인들을 집어삼켰다.